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 동안 겪었던 일들이 마치 어제 일인 양 느껴지며 뭐라 말할 수 없는 감회가 밀려왔다. 침뜸의 맥을 살리려 뛰어다닌 세월과 침통하나 들고 전국 방방곡곡 무료 의료봉사를 다녔던 시간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그래! 이것이 내 마지막 사업이구나! 나의 마지막 도전은 침과 뜸을 알리고 발전시킬 인재를 양성하는 일이로구나!”
새로운 사실을 알아내는 것도 늘 나의 몫이었다. 그는 단 한 번도 의뢰인인 내게 상황의 추이를 전달한 적이 없었다. 오히려 내가 헌법재판소 사람들을 통해 새로운 사실을 발견해 변호사에게 알려 주는 형국이었다.
헌법소우너을 제출하고 만 2년이 지나자 나는 답답하고 애가 달았다. 헌법재판소 직원들이며 재판관들이 내 침술원에 들를 때마다 ‘본안에만 들어가면…’이라고 말한 것도 희망을 버리지 못하게 했다. 생각 끝에 새로운 변호사를 추가로 선임했는데 결국 아무 소용이 없었다. 두 사람 모두 제척기간에 대한 확답은커녕 재판 날짜를 앞당기거나 미리 알려주는 일조차 하지 못했다.
기약없는 기다림은 사람을 극도로 지치게 만들었다. 안될 것 같으면 빨리 포기하고 다른 방법을 모색해야 하는데 재판의 기부마저 빨리 답을 주지 않으니 미칠 지경이었다. 길게 끌면 끌수록 비용은 계속 들어갔고 사람들은 지쳐갔다.
한편으로는 신속히 처리해 달라고 진정서를 내고 다른 한편으로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추가 자료를 제출하는 사이 3년이 흘렀다.
1993년 11월 드디어 헌법재판소에서 화답이 왔다.
‘이 사건은 헌법소원에 의하여 다룰 수 있는 입법부작위(헌법에 명시된 국민의 기본권 보장을 위해 입법을 위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법률을 제정하지 않거나 불충분하게 제정하는 것)에 ㅎ당하지 아니하고 헌법재판소 개소일인 1988년 9월 19일로부터 60일이 경과한 후인 1990년 12월 7일에야 청구된 것이므로 부적하바다…(중략)…따라서 청구인들의 이 사건 심판 청구는 부적합하므로 이를 각하하기로 결정한다’
헌법재판소법 제 69조 제 1항에 의하면 헌법소원의 심판은 그 사유가 있음을 안 날로부터 60일 이내나 그 사유가 있은 날로부터 180일 이내에 청구해야 한다. 헌법재판소가 생기기 훨씬이전의 사건에 대해 헌법소원 심판을 청구 하려 하는 사람은 헌법재판소가 재판부를 구성한 1988년 9월 19일부터 계산해 6개월 안에 심판을 청구해야 한다.
따라서 1990년 12월 7일에 제출한 이 사건은 청구기간이 초과된 뒤에 청구된 것이 명백한 만큼 법에 정해진 규정을 따르지 않고 있어 재판이 성립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한마디로 제척기간 경과로 심판할 수 없다는 답변이었다.
순식간에 3년의 세월이 물거품이 되고 말았고 나는 할말을 잃었다. 한동안은 헌법소원에 대한 이야기를 입에도 담지 않았다. 그런데 수년이 지난 어느 날 문득 그때 일을 돌이켜 보니 침구사협회에서 신청했던 ‘한방의료제도 불법운용과 침구사업권 침해에 관한 헌법소원’이나 무면허 침구인들의 헌법소원에 대해 당시로서는 위헌판정을 내릴 수 밖에 없지 않았나 하고 생각하게도 되었다.
이들 심판에서 위헌 판정이 났다면 무면허로 침놓다 구속되었던 사람들이 국가에 손해배상 청굴ㄹ 할 것이 불을 보듯 뻔했고 그렇게 되면 국가는 이들에 대해 보상하지 않을 도리가 없을 터였다. 더구나 무면허 침술행위로 처벌받은 사람의 수가 20만에서 30만에 이르니 국가로서는 큰 문제가 아니라고 할 수 없을 것이었다.
다행이 지금은 과거에 비해 무면허 침구인에 대한 처우가 많이 달라졌다. 함정수사도 많이 없어졌고 표적수사도 꽤 줄어든 것 같다. 환자에게 해를 입힌 적은 없지만 단지 무면허 침구술을 행했다는 이유만으로 철컥 수갑을 채워 짐짝처럼 내던지는 일도 거의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침구술을 익히고 배워 널리 쓸 수 있는 길은 여전히 막혀 있다.
#국회에서 법을 만들 수 없다?-제 14~15대 국회
김영삼 전 대통령을 처음 만난 것은 1992년 겨울 제 14대 대통령 선거기간이었다. ‘조용히 혼자 와 달라’는 비서의 부탁대로 침통만 챙겨 들고 김 대통령 후보의 상도동 자택을 찾았다.
“소문대로 침 한 번에 다 낫게 해 주어야 합니다”
김영삼 대통령 후보는 어깨가 심하게 굳어 있었다. 하루 종일 선거 유세를 하며 만나는 이마다 악수 했더니 오른쪽 어깨가 떨어져 나가는 것처럼 아프다고 했다. 그 정도면 진짜 침 한 번으로 잡을 수 있었다.
침을 놓아두고 잠시 기다리는 사이, 나는 슬그머니 침구사 제도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눈을 지그시 감고 이야기를 듣던 김 대통령 후보가 입을 연 것은 유침해 둔 침을 다 거두고 난 뒤였다. 신기한 듯 팡을 여러 차례 크게 돌려 보더니 갈 채비를 하는 내게 불쑥 물었다.
“우리나라에 침구사가 몇 명이나 되지요?”
“맥 명도 안됩니다.”
“그것 참 큰일이네요. 이렇게 신통한 침이 없어지면 안되는데….”
이렇게 시작된 김영삼 전 대통령과의 인연은 재임기간 내내 이어졌다. 김 대통령은 수시로 나를 불렀다. 대통령을 치료하는 횟수가 많아지면서 침구사 제도에 대해 알릴 기회도 늘어났다. 틈이 날 때마다 나는 침과 뜸이 사라지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에 대해 이야기 했다.
“한의사 단체와 의사 단체의 반대가 극심하겠지만 침구사 제도는 국민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제도입니다.”
“입법해 보려고 한 적은 있었소?”
“6대 국회로부터 줄곧 시도해 보았습니다.”
“음…”
“그래서 이번에도 국회에 법안을 제출할 생각입니다.”<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