1267년 1월 26일. 원나라 대도(베이징)는 정초라 세계 각국에서 오는 수많은 사절단들로 붐볐다. 그 가운데 탐라국 사람 양호가 있었다. 양호는 원나라 세조를 만났다.

원나라 세조는 역사상 가장 넓은 지역을 정복한 나라 쿠빌라이 칸이다. 이날의 일을 원나라 역사인 <원사>는 이렇게 적고 있다.

백제가 그 신하 양호를 보내서 입조하니, 수놓은 비단을 차등 있게 하사했다.

쿠빌라이 칸 징기스 칸의 손자이며 몽골족이 세운 원을 통합하고 중국대륙을 정복했다. 이민족의 문화에 대해 포용력을 갖췄기 때문에 동서양을 아우르는 수준높은 문화를 이뤄냈다. 고려의 임금인 충선왕은 그의 외손자였다.(그림=위키피디아)
쿠빌라이 칸 징기스 칸의 손자이며 몽골족이 세운 원을 통합하고 중국대륙을 정복했다. 이민족의 문화에 대해 포용력을 갖췄기 때문에 동서양을 아우르는 수준높은 문화를 이뤄냈다. 고려의 임금인 충선왕은 그의 외손자였다.(그림=위키피디아)

양호는 탐라국을 떠난 후 먼저 강화도에 들어가서 왕을 알현했다. 그리고 다시 50일간의 여행 끝에 대도에 도착한 것이다. 이 일에 대해 고려사는 이렇게 썼다.

1266년 12월 6일(양력) 제주성주(濟州星主)가 와서 왕을 알현했다.

느닷없이 멸망해버린 백제는 왜 나왔을까? 또 제주성주라니. 그건 또 뭐란 말인가. 게다가 다른 기록에 의하면 양호는 탐라국 왕자라고 한다. 도대체 백제 신하, 제주성주, 탐라왕자라는 세 개의 직함을 갖게 된 이유는 뭘까?

1267년이라면 고려정부가 강화도에 들어가서 몽골과 전쟁을 벌이다 막 강화협상을 한 직후다. 그런데 왜 탐라국 사람 양호는 강화도와 베이징을 오가고 있었으며, 원에서는 왜 선물을 준 것일까? 뭔가 복잡해 보이는 이 이야기가 바로 당시 탐라국 속으로 들어가는 열쇠다.

성주라는 말은 고을나의 15대손인 고후, 고청, 고계 삼형제가 통일 이후의 신라를 방문했을 때 남쪽하늘에 객성이 떴고, 이것을 상서롭게 여긴 신라왕이 세 형제에게 각각 성주, 왕자, 도내라는 칭호를 내리면서부터라고 한다. 아마도 독립된 왕국으로 인정하면서 원래 있었던 칭호를 계속 이어가도록 해준 것으로 보인다.

이때 탐라라는 이름도 정식으로 정해진다. 그전에는 탁라, 섭라, 탐모라 등 아마도 들리는 대로 불렀던 듯하다. 성주는 제사장, 왕자는 군사권을 가진 사람, 도내는 민회의 수장 정도로 여겨지고 있다. 세습왕조가 나타나면서부터 도내는 유명무실해졌고, 고려 이후 사라진다.

성주작위는 대외적으로 대표성을 갖고 있었다. 고려 건국 이후 고씨부족은 적극적으로 고려정부와 소통하기 시작하면서 성주직을 세습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제주 서쪽은 중국이나 한반도와 교류를 하기 쉬운 지리적 이점이 있었다. 이곳에서 성장한 양을나 부족을 파트너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기에 왕자작위를 양보한다. 고을나, 양을나, 부을나 삼신인이 땅에서 솟아나온 후 바다 건너온 벽랑국 공주와 결혼한 뒤 활쏘기 시합을 거쳐 세 개의 마을에 사이좋게 나눠살았다고 하는 탐라건국신화는 이때 만들어졌을 것이다.

그동안 탐라를 손에 넣으려는 외세는 없었다. 순풍에 돛을 달고라도 꼬박 닷새를 항해해서 와야 하는 탐라는 매력이 없는 섬나라였다. 그러나 고려는 달랐다. 그들은 바다의 가치를 알았고 배 만드는 기술도 발전했다.

숙종 때인 1105년 탐라국은 오랜 독립국의 지위를 잃고 고려에 편입되었다. 이태 후 고조기는 제주도 출신 최초로 과거시험에 합격했고, 김부식의 측근으로 활약하며 역시 제주 출신 최초로 재상에까지 오른다. 고조기의 아버지인 고유가 빈공과에 수석 합격하였으나 외국인이란 이유로 차별받았던 것에 비하면 하늘과 땅 차이의 대접이다. 독립성을 포기한 대신 성주가문은 승승장구했고, 탐라에서 지위도 굳건했다.

