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계엄사령부의 핵심 인사들을 치료하며 침구사법 제정 확답을 받아낼 기회를 호시 탐탐 노렸다. 계엄사령부의 주요인사 가운데 내 손 안 닿은 이가 없었지만 그 중에서도 부사령관이었던 이민우 장군과 휠씬 이전부터 막역한 사이였다.
계엄이 선포되기 전, 전방에 있는 모 부대의 군단장이었던 이민우 장군은 정말 하루가 멀다하고 나를 불렀다. 하루는 이 장군의 관사에서 자고 하룻밤은 우리 집에서 자는 생활을 하며 수개월 동안 치료했다.
하루걸러 한 번씩 들렀는데도 어쩌다 급한 마음이 들면 이 장군은 우리 동네 동사무소로 전화해서 나를 찾았고 그때마다 동사무소 직원이 우리집으로 뛰어왔다. 전화 놓기가 하늘에 별따기였던 시절이라 전화 있는 집이 아주 드물었고 우리 집에도 전화가 없었기 때문이다.
계엄사령부의 부사령관이었던 이민우 장군은 매일 오후 3시면 박정희 대통령에게 정기 보고를 했다. 대통령 정기보고는 극비 중의 극비에 속하는 사항이었지만 매일 같이 계엄사령부 사령관실이나 부사령관실에 출근하던 내가 이를 모를 리 없었다.
나는 이민우 장군에게 대통령 정기보고를 이용해 침사법을 제안해달라고 부탁했다. 이 장군도 ‘그렇게 하마’고 승낙했지만 막상 박 대통령 앞에만 가면 말을 꺼내지 못했다. 군인답지 않게 유순하던 이 장군은 호라이 같은 박 대통령이 조금이라도 싫어할 것 같은 행동은 하질 못했다.
내가 부탁하면 ‘이번에는 얘기하마’고 대답했지만 결국 말을 꺼내지 못하는 과정이 반복되었고 그 사이 국정은 일상적인 체계로 돌아갔다.
내가 비공식적인 길을 통해서 애쓰는 동안 나머지 침구인들은 공식적 방법을 이용해 백방으로 노력했다. 1972년 11월 박정희 대통령과 김종필 국무총리, 노재현 비상계엄사령관 앞으로 진정서를 보냈고 다시 한 달 뒤에는 비상국무회의 의장에게 호소문을 띄웠다.
‘(전략)…우리는 지난 10년동안 한국 고유의 민족의학인 침구술을 제도화해줄 것을 내용으로 수많은 청원과 진정과 호소를 해 왔고 뜻있는 국회의원들에 의하여 4회에 걸쳐 법안을 국회에 제안해 왔습니다.
전술한 법안 등에 대하여 제6대 국회에서 14회, 제 7대 국회에서 2회 도합 16회의 심의(해당 상임위원회에서)를 했고 제 8대 국회에서는 회기 초에 홍승만 의원을 소개의원으로 한 본회에 청원서가 제출되어 있으나 이것이 만 1년이 지나도록 국회에 계류 중에 있습니다.
전술한 바와 같이 불과 12조 부칙으로 된 동 법안을 10년동안 16회나 심의했다면서 이것이 통과도 아니고 폐기도 아닌 심의 보류에 의한 자동폐기란 변칙 처리를 거듭하면서 허송세월을 해 왔다는 사실은 국회의 무기능과 비능률적인 처사를 비판하기에 앞서 국민을 우롱해 왔다고 해야 마땅할 것입니다…(후략)
관계 기관은 이번에는 침구사 양성제도에 대해 계속 트집을 잡았다. 제 7대 국회 때에는 과거 관인 침구학원 수준이 아니라 제대로 된 양성기관을 수료한 인재여야 한다고 주장했고, 그래서 교육연한과 수준을 2년제 초급대학 정도로 잡아 침사법안을 제출했다. 이는 의사출신이며 보건사회부 장관을 역임했던 오원선 국회의원의 주장으로 삽입된 조항이었다. 또한 당시 보건사회부 장관이었던 김태동 장관도 회의석상에서 공식적으로 찬성을 표한 바 있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김태동 장관의 후임인 이경호 보건사회부 장관은 ‘2년제 초급대학 정도로는 양질의 침사를 양성할 수 없다’는 답변을 보냈다. 사실 이러한 문제는 법안의 심의과정에서 2년제로 할 수 도 있고 4년제로 할 수도 있는 사항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당 부처나 해당 심의위원회는 이 조항을 침사의 자격을 결정하는 중요한 조항인 양 취급했고 이를 빌미 삼아 법안을 본회의에서 심의하지 않고 폐기했다.
