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3년에 삼별초의 난을 진압한 후 몽골군은 제주에 눌러 앉았다. 처음엔 일본정벌을 위한 군사기지로 쓸 생각이었지만 곧 직할령으로 삼았다. 고려의 제주목이었던 제주는 탐라국의 이름을 되찾았다. 일본정벌을 포기한 후에도 원은 탐라국을 고려정부에 줬다 뺏었다 했지만 본질은 바뀌지 않았다. 원의 멸망직전에는 탐라에 피난정부를 세울 생각으로 최고급 궁궐 기술자들을 보내기도 했다. 몽골인들은 제주를 '낙토' 즉 파라다이스라고 불렀다.

1276년에 탑자적이 탐라총관부의 우두머리인 다루가치로 부임하면서 몽골말 160필을 가져왔다. 제주는 동서로 길게 늘어진 타원형의 섬이고 특히 동쪽은 수많은 오름 에 둘러싸인 초원지대가 있다. 탑자적은 그곳 수산평(지금의 성읍리 -수산리)에 목마장을 설치했다.

몽골족이 가진 선진적인 목축기술과 제주의 자연환경이 만나자 목마장은 대성공을 거뒀다. 이듬해에는 고산평에도 두 번째 목마장을 설치하고 말을 관리하는 전문가인 목호들이 계속 들어온다. 세계를 제패한 원제국의 핵심은 뭐니 뭐니 해도 말이다. 말목장은 핵심군사산업단지였고 탐라는 원의 14개 국립목장중 하나로 도약했다. 제주의 경제중심은 이 두 곳의 목마장인 동아막(수산평)과 서아막(고산평)이 된다.

(동아막과 서아막은 조선시대에 정의현과 대정현이 된다. 아막은 주둔지를 의미하는 몽골어의 한자식 표기이다.)

총관부의 책임자 다루가치는 정교한 호구조사를 통해 체계적으로 정복지를 관리할 의무가 있었다. 총관부를 설치한 직후 보고한 탐라 인구는 1만 223명이었다. 원이 탐라를 지배한 100년 동안 인구는 폭발적으로 늘어서 3만명 가까이 된다.

(조선시대에는 오히려 인구가 줄기도 했고, 극도로 인구증가가 낮았다. 몽골지배아래서 제주는 중국을 비롯한 국제무역과 목축수산업을 통해 번성했으나 조선시대에는 해양이 막힌데다 수탈이 심했기 때문이다)

벼농사를 짓기 어려운 척박한 땅 탐라는 목축업과 수산업, 그리고 중국과의 무역으로 번창했다. 탐라의 몽골귀족들은 이를 바탕으로 목에 힘깨나 주고 살았고, 개경나들이가 잦았다. 이들을 따라 1000여 명의 탐라인들이 개경을 오갔고 대제국 원과 고려의 문물이 탐라로 들어오고 나갔다. 탐라는 팍스몽골리카의 국제도시였다.

목호들은 원제국 국영목장 경영자라는 지위를 기반으로 탐라사회의 유력자가 되었다. 그들과 탐라여인 사이에서 태어난 2,3세들 또한 권세를 누렸다. 몽골인들은 서아막, 동아막에 성을 쌓고 지내다가 차츰 기후가 온화하고, 중국으로 이어지는 포구가 있는 예래와 강정에 고급주택단지를 만들었다.

몽골의 목호들과 결혼한 여인들의 기세도 등등했다. 그 중에는 고려 여인 정씨도 있었다. 그녀는 외모가 특별히 아름다웠다고 한다. 동아막 소속의 젊고 유망한 젊은 목호 석아보리개와 사랑에 빠졌고, 곧 결혼했다. 둘은 부러울 것 없는 신혼의 단꿈에 젖는다.

영원할 것 같았던 원제국도 쇠퇴했고, 명이 일어났다. 그 틈을 타 공민왕은 반원정책을 펼쳤다. 목호와 고려정부 파견 관리와의 크고 작은 충돌이 빈번히 일어나기 시작했다.

홍건적과의 싸움도 정적들과의 싸움도 정신을 차리기 힘들었지만 공민왕은 저 멀리 탐라의 일에 극도로 예민했다. 탐라를 둘러싼 거대한 국제분쟁이 놓여있었기 때문이다.

원이 거의 멸망직전에 이르자 고려는 명과 정식 국교를 맺었다. 그러면서 떠오른 문제가 탐라의 소유권이었다. 공민왕은 부랴부랴 <탐라계품표>라는 외교문서를 작성하여 명에 보냈고, 탐라가 고려의 땅임을 분명히 했다.

탐라에 남은 몽골인들은 하루아침에 이방인이 되어버렸다. 목호들은 자기나라와 싸우는 명에 말을 바치라는 고려정부의 명령을 거부하며 반란을 일으켰다. 고려정부는 탐라의 일을 심각하게 생각했다. 만일 목호들이 탐라를 자기들 수중에 넣는다면, 명은 원의 잔존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병사를 이끌고 탐라로 갈 것이고, 그 후 탐라는 명의 정복지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공민왕은 가장 믿는 장수 최영에게 목호의 난을 진압하라고 명령한다.

