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픽사베이)
(사진=픽사베이)

‘돈’에 관한 불편한(?) 진실

자본주의란 말 그대로 재물(資)이 으뜸(本)인 사회다. 모든 게 ‘돈’이란 재물을 기준으로 가치가 매겨지고 상품으로 거래된다. 이른바 ‘보이지 않는 손’에 감춰진 시장이란 정글은 본디 부조리로 가득하다.

아무리 쓸모(사용가치)가 있어도 값어치(교환가치) 없는 물건은 시장에서 외면받기 십상이다.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일이지만 이윤이 생기지 않으면 ‘그림자 노동’처럼 무시당하기 일쑤다. 창고에는 물건이 쌓였지만 소비할 사람은 없고, 일할 능력이 있는 사람이 넘쳐나지만 정작 써줄 데가 없다.

애당초 돈이란 필요한 물품이나 일을 편리하게 교환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 그런데 지금은 무소불위로 온갖 세상만사를 좌지우지한다.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능력마저 돈으로 사고 팔린다. 돈이면 장땡, 일거수일투족이 ‘쩐의 전쟁’ 그 자체다.

하니 내남없이 돈벌이에 악다구니로 나설 밖에. 그럴수록 지금의 돈벌이 사회는 불행하다. 아니 위태롭기 짝이 없다. 멀쩡하던 관계가 돈 문제로 나빠지고, 돈 때문에 의가 상하기도 한다. 때로는 돈에 쪼들려 목숨을 끊기도 하고, 돈에 눈멀어 사람을 죽이는 일도 생긴다. 그 뿐인가. 돈만 준다면 자연을 헐값에 내다팔거나, 돈만 된다면 생태계를 짓밟는 짓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이미지=한밭레츠 홈페이지
이미지=한밭레츠 홈페이지

레츠(LETS)의 탄생, “소꿉장난도 아니고 그것이 가능해?”

하지만 모든 돈이 그런 것만은 아니다. 사람을 살리고, 공동체를 회복하는 돈도 있다. ‘지역통화'가 바로 그것. 지역통화는 전국 단위가 아니라 한정된 지역에서만 유통되며, 주민들 스스로 발행하는 돈을 일컫는다.

“소꿉장난도 아니고 그것이 가능해?”

우리끼리 쓰는 돈을 스스로 만들어 보자 건네면 사람들 반응은 대체로 시큰둥하다. 다들 말이 되지 않는다며 돌아서기 바쁘다. 그러나 이 소꿉장난은 이미 오래 전에 시작됐고 벌써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

지역통화는 19세기 초 영국 사회주의자 오웬(R. Owen)이 노동교환소를 설립, 노동자들에게 재화와 교환할 수 있는 ‘노동증서’를 지급하면서 시작된 것. 1930년대 세계대공황 때까지 미국이나 유럽 등지에서는 비교적 활발히 시행됐다.

그러나 고도성장기에 접어들고서는 국민통화시스템을 어지럽힌다는 이유로 지역통화 대부분이 아쉽게도 폐지되고 말았다.

오늘날 지역통화의 원형은 ‘레츠(LETS ; Local Exchange and Trading System)’라 할만하다. ‘레츠’는 1980년대 초 캐나다 코목스 밸리라는 조그마한 섬 마을에서 탄생했다. 창안자는 컴퓨터 프로그래머였던 마이클 린턴(M. Linton). 경제불황 때문에 그가 살던 농촌공동체가 심하게 훼손되자 이 시스템을 고안한 것.

경제불황은 실업자를 대량으로 양산했다. 실업자들은 일할 능력과 의지를 가지고도 살아가기 힘들었다. 현금을 소유하지 못하면 아무런 경제행위를 영위할 수 없다는 당연한 사실이 그에겐 새로운 아이디어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지역통화 '이타카아워즈'
지역통화 '이타카아워즈'

‘돈이란 무엇인가? 우리라고 만들지 못하란 법이 있는가?’

그는 사람들이 서로 부족한 부분을 채우려할 때 꼭 중앙의 국민통화시스템을 따라야만 하는지 의문을 품었다. 왜냐하면 중앙은행에서 발행하는 현금은 늘 부족하기 마련. 이를 얻기 위해 사람들은 서로 다투게 되고 결국 소수만이 만족할 수 있기 때문이다.

린턴은 그들만을 위한 새로운 화폐를 고안하고 그것을 사용하기 위한 시스템을 만들었다. 그것이 ‘레츠’다.

‘레츠'의 기본구상은 현금을 사용하지 않고 물품이나 서비스를 교환하는 것이다. ‘레츠’ 회원은 누구든지 자신이 필요로 하는 물품이나 서비스를 다른 회원들로부터 제공받을 수 있고, 거기서 생겨난 채무는 다음에 자신의 물품이나 서비스를 필요로 하는 회원들에게 제공함으로써 변제된다.

이를테면 목수(A), 치과의사(B) 요리사(C), 농부(D), 교사(E) 등 다섯 명으로 이뤄진 지역통화 공동체가 있다고 가정해보자.