1973년 3월. 10월 유신으로 해산되었던 국회가 다시 열렸다.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길었던 6년 임기를 채운 제9대 국회에 제안한 청원은 ‘의료유사업자에 대한 법률안 제정’이었다. 문제를 삼았던 침사의 교육연한을 수정해 ‘4년제 대학과정의 양성기관을 마치고 국가시험에 합격한자에 한해 침사의 면허를 받을 수 있도록’했다.
제9대 국회의 침사법안 제정활동은 시원하다 할 만큼 아주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제안의원인 강기천 의원이 매우 열정적으로 활동했고 우리 침구인들도 일치단결하여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그 결과 청원 전 서명을 받은 국회의원만 65명에 달했고 국회의원 20인 이상의 천성 서명을 받아야 하는 제안 발의에서는 52명의 서명을 받았다. 제안의원인 강기천 의원을 포함해 공화당 의원 12명의 찬성을 받아내었고 신민당과 유정회 의원, 각각 11명 및 18명이었던 무소속 의원 전원의 서명을 받았다.
이 안에는 공화당, 신민당, 유정회, 무소속(당시에는 무소속도 하나의 정당이었음) 4개 당의 원내총무가 모두 포함되어 있었으며 국회 사무총장인 길전식 의원도 들어 있었다. 또한 이 법안의 제안의원 명단에는 보사분과위원회 위원 11명의 이름도 들어 있었다.
그때 보사분과위원이 모두15명이었으니 통과된 것이나 진배 없었다.
그러나 김봉환 국회 보사분과위원장은 통과된 법안을 본회의로 부의하지 않고 시간을 끌었고 법안을 심사할 때마다 ‘나머지 안건은 다음 회의 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라는 한마디로 침사법안을 서류더미 속에 쑤셔박았다.
국회의원의 임기가 만료되는 시점까진 법안의 심사를 미루어 종국에는 폐기시키려는 속셈이었다.
다수 국회의원들의 지지를 얻은 법안이 심의조차 되지 못한 채 시간만 흐르자 이전은 악몽이 되살아났다. 성공을 목전에 두고 국회의원 임기가 만료되어 수포로 돌아갔던 과거를 이번에도 반복할 수는 없었다. <계속>나는 계엄사령부의 핵심 인사들을 치료하며 침구사법 제정 확답을 받아낼 기회를 호시 탐탐 노렸다. 계엄사령부의 주요인사 가운데 내 손 안 닿은 이가 없었지만 그 중에서도 부사령관이었던 이민우 장군과 휠씬 이전부터 막역한 사이였다.
계엄이 선포되기 전, 전방에 있는 모 부대의 군단장이었던 이민우 장군은 정말 하루가 멀다하고 나를 불렀다. 하루는 이 장군의 관사에서 자고 하룻밤은 우리 집에서 자는 생활을 하며 수개월 동안 치료했다.
하루걸러 한 번씩 들렀는데도 어쩌다 급한 마음이 들면 이 장군은 우리 동네 동사무소로 전화해서 나를 찾았고 그때마다 동사무소 직원이 우리집으로 뛰어왔다. 전화 놓기가 하늘에 별따기였던 시절이라 전화 있는 집이 아주 드물었고 우리 집에도 전화가 없었기 때문이다.
계엄사령부의 부사령관이었던 이민우 장군은 매일 오후 3시면 박정희 대통령에게 정기 보고를 했다. 대통령 정기보고는 극비 중의 극비에 속하는 사항이었지만 매일 같이 계엄사령부 사령관실이나 부사령관실에 출근하던 내가 이를 모를 리 없었다.
나는 이민우 장군에게 대통령 정기보고를 이용해 침사법을 제안해달라고 부탁했다. 이 장군도 ‘그렇게 하마’고 승낙했지만 막상 박 대통령 앞에만 가면 말을 꺼내지 못했다. 군인답지 않게 유순하던 이 장군은 호라이 같은 박 대통령이 조금이라도 싫어할 것 같은 행동은 하질 못했다.
내가 부탁하면 ‘이번에는 얘기하마’고 대답했지만 결국 말을 꺼내지 못하는 과정이 반복되었고 그 사이 국정은 일상적인 체계로 돌아갔다.
내가 비공식적인 길을 통해서 애쓰는 동안 나머지 침구인들은 공식적 방법을 이용해 백방으로 노력했다. 1972년 11월 박정희 대통령과 김종필 국무총리, 노재현 비상계엄사령관 앞으로 진정서를 보냈고 다시 한 달 뒤에는 비상국무회의 의장에게 호소문을 띄웠다.
