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천 년 침뜸, 현대의학에 밀리지 않는 보물

유신 시절, 침구사법 부활을 위해 애쓰던 국회의원도 하루 저녁이면 태도가 달라졌다. 그들이 그날 저녁에 다녀온 곳은 무소불위(無所不爲)의 힘이 지배하는 곳이었다. ‘앞으로 시끄러운 일을 만들지 마라’는 협박이었다. 정부가 그런 곳이었다….

“아니,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국민의 국회의원이지 의사의 국회의원입니까?”
“…”
“아시지 않습니까? 다른 건 몰라도 교육하고 의료는 차별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걸 말입니다. 침과 뜸은 바로 그런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값싸고 효과 좋은 치료법입니다.”

제 손가락을 베는 결의를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공화당과 국회는 별다른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그들이 보여준 관심은 국회보건사회위원회 소위원회에 상정된 침사법 반대 청원 2건을 폐기하고 우리 법안의 통과를 재확인해준 것이 고작이었다.

제7대 국회임기 만료를 앞두고 마지막 보사분과위원회 심의회가 개최되었다. 보사분과위원회가 침사법안에 대해 내린 결론은 다음과 같았다.

‘침사법은 국민의 생명과 여러 집단의 이해관계가 얽힌 복잡한 문제인 만큼 시간이 많이 필요한 안건이다. 그러므로 시일이 얼마 남지 않은 이번 국회에서 다루기에는 역부족인 감이 적지 않다. 이에 다음 제8대 국회에서 심도 깊게 논의 하여 결론을 이끌어낼 것을 권한다. ’

제발 빨리 심의해달라고 온갖 관계 요로에 진정서와 탄원서를 보내고 피비린내 풍기는 혈서를 내밀어도 못 들은 척하고 이유도 근거도 없이 법안의 심사를 미루더니 이제와 시간이 없음을 문제삼는 것은 구차한 핑계에 불과했다.

특히 토론시간의 부족 운운하는 처사는 법안을 폐기하기 위한 초라한 구실일 뿐이었다.

더 화가 나는 것은 제안의원인 윤인식 의원의 태도였다. 윤 의원은 심의회 내내 반대 의견 한 번 제대로 펼치지 않았다. 윤 의원의 불성실함과 보건사회위원들의 얄팍한 술수에 흥분한 나는 회의가 끝나자마자 방청석에서 뛰어나와 소리를 쳤다.

“제안의원이면 제안의원답게 무슨 말을 해야 할 것 아니요? 그러고 당신들! 자기가 한 말에 책임도 못 지고, 민생에는 털끝만한 관심도 없고, 오로지 제 안위만 생각하는 당신들! 그러고서도 당신들이 국회의원이요?”

채 몇 마디 내뱉지도 않았는데 곧바로 제재 조치가 가해졌다. 한마디만 더하면 경호권을 발동한다는 것이었다.

“경호권 발동한다고 내가 무서워할 줄 아시오?”
울분을 억누르지 못하고 성토하던 나는 결국 만류하는 동료들에게 등이 떠밀려 국회를 나올 수 밖에 없었다.

1971년 제8대 국회가 개원하자 서둘러 청원서를 냈다. 지난 두 차례의 청원에서 기간을 문제삼았던 기억이 새로웠기 때문이다. 허나 모두 부질없는 짓이었다. 우리의 법안은 1년이 넘도록 계류상태로 묶여 있었다.

1972년 10월 비상계엄령이 선포되고 유신체제가 시작되었다. 이에 따라 국회는 강제 해산되었고 동시에 우리가 제출한 청원은 자동 폐기되었음은 물론이다.

#다음 회의에서 검토하겠습니다 -10월 유신~제 9대 국회

1972년 10월 유신으로 계엄령이 선포되고 난 뒤 한동안 나는 계엄사령부에서 살다시피 했다. 앞장에서도 언급했지만 박정희 전 대통령은 ‘아프다’는 말을 매우 싫어했고 침과 뜸을 미개인이나 하는 일로 여겼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권력의 핵심에 가까운 사람일수록 숨어서 침을 맞지 않은 이가 거의 없었고, ‘친하니까 가르쳐주는 건데’하면서 나를 소개하고 소개받은 사이였지만 쉬쉬하는 형편이었다.

계엄사령부의 사정은 더욱 심했다. 내가 계엄사령부에 들어가면 장성들이 돌아가며 침을 놀아달라고 했으나 표면상 나는 ‘용건이 대외비(對外秘)에 속하는’ 방문객이었다. 계엄사령부를 오가는 동안 나는 심중이 아주 복잡했다.

개인의 권력욕 때문에 국민모두가 ‘나 죽었소’하는 심정으로 사는 현실은 나 역시 울분이 차는 일이었기에 부르면 언제든 달려가야 하는 일이 달갑지만은 않았다. 거기에 침과 뜸의 맥을 끊고 국민의 건강에는 관심조차 없는 정권에 대한 반감도 높았다.

하는 수 없이 머릿속이 복잡할 때마다 ‘의원은 환자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 가야 한다’고 했던 아버지의 말씀을 떠올리며 마음을 다잡았다.

‘에휴! 적군이라도 치료해야 하는 게 의원이 할 일인데….’

명백한 공권력 남용이고 월권행위였지만 계엄법을 이용하면 어떤 법이든 쉽게 만들 수 있는 시절이었다. 물론 어수선한 시절과 이른바 헌법 위의 법인 계엄법을 이용해 침사법을 제정한다는 것이 그렇게 신나는 일은 아니었다.

허나, 나 혼자 잘 먹고 잘 살겠다는 법도 아니고 다른 사람의 밥 그릇을 빼앗는 일도 아니며 싼값에 치료받게 해 의료에서만큼은 빈부격차를 느끼지 못하게 하는 제도를 만들자는 것이라며 복잡한 심사를 애써 눌렀다

그리고 사실 절박한 심정만큼이나 오기도 있었다. 결자해지(結者解之), 침구사 제도를 없앤 이의 손으로 다시 침구사 제도를 만들게 하고 싶었다. <계속>

저작권자 © 제주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AI학습 및 활용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