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에 침구인들은 데모에 들어갔다. 을지로 6가 파출소 앞에 있는 건물 5층의 교회를 빌렸다. 시위대에 대한 경찰의 진압이 강경했기 때문에 회장과 임원들이 끌려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청계천 철물점에서 쇠사슬과 연결하고 자물쇠를 채워 기둥에 묶었다. 경찰이 진압해 들어오더라도 움직이지 않기 위해서였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어느 날 갑자기 강기천 의원이 ‘더이상은 도움이 되지 못할 것 같다’는 뜻을 밝혔다. 강 의원은 아무 설명도 하지 않고 그저 보사분과위원회에서 건설분과위원회로 옮기게 되었다고만 말했다. 그동안 제안의원으로 동분서주 열심히 활동하던 이가 별안간 위원회를 바꾸게 되었다는 말을 꺼내자 침구인들은 배신감에 휩싸였다.

“이유가 뭡니까?”
“그야 알 수 없지요.”
“알 수가 없긴! 뻔하지요. 지금까지 침사법 통과를 반대하고 저지하려 했던 두 단체가 로비한 것이겠지요”
“물증도 없는데 그런 말 함부로 하다가는 경을 칩니다”
“경을 치라고 하세요 하도 원통하고 분통해서 이젠 무서운 것도 없습니다.”

세월이 한참 지나 들은 바에 의하면 강기천 의원은 금권 로비에 포섭된 것이 아니었다. 침사법을 제 일처럼 여겼던 강 의원은 그의 행동을 수상하게 여긴 정부기관에 의해 정보부에 끌려갔다 왔다고 했다.

강 의원은 ‘앞으로 시끄러운 일을 만들지 말 것’을 억지로 다짐한 다음에야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고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건설분과위원회로 적을 옮기게 되었다.

사공을 잃은 배는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었고 손에 잡힐 것 같던 침사법안의 통과는 무위로 돌아갔다. 미약하나마 조직력을 보유하고 있던 침구인들의 조직은 눈에 띄게 약해졌고 활발하던 법률 제정운동도 침체기에 들어갔다.

#제척기간을 아시나요 -헌법소원

1988년 9월 헌법재판소가 생겼다. 헌법재판소 임시 청사가 을지로 6가에 자리잡으면서 당시 을지로에 있던 나의 침술원에는 그 곳 직원들이 발길이 늘었다. 헌법재판소 직원들과 가까워지자 나는 그동안 벌여왔던 의료법 개정 노력에 대한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그래서 이번에는 헌법소원을 내볼 작정입니다.”
헌법소원이란 공권력이 법률에 규정된 대로 이행하지 못하여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하는 경우에 국민이 자신의 기본권을 구제해줄 것을 헌법재판소에 청구하는 제도를 가리킨다. 헌법소원이 이유 있는 것으로 판정 나면 헌법재판소는 기본권을 침해하는 공권력의 작용을 금지하거나 위헌 확인함으로써 국민의 기본권을 구제해준다.

“승산이 있을까요?”

당시 헌법재판소 재판관 중 한분이었던 김양균 재판관 에게 물었다. 김 재판관은 재판장을 포함한 9명의 헌법재판관 가운데 침구사 제도에 가장 호의적인 태도와 관심을 보였던 분이다.

“법적 근거는 충분합니다. 의료법에 따르면 한의사의 침술 행위가 침구사의 영업권을 침해하고 있으니까요.”

서둘러 작업에 들어갔다. 이번에는 침구사들이 중심이 되어 일을 진행하기로 했다. 이전까지 의료법 개정활동에 앞장섰던 관인 침구학원 동창회의 회원들은 장기간 계속된 생활고로 기반이 송두리째 흔들렸고 동창회장이었던 이우관 씨마저 세상을 떠나 구심점을 잃은 상태였다.

반면 국가가 부여한 면허를 소지하고 있는 침구사들의 단체인 대한침구사협회는 과거에 비해 활동이 퍽 자유로워졌다. 꽤 오랫동안 침구사들은 공권력에 꽉 묶여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활동에 많은 제약을 받았다.

사단법인 대한침구사협회에는 보건복지부에서 보낸 공게 절대 침구술을 가르쳐서는 안된다. ‘임의단체(관인 침구학원 동창회를 말함)와 접촉하는 행위는 종전의 기득권을 유지하게 해준 취지에 어긋난다’는 식의 협박 아닌 협박이었다. 일선 경찰서 형사와 관할 지역 공무원도 잊을 만하면 들러서 ‘별 일 없는지’ 살피곤 했다.

의료법 개정에 관심이 적거나 소극적인 침구사를 설득하는 작업은 예상했던 것보다 대단히 어려웠다. ‘국가를 상대로 송사해서 이겼다는 소리는 들은 적 없다.’ ‘무섭다’ ‘이것저것 다 귀찮다’는 등 핑계며 변명도 가지각색이었다. 답답한 생각이 들고 다리에서 힘이 쭉 빠질 때도 있었지만 원망하지는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대부분의 침구사들에게는 이런 작업이 낯선 일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새로운 국회가 출범할 때마다 관인 침구학원 동창회가 법안을 제출하고 싸우는동안 정식 침구사로서 시종일관 동창회를 도왔던 이는 나 하나뿐이었다.

그러니 내가 툴렀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더구나 이미 합법적으로 침구 시술행위를 하고 있는 사람들이었으니 법이 생기든 그렇지 않든 간에 달라지는 것이 없었고, 시간이 오래 지나고 노쇠하니 힘든 싸움은 피하고 싶은 마음이 컸을 터였다.

법을  개정하는 일이건 헌법소원을 내는 일이건 어떤 방법이건 간에 공권력에 맞서는 일은 많은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게다가 국회의원이나 법조인의 대다수가 침구사 제도에 대해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그들을 설득하고 동의를 이끌어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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