이 경우 만일 C가 A에게서 집수리를 서비스 받았다면 이때 C는 집수리에 대한 채무를 지지만 A에게 직접 그 등가물을 건넬 필요는 없다.

C는 E의 요구에 따라 요리를 해줌으로써 채무를 변제할 수 있고, E가 B의 요구에 따라 아이들을 교육시켜줌으로써 자기의 채무를 갚으면 그만이다.

B는 D의 치아를 치료해줌으로써 다시 채무를 갚고, D는 A에게 쌀을 제공해 줌으로써 각각의 요구들이 충족된다.

이렇게 물품이나 서비스 거래망이 회원 사이에서 차금차금 넓혀진다.(윤용택, ‘지역통화운동의 환경철학적 의의’에서 내용 발췌)

렛츠 수눌음 소식지 6호
렛츠 수눌음 소식지 6호

‘레츠’는 정기적으로 회보를 발행한다. 그를 통해 누가 어떤 생산물이나 서비스를 제공하였고, 누가 무엇을 얻었는가를 일람표로 만들어 회원에게 알린다. 각 회원은 이 정보에 따라 서로 연락을 취해 거래하면 된다.

이때 공동체에서는 서로의 거래내역을 정산하기 좋게 독자적인 신용화폐, 즉 ‘그린 달러’를 만들어 쓴다. 실제로 거래가 행해지면 그 정보가 ‘레츠’ 사무소에 보고된다. 그 자료가 사무소의 컴퓨터에 입력됨으로써 해당회원의 계정이 그때마다 회원들에게 정기적으로 대차대조표로 통지된다.

지역통화...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

부탁이다. 지역화폐와 제발 혼동하지 말자.

지역 안에서만 사용되니 엇비슷하다 생각할 수는 있다. 하지만 쓰임새는 딴판이다. 지역화폐는 자치단체가 발행하는 지역사랑상품권으로 현금이나 다름없다.

코로나19로 위축된 소비 진작이란 명목으로 자치단체들이 앞 다투며 발행에 나서 왔다. ‘서울사랑상품권', '경기지역화폐', '동백전'(부산), '여민전'(세종)... 저마다 이름도 제각각. 제주에선 ‘탐나는전’이라 불린다.

반면 지역통화는 주민들 스스로 만들어 쓰는 돈이다. 국민통화인 현금과 맞바꿀 수도 없다. 할인쿠폰처럼 사용되는 우리네 지역화폐와는 여러모로 구별된다. 한마디로 일종의 대안화폐, 공동체 통화인 셈이다.

제주도 화폐 '탐나는 전'. 제주도 제공
제주도 화폐 '탐나는 전'. 제주도 제공

레츠(통장기입형), 이타카아워즈(화폐발행형)는 그나마 잘 알려진 편. 전 세계 4000여 곳에서 사용된다고 전해진다. 우리나라에선 대전 ‘한밭레츠’정도가 대표적이다.

특히 ‘레츠’의 경우, 지역통화는 기본적으로 계정 속에서만 존재할 뿐 결코 현금화될 수 없다. 여러 가지 물품과 서비스를 주고(+) 받지만(-) ‘레츠’ 시스템 전체에서는 원칙적으로 잔고는 늘 영(0)이다.

즉, 시스템 전체로서 볼 때 여러 가지 물품과 서비스를 주고받았기 때문에 삶의 질은 높아졌지만 현금은 축적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지역통화는 각 회원의 계정을 표시하고, 시스템 전체의 거래규모를 표시하는 수단이지 가치증식의 수단은 결코 아니다.

또한 이자가 없기 때문에 잔고를 플러스 상태로 오래 놔둔다고 더 불어나지 않는다. 가능하면 잔고를 빨리 사용하는 게 이익이라 물품과 서비스의 순환이 빨라지고 그만큼 지역경제는 활력을 되찾는다.

그뿐 아니다. ‘레츠’는 회원들에게 대단히 고무적인 심리적 효과를 가져다주었다.

① 신뢰관계에 바탕을 둔 화폐시스템으로 인간에 대한 신뢰감을 회복할 수 있다.
② 돈이 없는 회원도 대등한 구매력을 갖게 됨으로써 각자의 존엄성을 지킬 수 있다.
③ ‘돈이 부족하다’는 의식이 없어짐으로써 경쟁하는 일이 없다.
④ 부채가 있어도 이자가 없기 때문에 시간적으로 쫓기지 않아서 정신적인 여유가 생긴다.
⑤ 자기가 좋아하고 잘하는 일을 하면서 살아갈 수 있기 때문에 인생의 보람을 느낀다.

모든 문제를 돈으로 해결해야 하는 사회에서는 돈이 부족하면 삶의 질은 떨어지기 마련. 만일 지역통화로 사용가치는 있지만 교환가치가 없어서 시장에서 배제된 물품들을 우리 생활 속에 순환시킬 수 있다면, 폐기물이 그만큼 줄어들고 자원 낭비도 막을 수 있다.

아울러 살아가는 데는 반드시 필요하지만 노동시장에 배제되었던 서비스들을 우리의 삶 속으로 편입, 실업자는 그만큼 줄어든다.

