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밤은 지독하게 추웠다. 수은주가 영하 10도를 밑돌았다. 숨을 수리때마다 입김이 하얗게 올라왔지만 난방시설 이라고는 작은 난로 하나밖에 없었다. 우리는 난로 주위에 모여 앉아 조용히 날을 지샜다.
다음날 저녁 무렵 평소 가까이 지내던 ‘의사시보’의 기자 한 사람이 신문 한 장을 손에 들고 헐레벌떡 뛰어들어왔다.
“공화당 당무위원회에서 법안을 폐기하기로 결의한 사실이 없답니다! 그저 신중히 검토하기로 했을 뿐이랍니다! 국회보사위원장이 자기 입으로 직접 그랬어요!”
발행된 모든 일간지와 방송을 통해 사실을 확인한 뒤 농성을 풀었으나 시련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법제사법위원회에서 우리 법안을 거부했던 것이다. 법제사법위원회는 법안의 자구 수정을 맡고 있는 분과로 법안을 거부할 근거가 없다.
더구나 이 법안은 우리 모임의 법률 고문인 이봉재 변호사의 도움을 받아 작성했으므로 아무런 하자가 없었다. 그런데도 김봉환 법제사법위원장은 ‘의료법에 저촉되므로 의료법의 개정 없이는 이 법안을 제정할 수 없다’며 국회보사위원회로 되돌려 보냈다.
김봉환 법제사법위원장의 이와 같은 처사에 보건사회 위원들 역시 흥분을 금하지 못했다. 그들은 보건사회위원회를 허수아비 취급한다며 분개했다. 우리는 다시 국회에 진정서를 제출함과 동시에 고재호 대한변호사협회장에게 법률해석을 의뢰했다.
고재호 변호사는 ‘의료유사업자에 관한 법률제정이 의료법에 저촉되지 않으므로 이 법률을 제정하여도 지장이 없다’는 회답을 보내왔다. 이에 우리는 국회에 재차 진정서를 보냈고 박정희 대통령 앞으로도 탄원서를 띄었다.
다시 개최된 보건사회위원회에서우리 법안에 대한 심의가 진행되었다. 법제사법위원회의 거부에 대한 반감 것분인지 법안은 어렵지 않게 통과되었다. 국회행정직원들과 신문기자들은 ‘이제 고생은 끝났다’며 축하한다고 야단이었지만 우리는 쉽게 기뻐할 수가 없었다.
의사단체와 한의사 단체의 반대는 그야말로 대단했다.
매일 각종 성토대회가 잇달았고 가두데모와 동맹휴진을 일삼았다. 또한 이 법안이 국회에서 통과되면 모든 의사, 치과의사, 한의가사 정부에 면허증을 반납하겠다며 국회와 정부를 위협하고 나섰다.
한편 전국의 맹학교 학생들은 ‘의료유사법이 없어지면 우리는 살아갈 방도가 없어진다’며 이법안은 통과시켜줄 것을 요구했다. 맹학교의 학생들은 동맹휴학을 하고 단식 투쟁에 돌입했으며 국회의장에게 혈서를 보냈다.
일부는 국회 앞에서 시위를 벌였고 일부는 공화당사에서 농성을 벌였다. 앞을 못 보는 그들을 강제 해산하는 과정에서 유혈사태가 발생했음은 당연한 일이었는데, 그 광경이 얼마나 처절했는지 지나가던 시민들이 걸음을 멈추고 눈물을 흘릴 정도였다.
결국 정부는 가장 적극적이었던 서울맹학교에 무기한 휴교령을 내리고 학교장인 이종덕 선생을 해임했다. 우리나라 시각장애인의 구심점이었던 이종덕 교장은 그 후 가난 속에서 허덕이다 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새태가 눈덩이처럼 불어나면서 전국이 ‘의료유사업자에 대한 법률안’ 으로 들썩거리자 1966년 7월 동양방송에서 3자 좌담회를 제의했다. 국회측 대표로는 신관우 의원, 반대측 대표로는 이중설 대한의학협회 부의장, 찬성측 대표로는 전태환 맹인복지위원장이 참석했다.
