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8년 11월 몇 번의 어려움 끝에 윤인식 의원을 제안의원으로 하여 ‘침구·구사·안마사에 관한 법률안’을 제안할 수 있었다.
윤인식 의원은 뜨겁지도 그렇다고 차갑지도 않게 일을 처리했다. 처음 제안의원이 되어줄 것을 승낙할 때부터 윤의원은 ‘의사와 한의사의 반대가 극심해 어려울 것’이라는 단서를 달았고, 청원을 하기 위해 국회의원 20인 이상의 서명을 받아야 할 때도 본인 이외에 19명의 서명만을 받는 등 평균 이상의 노력이나 애정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관심을 보인 사람은 오원선 국회의원이었다. 의사 출신으로 보건사회부장관을 역임한 적이 있는 오원선 의원은 국회 보사분과위원회의 회의에서 ‘침사와 구사를 구별할 것이 아니라 침사로 일원화하여 뜸을 침사의 업무 영역으로 통폐합하고 2년제 초급대학 정도의 침사 양성기관을 만들어 양질의 침사를 양성할 것’을 주장했다.
오의원이 이와 같은 주장에 당시 보건사회부장관이었던 김태동씨 역시 공식적으로 찬성의 뜻을 표했다. 오원선 의원의 지적이 합당하다고 판단한 우리는 이 조항을 삽입한 개정 법안을 만들어 다시 제출했고 법안은 소위원회에서 무사히 통과되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한상준 보사분과위원장은 그 법안을 보건사회위원회의 안건으로 상정하지 않았다.
‘이번에도 보류로 시간을 끌 작정인가?’
이에 우리는 침사법 제정을 지지하는 10만 국민의 서명이 담긴 연판장을 국회의장에게 제출하며 침사법안의 안건 상정을 촉구했고 백남억 공화당 정책의장에게는 진정서를 띄웠다.
그러나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다시 몇 달 뒤 박정희 대통령 앞으로 30만 국민의 서명과 함께 침사법 제정을 탄원하는 진정서를 제출했다. 역시 아무런 답변이 없었다.
“입이 바짝바짝 마르는데 쓰다 달다 한 마디 대답이 없으니….”
“어쩌면 우리가 보낸 문서가 국회의장이나 대통령 손에 들어가지 않았을 지도 모르지요.”
이와 같은 상황은 이미 예견된 것이었고 지난 제6대 국회 때에도 수없이 겪은 일이었다. 우편으로 보낸 해명서나 진정서 따위가 국회의원의 손으로 넘어가 보지도 못한 채 사무실 한편에서 먼지를 뽀얗게 뒤집어쓰고 있는 것은 예사였고 휴지통에 쑤셔 박혀 있는 장면도 수없이 목격해야 했다.
더 한심한 것은 국회의원들의 반응이었다. 목청을 돋구어 떠들어 보았자 헛수고인 적이 많았다. 사례를 들어가며 한참 설명하다 보면 내 말을 듣고 있었는지 딴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헷갈렸다.
다음에 만나서 다시 대화를 이어가려고 할 때면 처음 듣는 사람마냥 능청스러우면서도 어이 없는 질문을 해서 기막힌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에 우리는 혈서를 쓰기로 결의했다. 혈서를 쓰자는 제안이 순식간에 통과될 만큼 우리는 절박한 심정이었다. 4년 내내 공들여 쌓은 탑이 편법으로 인해 한순간에 무너졌던 제6대 국회의 경험과, 이번에도 뜻을 이루지 못하면 다시는 시도할 수 없을 것 같은 위기감이 절박한 심정을 더욱 부추겼다.
그때 무엇보다도 우리를 초조하게 만들었던 것은 자금에 대한 압박이었다. 시간을 끌면 끌수록 비용이 많이 들어갈 테고, 그렇게 되면 싸움에서 이길 확률이 적어질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의사와 한의사 단체는 막대한 자금력을 가지고 있는 반면 침구인들은 그렇지 못했다.
예나 지금이나 약은 값을 치르는 것이 당연하지만 침은 공짜로만 맞으려고 들었으니 침구사들이 가난한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게다가 면허를 갖고 있는 나와 성정영씨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관인 침구학원을 졸업했을 뿐 면허가 없었고 면허가 없었기에 침구 시술을 할 수가 없었다. 한마디로 돈을 버는 사람이 전혀 없었다.
당시 관인 침구학원동창회장인 이관우씨는 제 6대 국회의 입법활동에 쓰느라 사재를 모두 탕진한 상태였다. 나 역시 국회와 당사를 들락거리느라 침술원의 간판을 내린 상황이었기에 고정적인 수입이 없었다. 아내에게는 쥐꼬리만한 생활비와 아이들 공납금만 겨우 내주고 왕진 가서 받은 돈의 대부분을 내놓았는데도 활동자금은 언제나 부족했다.
법안을 만들고 모여서 대책을 논의할 장소가 반드시 필요했지만 사무실을 얻을 비용도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명동에서 사업을 하고 있는 지인에게 간청하여 그의 사무실 한쪽을 무료로 빌려 썼다.
점심 끼니는 거의 항상 사무실 바로 앞에 있던 명동칼국수에 갔고 거기에서도 제일싼 칼국수만 시켜 먹었다. 점심값 한푼이 아쉬운 시절이었다.
아끼고 또 아꼈는데도 계속 자금이 부족하자 나는 전 재산인 17평 오작짜리 낡은 한옥을 담보로 은행에서 돈을 빌리기로 마음을 먹었다. 다행히 아내는 내 뜻을 선선히 따라주었다.
“아니 대체 이게 뭐요?”
백남억 공화당 정책의장이 흠칫 뒤로 물러앉으며 물었다. 백남억 정책의장은 인상을 잔뜩 찡그린 채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피비린내가 확 풍기는 헝겊 꾸러미였다.
“저희 침구인들의 의지입니다”
감겨 있던 흰 광목 천을 풀자 ‘침사법이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문구와 혈서를 쓴 사람들의 이름이 줄줄이 드러났다. 피로 쓴 이름들은 아직 붉은 색 그대로였다.
“관인 침구학원 졸업생 93명이 쓴 혈서입니다.”
놀란 기색이 역력한 백 의장은 나와 이관우씨의 얼굴을 한참동안 쳐다보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뜻은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의사들의 반대가 거세서 저 혼자로는 역부족입니다”
늘 들어온 말이었지만 그날 따라 가슴 속에서 뜨거운 불덩이가 확 치밀어 올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