따라서 지역통화를 통해 현금 없이도 물품과 서비스가 거래된다면, 돈벌이 때문에 무분별하게 환경과 생태계를 파괴하는 일 또한 막을 수 있다. 

지역통화 활용 영역 (네덜란드 코인재단(qoin) 공동체 화폐의 활용
지역통화 활용 영역 (네덜란드 코인재단(qoin) 공동체 화폐의 활용

그렇다고 너무 오해하지는 말자. 주민 모두가 지역통화를 이용할 필요는 없다. 그리고 모든 부분에서 지역통화를 의지할 필요도 없다. (모든 사람이 아니고) 일부 사람들이 (모든 분야에서가 아니라) 자신들이 필요한 분야에서 현금 없이 물품과 서비스를 지역통화로 거래할 수만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레츠(LETS) 수눌음’을 기다리며

2000년 2월 첫발을 뗀 대전 ‘한밭레츠’, 햇수로 벌써 스무 해를 넘겼다. 화폐명은 '두루'. 거래는 현금과 두루를 같이 사용하는데, 전체 가격의 30% 이상을 두루로 이용해야 한다. 2020년 말 현재 회원은 670가구, 가맹점에는 병원이나 약국을 비롯해서 자영업체 100여 곳이 참여한다.

홈페이지 화면 갈무리
한밭레츠 홈페이지 화면 갈무리

한밭레츠 2021년 정기총회 자료집에 따르면 연간 약 7000건 정도가 거래됐고, 규모로는 약 1억 7000만 두루/원를 넘어선다. 의료, 재활용품, 농산물이 주요품목이지만 자원활동, 대여, 급여, 후원금, 교육, 배달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한밭레츠 회원들 대부분은 지역통화를 통해 지출을 그만큼 줄일 수 있어 좋기도 했지만, 그 보다는 하나같이 돈으로 살 수 없는 가족같이 따스한 이웃을 만나 큰 행복을 얻을 수 있었다며 한껏 뿌듯해 한다.

“혼디 수눌어 보게 마씀” 10여 년 전이다. 필자가 몇몇 사람들과 지역통화 해보자며 이리저리 나다닐 때가. 채 6개월도 못 버티고 제풀에 꺾여 멈춰버렸지만 못내 아쉬움은 컸더랬다.

그래선지 모르겠다. 언젠가는 우리 스스로 만들어 쓰는 돈, 지역통화가 제주에도 발붙일 날을 기다려 본다. 손(手)을 포개(눌음) 서로 도와주고 보살피는 다자간(多者間) 품앗이, 수눌음이란 어원처럼 말이다. ‘

레츠(LETS) 수눌음’, 어쩌면 ‘오래된 미래’도 이런 모습은 아닐까.

농가 : ABCDE
목축계 : BCDE 순번제로 돌아가면서 소를 돌봄
김매기계 : CD 등가 노동의 교환
그릇계 : ABCD 현금을 소액 출자하여 행사 때 사용할 많은 그릇을 사서 마을회관에 놓아둠. 구성원은 잔치가 있을 때 공짜로 그릇을 사용하지만, 다른 마을사람들은 일정한 금액을 내고 그릇을 빌려 사용하게 됨.
쌀계 : BDE 구성원이 이번 달에 B가 필요한 쌀을 모아 받으면, 다음 번에는 D와 E가 순서대로 쌀을 받음A와 C, A와 E : 부등가 노동의 교환. 밭을 밟기 위해 1일 소를 빌리면, 2일-3일 김매기 노동으로 돌려줌. A와 B : 물물교환이 아니라 필요한 물건을 부조하면 다음에 다른 물건으로 돌려받음. 증답

 

“시장에서 모든 것을 얻어야만 하는 이 시대...(중략)...다시 사람과 사람들의 관계, 사람과 자연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대안으로 많은 사람들이 공동체의 복원을 이야기한다. (수눌음은) 상상의 공동체가 아닌 현실의 대안으로 사회적 자본을 만들어내는 생활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특히 계를 중심으로 한 (수눌음 네트워크란) 관계의 형성은 오늘날 사회적경제생태계와 그 모습이 닮아 있다.

- 김자경, ‘제주의 전통적 커머닝 : 제주 목축문화의 재해석’에서 인용-

 

강종우 제주살림충전소장

뉴턴의 물리학 법칙에 따르면, 호박벌은 절대로 날 수가 없다. 날개 길이가 몸무게를 지탱할 만큼 길지 못하기 때문. 그런데 호박벌은 날아다닌다. 마찬가지로 통상의 경제학 이론으로는 협동조합은 장기적으로 실패해야 마땅하다. 하지만 실제로 다양한 분야에서 협동조합이 활동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협동조합을 호박벌에 비유하기도 한다. 2000년부터 근로빈곤층 자활사업이란 말죽은 밭에 빠져 근 20여년간 시민경제를 업으로 삼아온 강종우 센터장이 제주살림충전 소장이란 새로운 직함으로 '호박벌의 제주비상'을 월 2회로 늘려 가장 약한고리조차 날아오르는 경제, 불가능해 보이는 희망을 노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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