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5대 국회가 출범한 이후에는 국회에 아는 사람이 부쩍 늘어 일하기가 한결 수월했다. 워낙 각계각층의 온갖 환자를 대하다 보니 예전에도 사귐의 포기 넓었지만, 1998년 국회 측의 요구로 국회 안에 침뜸 봉사실을 연 이후에는 다수의 정·관계 인사들과 안면을 트게 되었다.

사실 국회 안에 침뜸 봉사실을 만들자는 제안은 그보다 훨씬 이전인 제6대 국회 때부터 있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오로지 의료법을 개정하여 침구사 제도를 만들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던 터라 어디에 묶여 있기가 싫었다. 오죽하면 의료법 개정 투쟁을 해야 한다는 이유로 손님이 미어터지던 침술원의 문을 닫았을까.

그러다 1980년대 후반 이후 의료봉사와 후진 양성을 시작하면서 생각이 달라졌다. 침구사 제도는 몇몇 사람의 노력만으로 세울 수 있는 제도가 아니고 또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국민들이 침과 뜸을 잘 알 수 있게 널리 알리고 그 과정을 통해 합의와 추진력을 이끌어 내어 만들어야 하는 제도라는데 생각이 미쳤다.

국회 내에 있는 침뜸 봉사실의 파급효과는 대단히 컸다. 국회 직원들에서 시작된 환자는 얼마 가지 않아 국회의원들로 이어졌고 이에 따라 침과 뜸을 살려야 한다는 데 동의하는 국회의원의 수도 늘어났다.

김문수 의원과 박성범 의원도 그때 알게 되었다. 내가 신규 침구사를 양성하는 내용의 의료법 개정 청원을 하겠다고 하자 김 의원과 박 의원은 제안의원이 되어 주겠다고 했다. 특히 김문수 의원은 국내의 실태는 물론 미국 등 다른 나라의 침구 현황 등에 대해서도 상세하게 조사하고 분석하는 등 성을 다했다.


의원이 법안을 제출하는 의원법은 의원 20인 이상의 찬성 서명을 받아야 의인을 발의하여 해당 분과위원회의 심의를 받을 수 있다. 김문수 의원과 박성범 의원을 통해 의료법 개정안을 제출한다고 하자 황낙주 전 국회의장이 자진해서 발벗고 나섰다.

황낙주 전 국회의장은 침과 뜸의 덕을 톡톡히 본 뒤 ‘중국과 일본의 침구술이 아무리 발전했다고 해도 우리 침뜸은 못 따라온다’는 확신을 갖고 있는 분이다. 황 전 국회의장에게는 따로 부탁하지 않았는데도 개정안 요지를 들고 국회안을 돌아다니며 의원들의 찬성 서명을 받아 주었다.

사흘 동안 찬성 서명을 한 국회의원의 수는 69명이었다. 그것도 국회의사당 안에서만 받은 것이니 대단한 숫자였다.

“;이사들의 찬성 서명을 받아 첨부하면 힘이 한결 실릴 것 같습니다만….”
“몇 명에게 서명을 받으면 될까요?”
“글쎄요. 아쉬운데로 한 대여섯 명에게라도….”

김문수 의원은 의사들이 반발에 대비해 극소수 의사의 서명이라도 받아 첨부하자고 제안했다. 의안 제출기한이 임박했지만 부지런히 발품을 팔아 침구사 제도에 찬성하는 의사 43인의 서명을 받았다.

과거에 비해 한결 쉬어진 입법활동에 내심 가슴이 뛰면서 ‘의식이 많이 성숙하긴 했구나’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법률안 심사 결과는 대안 폐기였다. 법안심사소원위원회에서 법안을 본회의에 부의(의안을 회의에 붙이는 것을 말함)하지 않기로 결정하면서 폐기되어 버렸다. 이는 아무런 이유도 없고 아무런 근거도 없이 법안을 폐기시킨 것으로 20~30년 전의 국회에서 벌어졌던 일과 한치도 다르지 않았다.

사실‘이번에는 의안을 꼭 통과시켜 반드시 의료법을 개정하고 침구사 제도를 만들겠다’는 굳은 의지로 시작한 일은 아니었다. 그보다 국회의원들의 의식이 얼마나 달라졌는지 알아보려는 의도가 컸다. 그럼에도 허탈한 심정을 감추기 어려웠다.

“연판장에 서명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반대하니!”
“국회의원 전원의 서명을 받아 제출해 보세요. 그렇다고 그 의안이 본 회의에서 통과할 것 같습니까?”
“몹쓸 인간들! 침뜸 봉사실에서 치료 받을 때는 국민에게도 값싸고 효과 좋은 침과 뜸이 혜택을 입게 해야 한다고 하더니, 서명을 하라니까 싫다는 국회의원이 태반이요.”

이권단체의 눈치를 보느라 결정적인 순간에는 자신이 찬성 서명을 한 의안에 대해서도 반대표를 던지는 국회의원들의 모습을 보니 입맛이 소태처럼 썼다. 그때 국회 사무처에서 일하던 황인하 국장이 의회입법으로 다시 청원하자고 했다.

“새로 생긴 제도입니다. 국회의원 30인이 서명을 받으면 청원할 수 있는데다가 분과위원회 심사를 거치지 않고 바로 본 회의에서 심사하니 더 좋습니다.”

며칠만에 다시 국회의원 43명의 서명을 받아 법안을 제출하기 위한 마지막 준비를 하고 있을 때 한 국회의원이 땀을 뻘뻘 흘리며 허겁지겁 침술원으로 달려왔다.

“이번에만 넘어가 주시면 다음 국회에서는 무슨일이 있어도 도와드리겠습니다!”
‘어휴! 국회의원 재선에 실패하고 나면 무슨 원망을 듣게 될까. 이번에는 법안을 꼭 통과시키려고 했던 것도 아니니 젊은 사람한테 손해를 입힐 수도 없고….’

그의 간곡한 부탁과 만류에 결국 나는 결심을 거두고 말았다. 그저 예전에 비해 입법의 관문이 조금 넓어졌지만 국회의원 자체는 변하지 않았음을 확인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 뒤 의원은 제16대 국회의원으로 선출되는데 실패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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