좌담회는 우리 측의 승리로 끝났다. 시청자의 이목을 의식해서 인지 이중설 의협 부의장은 ‘의료유사업’ 이라는 자구만 없애면 반대할 의사가 없다고 했고 신관우 의원도 그정도는 할 수 있는 일이라며 순순히 수용했다. 전태환 맹인복지위원장 역시 내용만 그대로라면 표현에는 구애받지 않겠다며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1966년 12월 ‘의료유사업자에 관한 법률안’은 내용은 변하지 않고 ‘접골사·침사·구사·안마사에 관한 법률안’으로 이름만 바꾼 채 다시 상정하기에 이르렀고 보건사회위원회를 가볍게 통과했다.
법안이 보사위원회를 통과하자마자 대한 의학협회와 대한한의사협회가 약속을 깼다. ‘의료유사업’이라는 자구만 수정하면 반대할 의사가 없다고 한 두 단체는 TV방송을 통해 국민 앞에서 한 약속을 어기고 ‘접골사·침사·구사·안마사에 관한 법률안’폐기에 관한 천원서를 국회에 제출했다.
특히 의협은 산하 각 시도 의사회 앞으로 협조 공문을 발송하여 각 지역구 출신 의원들을 최대한 설득하고 포섭할 것을 세밀히 지시했다.
이 작전은 대단히 효과가 있었다. 국회 운영위원회는 법제사법위원회도 통과한 우리의 법안을 만 2개월이 넘도록 본회의의 안건으로 상정하지 않았다. 그때가 1967년 3월이었고 국회의 임기 만료 시점이 6월이었으니 자칫하면 임기 만료로 자동폐기될 위험에 처한 것이었다.
흡사 미치광이처럼 동원할 수 있는 수단은 모두 동원했고 부탁할 수 있는 국회의원에게는 모두 로비를 하러 다녔다. 그러나 국회의 임기가 만료되는 시점까지 ‘접골사·침사·구사·안마사에 관한 법률안’은 본회의의 안건으로 상정되지 못했다.
제 6대 국회는 문을 닫았고 우리의 법안은 자동 폐기 되었다. 온 몸에서 피가 다 빠져나간 것 같은 고통과 허탈함만 남긴 채 기나긴 긴장의 날들로 끝이 났다.
#침구인 집단혈서사건-제 7~8대 국회
소위 ‘돈도 없고 빽도 없는’ 시절에는 국회의원 만나기가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 만큼이나 어려웠다. 날도 채 밝지 않은 새벽에 집을 나서서 하루 종일 기다려도 국회의원 얼굴 한 번도 못 보고 돌아서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오전 6시에 못 미치는 이른 시각인데도 국회의원의 자택에는 늘 사람들이 북적거렸고 손님들이 벗어놓은 신발이 넘쳐 마당 중간까지 어지럽게 늘어져 있는 것을 보면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오곤 했다.
그나마 보사분과위원회 소속의 국회의원을 만나는 일은 쉬운 축에 속했다. 시쳇말로 ‘돈 안생기는 분과라 끗발 없는 의원들만 모여 있었기’ 때문이다.
60~70년대 내 환자 가운덴는 군 장성이 많았고 국회의원 중에는 군인 출신이 적지 않았지만 군인 출신 의원이 보사분과위원회에 소속되는 일은 거의 없었다. 당시 보사분과위원회에 위원들의 대부분은 침사법을 극렬하게 반대하는 의사 출신 국회의원이었다.
북적대는 사람들 틈을 비집고 들어가 옹색하게 자리잡고 앉아 차례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으면 오만 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오늘은 만날 수 있으려나‥’, ‘우리 얘기를 끝까지 들어주기만 해도 절반은 성공한 건데…’
국회의원을 만나기 전 수심이 많아지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적지 않은 수의 의원들이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보지도 않고 바쁘다며 우리를 내쳤고 꽤 많은 수의 국회의원들은 노골적으로 사례비를 요구했다. 더 이상 새로울 것도 없고 더 이상 흥분할 기운도 없을 만큼 흔한 일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