출정군은 총 2만 5,505명으로 당시 탐라인구와 맞먹는 숫자이고, 삼별초 토벌 때의 두 배가 넘는 규모의 대군이었다. 이들을 실은 전함 314척이 (한림) 명월포 앞바다를 까맣게 메웠다. 이윽고 탐라 땅에 상륙한 고려군은 끝까지 저항하는 목호들과의 25일간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최영의 군대는 투항한 목호와 자살한 목호들의 목까지 전부 베어 개경에 보냈고, 도망가는 무리는 최후의 1인까지 쫓아가서 전부 죽였다. 정씨의 남편인 석아보리개도 목숨을 잃었다.

막숙포와 범섬(사진=고진숙)
고려군에 밀린 목호세력은 법환포구 앞 범섬에 자리잡는다. 최영은 배 40척을 내게 한 뒤 직접 범섬을 압박한다. 법환포구에 있는 막숙포는 최영장군이 막사를 설치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사진=신순배)

고려 최고의 무장들로 구성된 최영 군대가 목호의 난을 진압하는 동안 공민왕이 시해되었다. 뒤를 이은 우왕은 두려움 속에서 최영 곁을 떠나지 않으려 했다. 그 바람에 요동정벌군은 이성계가 이끌었고, 위화도회군을 통해 고려를 멸망시켰다. 목호들이 고려에 남긴 복수 아닌 복수인 셈이다.

원의 속국이었던 탐라국은 다시 고려의 제주목으로 바뀌었다. 살아남은 몽골인들은 빠르게 탐라인 속으로 녹아들어갔다. 대원제국의 일원임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대원본관이란 몽골성씨를 고수하던 그들은 우리식 본관으로 족보를 바꾸며 몽골의 흔적을 지웠다. 석아보리개의 아내 정씨는 최하층 빈민으로 떨어져야 했다. 그러나 그래도 꿋꿋하게 독립된 여성으로서의 삶을 선택했고, 그것이 많은 이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는지, 열녀비가 세워졌다.

정씨 열녀비(사진=고진숙)
목호의 아내인 정씨에게 열녀비가 세워진 까닭은 이곳이 동아막의 영향아래 있었던 마을로 마을주민들과 잘 어울려 지냈기 때문인 듯하다. 탐라에서 몽골의 후손이란 것은 그다지 흠이 되지 않았던 듯하다. 몇몇 성씨는 대원본관을 19세기까지도 유지했다. 비는 원래는 남원읍 의귀리 ‘정비못’(못거리)에 있었으나, 지금은 한남리 주민센터 마당에 있다. (사진=고진숙)

탐라에 온 몽골인들은 황족을 비롯한 상류층들이었다. 목호의 난은 제압되었지만 여전히 탐라에는 몽골인들의 생활 인프라가 존재했다. 원의 멸망 이후 명은 일종의 배려차원에서 원의 황족들을 탐라로 유배보냈다. 그런 까닭에 제주도만큼 몽골의 귀족과 황족의 풍습이 많이 남아 있는 곳은 없다고 한다. 제주의 언어와 음식문화 속에서는 그들이 남긴 강렬한 흔적을 찾을 수 있다.

고렴(조문), 고적(부조떡), 구덕(바구니), 복닥(껍질,모자), 허벅(동이), 호랑(처마), 술(), 혼저(빨리), 살래(찬장), 눌(낟가리), 놈삐(), 촐래(반찬) 같은 제주어는 몽골어에서 나온 말이라고 한다. 안채와 바깥채를 제주에서는 안거리, 밖거리라고 하는데 여기에 쓰이는 ‘거리’도 몽골 전통 천막인 게르에서 빌려온 말이라고 한다. ‘웡이자랑’도 몽골의 자장가였다고 한다.

상애떡은 쌍화점이란 고려가요에서 나오는 상화라는 중국식 만두가 제주에서 변형되어 만들어진 떡이다. 쉰다리라는 음료는 몽골의 타라크에서 나온 것이고, 몽골 군인들의 야전식량인 게데스에서 나온 것이 수애(순대)이다. 고기국수는 몽골의 양국수가 원조이고, 몸국과 같은 탕도 슐렝이라고 하는 몽골음식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특히 술은 몽골의 영향으로 만들어져 몽골군이 주둔했던 곳마다 안동소주같은 명품소주를 탄생시키기도 했는데 제주도에서도 증류주인 고소리술을 낳았다.

제주전통 고소리 술을 만드는 모습. (사진=제주 민속촌 박물관)

겉으로는 지금의 제주에서 몽골의 흔적을 쉽게 찾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대제국 원의 번성한 도시로서 100년을 지냈으니 제주인들의 삶 깊은 곳에 그 흔적이 남겨져 있는 것은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제주는 사방이 열린 섬이고, 세계의 일부이니까 말이다.

 

고진숙

고진숙 작가

고진숙 작가는 용눈이오름 아래에서 태어나 제주 밖에서 바람처럼 살았다. 지금은 일 년의 절반을 제주에서 보내는 반서(울)반제(주)인이다. 역사동화 '이순신을 만든 사람들'을 시작으로 최근 '청소년을 위한 제주 4.3'까지 다양한 역사콘텐츠들을 쓴 고 작가. 매월 첫째주 수요일 독자들과 만나는 [제주옛썰]은 고진숙 역사작가의 눈으로 제주가치를 재평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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