‘(전략)…우리는 지난 10년동안 한국 고유의 민족의학인 침구술을 제도화해줄 것을 내용으로 수많은 청원과 진정과 호소를 해 왔고 뜻있는 국회의원들에 의하여 4회에 걸쳐 법안을 국회에 제안해 왔습니다.
전술한 법안 등에 대하여 제6대 국회에서 14회, 제 7대 국회에서 2회 도합 16회의 심의(해당 상임위원회에서)를 했고 제 8대 국회에서는 회기 초에 홍승만 의원을 소개의원으로 한 본회에 청원서가 제출되어 있으나 이것이 만 1년이 지나도록 국회에 계류 중에 있습니다.
전술한 바와 같이 불과 12조 부칙으로 된 동 법안을 10년동안 16회나 심의했다면서 이것이 통과도 아니고 폐기도 아닌 심의 보류에 의한 자동폐기란 변칙 처리를 거듭하면서 허송세월을 해 왔다는 사실은 국회의 무기능과 비능률적인 처사를 비판하기에 앞서 국민을 우롱해 왔다고 해야 마땅할 것입니다…(후략)
관계 기관은 이번에는 침구사 양성제도에 대해 계속 트집을 잡았다. 제 7대 국회 때에는 과거 관인 침구학원 수준이 아니라 제대로 된 양성기관을 수료한 인재여야 한다고 주장했고, 그래서 교육연한과 수준을 2년제 초급대학 정도로 잡아 침사법안을 제출했다. 이는 의사출신이며 보건사회부 장관을 역임했던 오원선 국회의원의 주장으로 삽입된 조항이었다. 또한 당시 보건사회부 장관이었던 김태동 장관도 회의석상에서 공식적으로 찬성을 표한 바 있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김태동 장관의 후임인 이경호 보건사회부 장관은 ‘2년제 초급대학 정도로는 양질의 침사를 양성할 수 없다’는 답변을 보냈다. 사실 이러한 문제는 법안의 심의과정에서 2년제로 할 수 도 있고 4년제로 할 수도 있는 사항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당 부처나 해당 심의위원회는 이 조항을 침사의 자격을 결정하는 중요한 조항인 양 취급했고 이를 빌미 삼아 법안을 본회의에서 심의하지 않고 폐기했다.
1973년 3월. 10월 유신으로 해산되었던 국회가 다시 열렸다.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길었던 6년 임기를 채운 제9대 국회에 제안한 청원은 ‘의료유사업자에 대한 법률안 제정’이었다. 문제를 삼았던 침사의 교육연한을 수정해 ‘4년제 대학과정의 양성기관을 마치고 국가시험에 합격한자에 한해 침사의 면허를 받을 수 있도록’했다.
제9대 국회의 침사법안 제정활동은 시원하다 할 만큼 아주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제안의원인 강기천 의원이 매우 열정적으로 활동했고 우리 침구인들도 일치단결하여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그 결과 청원 전 서명을 받은 국회의원만 65명에 달했고 국회의원 20인 이상의 천성 서명을 받아야 하는 제안 발의에서는 52명의 서명을 받았다. 제안의원인 강기천 의원을 포함해 공화당 의원 12명의 찬성을 받아내었고 신민당과 유정회 의원, 각각 11명 및 18명이었던 무소속 의원 전원의 서명을 받았다.
이 안에는 공화당, 신민당, 유정회, 무소속(당시에는 무소속도 하나의 정당이었음) 4개 당의 원내총무가 모두 포함되어 있었으며 국회 사무총장인 길전식 의원도 들어 있었다. 또한 이 법안의 제안의원 명단에는 보사분과위원회 위원 11명의 이름도 들어 있었다.
그때 보사분과위원이 모두15명이었으니 통과된 것이나 진배 없었다.
그러나 김봉환 국회 보사분과위원장은 통과된 법안을 본회의로 부의하지 않고 시간을 끌었고 법안을 심사할 때마다 ‘나머지 안건은 다음 회의 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라는 한마디로 침사법안을 서류더미 속에 쑤셔박았다.
국회의원의 임기가 만료되는 시점까진 법안의 심사를 미루어 종국에는 폐기시키려는 속셈이었다.
다수 국회의원들의 지지를 얻은 법안이 심의조차 되지 못한 채 시간만 흐르자 이전은 악몽이 되살아났다. 성공을 목전에 두고 국회의원 임기가 만료되어 수포로 돌아갔던 과거를 이번에도 반복할 수는 없었다.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