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에 제안할 준비를 하고 있다고 말하자 김영삼 대통령은 대통령 비서실장에게 이야기를 해 놓을 테니 어려운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상의하라고 했다.

“지시를 받았습니다. s의원이 어떻겠습니까?”
비서실장은 소개의원으로 s의원을 주선해 주었다. s의원은 당시 국회보건복지위원회의 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이 소식에 침구사협회 회원들은 모두 뛸 뜻이 기뻐했다. 대한민국이 엄연히 3권이 분립된 나라이기는 하지만 행정의 우두머리인 대통령이 그 필요성을 인정하고 소개의원을 정해 준 만큼 ‘이번에는 되겠다’ 하는 기대감이 생겼다.

남들은 모두 환호했지만 내 마음은 조금 달랐다. 법안의 통과를 목전에 두고 실패했던 몇 차례의 경험 탓에 쉽게 좋아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예방주사를 맞는 심정으로 알고 지내던 법률 전문가들에게 자문을 받아 보았다.

다들 긍정적인 반응이었고 ‘잘됐다’며 이른 축하를 해 주는 이도 있었다. 그제야 마음이 놓이면서 기운이 솟았다.

s의원을 만나는 일은 예상했던 것보다 어려웠다. 처음 의료법 중 침구사법 제정 투쟁을 시작할 때는 국회의원 만나기가 대단히 어려웠다. 그 뒤 시절이 점점 나아지고 나도 익숙해지면서 점차 견딜 만한 일이 되었는데 s의원은 달랐다.

고의적으로 만남을 피했고 번번이 약속을 어겼으며 귀찮은 기색을 드러내는 일도 적지 않았다. 어느 날 더 이상 부아를 참지 못하고 내가 한마디 했다.

“국민의 일입니다! 그리고 대통령이 지시하신 겁니다. 헌데 이렇게 성의를 보이지 않아도 되는 겁니까?”

그러자 s의원이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대통령의 지시면 다요?”

법안과 지료를 챙겨 들고 보건복지위원회의 다른 의원을 찾아다녔다. 결과는 거절. 온몸에서 기운이 다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소개의원 한 사람을 만나기까지 수 많은 어려움을 겪고 울분도 삼켜야 했던 시절에도 이렇게 기운이 빠지지는 않았다.

그 뒤 제 14대 국회가 거의 끝나갈 무렵 한 지인의 조언은 나를 더 허탈하게 만들었다. 대통령이 뒷받침이 있는 일이었다면 국회가 아니라 보건복지부로 갔어야 했다는 것이었다. 그는 담당자와 협의하여 시행령으로 만들어 법안을 올렸으면 어렵지 않게 통과했을 것이라며 혀를 찼다.

“국회의원이 내는 법안은 통과가 장 되지 않지만 행정부에서 법안을 제출하면 국회에서 바로 통과시켜 줍니다. 그게 관례이고 현실이지요”

그때까지 나는 법은 국회에서 만드는 것으로만 알고 있었다. 입법부에서 법을 만들어 넘기면 그것을 시행하는 곳이 행정부처인 줄로만 알고 있던 내게 그이가 해 준 조언은 충격적이었다.

꽤 많은 법률 전문가들을 알고 지냈지만 아무도 그런 말을 해 주지 않았고, 다들 ‘이것은 국회에서 만들어야 하는 법’이라고만 했을 뿐이었다.

지인의 말은 사실이었다. 나중에 알아보니 제헌국회에서 제 15대 국회에 이르는 동안 있었던 142건의 보건의료법률 제·개정 가운데 의원안 원안 통과는 13.2%에 불과했다. 반면 정부 입법과 비상입법의 비율은 59%에 달했다.

개별적인 법의 골격을 결정하는 16건의 전문 개정 역시 사정은 비슷했다. 정부안 입법과 비상 입법이 39.8%인 반면, 의원안 원안 통과는 한 건도 없었다. (의료법/의료보험법의 역사적 변천 참고.)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일이었을 것’이고 ‘말 한 마디 안해 줘서 다 된 밥에 코를 빠뜨렸다’며 흥분하는 이도 있었지만 나는 다른 누구를 원망하고 싶지는 않았다. 제3공화국 이후 행정부가 지나치게 비대해져서 현실과 원칙이 일치하지 않는 것이 문제이지 사실 법은 국회에서 국회의원들에 의해 만들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하긴 알고 있어도 그런 이야기를 해 주기가 국회의원으로선 참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겠구나!’

제10대 국회부터 제 13대 국회가 막을 내릴 때까지 한동안 열기가 꺾였던 의료법 개정안 제안 운동이 제 15대 국회에 들어서 본격적으로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헌법재판소가 문을 연 1988년 말부터 1993년까지의 기간이 헌법소원에 전력을 집중하느라 입법청원에는 소원했던 시기라면, 10·26사태와 함께 시작된 제5공화국 전후(제10대~20대)는 침구인들에게 어려운 시기였다.

의료법 개정 투쟁이 예상보다 훨씬 길어져 20년을 넘어서면서 육체적·심리적으로 진이 빠질대로 빠졌고 경제적으로 어려워지면서 일을 도모하기가 현실적으로 힘들었다. 게다가 시절이 수살하여 큰소리를 내기도 어려웠다.

제 15대 국회 임기 동안에는 침구술과 관련된 청원이 쏟안져 나왔다. 재야 침구인들이 ‘국가 관리하에 학과 및 실기시험을 실시하여 무자격 침구인을 구제하라’는 골자의 청원을 냈고, 대한안마사 협회는 ‘안마사의 3호 이하의 침사용을 보건복지부령으로 명문화할 것’을 요구하는 청원서를 제출했다.

나는 ‘침구사를 의료인의 범주에 포함하고 침구사 면허제도를 신설하도록 개정하라’는 골자의 제안서를 제출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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