고조기 묘 제주시 아라동에 위치한 문경공 고조기묘는 고려시대의 묘로서는 연대가 확실한 고려시대 상류층의 분묘이며 누구의 묘소인지 알 수 있는 가장 오래된 묘이다. (사진=탐라원)
고조기 묘 제주시 아라동에 위치한 문경공 고조기묘는 고려시대의 묘로서는 연대가 확실한 고려시대 상류층의 분묘이며 누구의 묘소인지 알 수 있는 가장 오래된 묘이다. (사진=탐라원)

고려정부에 편입되면서 지방관이 오기 시작했고 탐라는 가렴주구의 땅이 된다. 척박한 탐라 백성들은 견디지 못했다. 삼신인의 후손은 탐라 백성들을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고려정부의 편에 선 성주가문은 이 의무를 잊었다. 민심이 동요했고, 그틈을 타 양씨가문은 적극적으로 지방관에 대항하면서 성장했다. 그 와중에 그토록 믿었던 문벌귀족이 몰락하는 무신정변이 벌어졌고 성주가문은 끈 떨어진 갓신세가 되었다.

무신정권 집권기에 전국을 들끓는 민란은 탐라국도 강타했다. 고려정부에 줄을 댄 성주가문과 민심을 등에 업은 왕자가문 사이에 긴장감이 맴돌았다. 그러자 고려정부에서는 성주가문의 지배구역은 동쪽 탐라현으로 하고, 왕자의 지배구역은 서쪽 귀덕현으로하는 타협을 해준다. 이로써 제주에 처음으로 행정구역이 생긴다.

물론 귀덕현은 탐라현의 속현이므로 탐라현의 맹주인 성주가문의 기득권은 남아있었다. 그리고 곧바로 탐라군을 제주로 격상시킴으로써 고려정부는 이 구역의 형님이 누구인지 보여준다. 더 이상 싸우지 말고 사이좋게 세금을 걷어보내란 뜻이다.

불안한 이중권력의 상황에서 몽골이 침략하면서 성주가문은 허수아비나 다름없게 되었다. 꾸준히 민심을 얻으며 세력을 키워온 왕자가문은 마침내 실권을 쥐었다. 연말에 인사차 탐라국에서 사절을 보내는 것은 관례였고 왕자 양호가 제주의 대표자격으로 강화도에 도착한다.

강화도 고려정부는 대표가 왔다고 하니 당연히 제주성주로 기록했을 것이다. 그것이 고려사에 남은 ‘제주성주가 왕을 알현했다.’의 진실인 것이다.

그러면 왜 양호는 백제 신하라는 자격으로 원나라 황제 쿠빌라이 칸을 만났을까? 거꾸로 왜 세계를 정복한 쿠빌라이 칸이 작디 작은 섬 탐라국의 대표자를 불러들인 것일까?

이미 몽골과의 전쟁은 끝났고 곧 고려정부는 개경으로 돌아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쿠빌라이는 앓던 이가 빠진 듯 후련했다. 이제 남은 나라는 남쪽으로 쪼그라든 남송과 일본뿐인데, 이 두 나라를 치려면 그 사이에 낀 고려의 도움이 필요했다.

그런데, 정보력 하나만은 기가 막힌 몽골에서 놀라운 소식 하나를 들었다. 바로 제주라는 곳이 지리적으로 완벽하게 남송과 일본의 사이에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배를 만드는 기술도 탁월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배를 만들고 진격하면 일본과 남송으로 갈 수 있지 않은가. 고려에 속한 곳이긴 하지만 일종의 자치정부인 탐라국이 있다니 이보다 더 좋은 일은 없었다.

한라산 구상나무 덕판배는 제주 해안에 많은 바위들을 이기기 위해서 통나무로 앞에 덧대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이 배는 구실잣밤나무나 종가시나무, 또는 한라산 고산지대에서 자라는 구상나무로 만들었을 것이라고 한다. 한반도에서 만드는 대부분의 배들은 소나무로 만든다 구상나무는 소나무보다 비중이 75%밖에 안되서 가볍다. 일본은 삼나무로 배를 만드는데 삼나무는 구상나무 비중의 90%로 가볍지만 부서지기 쉽다. (사진=고진숙)
한라산 구상나무 덕판배는 제주 해안에 많은 바위들을 이기기 위해서 통나무로 앞에 덧대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이 배는 구실잣밤나무나 종가시나무, 또는 한라산 고산지대에서 자라는 구상나무로 만들었을 것이라고 한다. 한반도에서 만드는 대부분의 배들은 소나무로 만든다 구상나무는 소나무보다 비중이 75%밖에 안되서 가볍다. 일본은 삼나무로 배를 만드는데 삼나무는 구상나무 비중의 90%로 가볍지만 부서지기 쉽다. (사진=고진숙)

양호로서도 꿩먹고 알먹기였다. 대제국 원과 손을 잡는다면 탐라국은 이제 완전히 자신의 손에 들어갈 것이었다. 그리고 잘하면 고려와 연을 끊고 대제국의 일원으로 해상왕국을 이룩할 수 있을 것이다.

대도에는 인종도 언어도 다른 온갖 나라 사람들이 드나들고 있었다. 기회의 문이 전 세계로 활짝 열려있었고, 탐라는 원제국도 갖지 못한 바다를 갖고 있었다. 양호와 쿠빌라이칸은 같은 꿈을 꾸고 있었고, 두 사람은 기분 좋게 선물을 주고 받고 헤어졌다. 이것이 쿠빌라이와 양호가 만난 이유이다.

그런데, 왜 <원사>에는 백제에서 보냈다고 했을까?

삼국시대에 탐라는 국제무대에서 스스로를 백제의 좌평이라고 할 만큼 백제의 대우에 매우 만족했었다. 그것은 임금 아래 최고 작위였고, 그런 취급을 해준 나라는 없었다. 백제는 당시 국제무대에서 맹활약 중인 강대국이었고, 친히 ‘얘는 내 큰 동생이야,’ 라고 해준 것이니 탐라로서는 든든한 뒷배를 얻은 셈이었다. 탐라는 백제가 멸망한 후 백제부흥군에 참가하면서 형제의 나라에 대한 의리를 지켰다.

그러나 백제는 사라지고 그 자리를 신라와 고려가 대신했다. 그 나라에도 조공을 바쳤지만 냉정했다.

“갖고 온 것은 놓고 나가봐. 그래도 너네끼리 성주 왕자하고 지내는 건 뭐라 안할게.”

백제의 좌평이란 그러므로 신라와 고려에 대한 불만이었고, 독립국에 대한 열망이었다. 좌평이란 귀족작위는 탐라국의 수장에 대한 작위였고 그때는 고씨가문과 양씨가문이 연합부족으로서 서열이 갖춰지지 않은 상태였을 수도 있다. 백제 멸망 이후 신라와 고려와 접촉, 재빠르게 성주자리를 꿰찬 것은 고씨가문이었다. 성주가문 사람들은 탐라사람들의 마음을 얻기보다 끝없이 외부 권력과 손잡는데 열을 올렸다.

탐라국이 국제무대에서 맹활약한 시대는 백제좌평의 작위를 받은 직후였다. 따라서 국제무대에서 탐라국의 수장은 백제좌평이었던 것이다. 거기에다 쿠빌라이는 냉정한 사람이다. 탐라가 고려의 땅 제주가 아니라 독립된 왕국이라면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없지 않은가. 야심은 곧 드러났다. 일본 원정의 실패이후 원의 직할령으로 삼으면서 탐라총관부라는 이름을 붙였으니까 말이다. 이미 백제 좌평이라 칭할 때부터 예견된 일이었다.

양호로서는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세계를 무대로 칼춤 한 번 출 수 있을거란 꿈에 부풀어서 왔던 길을 되짚어 집으로 돌아온 양호를 기다린 것은 아름다운 제주의 봄이었다.

그러나 거센 꽃샘추위가 몰아닥치듯 그 앞에 놓인 현실은 냉혹하기만 했다. 양호가 도착한 직후 제주 동쪽에서 문행노가 난을 일으켰다는 얘기를 들을 때만 해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술이 식기 전에 반란을 간단히 제압함으로써 제주에서 양호의 입지는 견고해 보였고, 뒤에는 쿠빌라이가 있으니 비단길이 놓인 듯 보였다.

1267년 봄. 제주는 폭풍전야의 고요 속으로 빠져 들어가고 있었다.

귀덕 복덕개 귀덕1리는 과거 귀덕현이 있었던 곳으로 여겨지고 있다. 귀덕1리 포구인 복덕개는 영등할망이 들어오는 입구로 잘 알려져 있으며 이곳에 영등할망 신화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사진=고진숙)
귀덕 복덕개 귀덕1리는 과거 귀덕현이 있었던 곳으로 여겨지고 있다. 귀덕1리 포구인 복덕개는 영등할망이 들어오는 입구로 잘 알려져 있으며 이곳에 영등할망 신화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사진=고진숙)

 

고진숙

고진숙 작가

고진숙 작가는 용눈이오름 아래에서 태어나 제주 밖에서 바람처럼 살았다. 지금은 일 년의 절반을 제주에서 보내는 반서(울)반제(주)인이다. 역사동화 '이순신을 만든 사람들'을 시작으로 최근 '청소년을 위한 제주 4.3'까지 다양한 역사콘텐츠들을 쓴 고 작가. 2021년부터 매월 세번째 월요일에 독자들과 만나는 [제주옛썰]은 고진숙 역사작가의 눈으로 제주가치를 재평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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