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단 한약을 먹이는 사람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의협이 세침연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지 못하는 까닭은 대한민국 한의계가 첩약 중심이기 때문이다.

한때 한의사들은 한의대의 교과과정이 첩약 중심이며 침구 관련 교육은 소홀히 해왔다는 사실조차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국내 한의대의 교과과정이 공개되고, 교육개방정책이 실현된 이후 외국의 한의대와 비교할 수 있게 되면서 더 이상 사실을 은폐할 수 없었다.

한의계는 앞으로 침구학에 많은 관심을 갖고 교육을 강화하면서 머지 않아 침구술에 능한 한의사가 나올 것이라고 공언하고 있다. 한의사 전문의제도를 통해 침구전문 한의사가 배출될 것이라고도 말한다.

그렇게 되면 별도의 침구사 제도는 필요하지 않으며 침구 시술은 여전히 한의사가 할 일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몇 천원짜리 침과 몇 십만원짜리 약 중에서 한의사들이 어떤 것을 택할지는 불을 보듯 훤한 일이었다. 이것은 본래 한의사가 원래 돈 밖에 모르는 무리라는 뜻이 아니다.

우리나라처럼 공공의료가 보장되지  못하고 대부분 상업적 논리로 치료수단을 선택하는 경향으로 갈 수 밖에 없다.

얼마 전 의료재정이 엄청난 적자를 보이자 각 직능단체들이 모여 의료보험 안정대책을 논의했다. 이 자리에서 한의사들은, 4000~5000원 하는 일반 침 시술료를 낮추겠다고 했다고 한다. 그들에게는 침 시술료는 포기해도 좋을 만큼 관심거리가 아니라는 말이다.

탕약 수입이 훨씬 많기 때문에 침구 진료비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침시술을 하는 한의사들은 많이 있다고는 하지만 지금 같은 한의사 제도로는 침구는 한약의 보조수단으로 형식적으로만 하는 꼴이 될 수밖에 없다.

이렇게 되면 환자들은 ‘침도 맞아봤는데 효험이 없었다’며 침뜸술을 욕되게만 하는 꼴이 된다. 실제로 6년 동안 대학교육을 마치고 거기다 전문의자격까지 딴 한의사들이 현재 침구의료수가로 손수 환자의 몸에다 침구 시술을 얼마나 하겠는가?

침과 뜸만으로 치료할 수 있는 병이지만 한의원 운영을 위해 또 한약을 어떻게든 먹도록 하지 않겠는가?

아무리 학력이 높은 침구전문 한의사가 나오더라도 침뜸 시술은 끊임없이 손재주를 부려서 환자를 치료하는 의술이기 때문에 지금의 의료제도 및 교육제도 아래서는 한의사는 한약을 선호할 수 밖에 없고 침뜸은 그 보조수단이 될 수 밖에 없다.

#대한민국 침구술 대표권을 둘러싼 논쟁

한의사들이 침구술에 관심이 없음이 백일하게 드러난 것은 서울국제침구학술 심포지엄이 처음은 아니었다. 지금으로부터 꼭 30년 전에도 비슷한 사건이 있었다. 문제가 되었던 행사는 세계침구학회의 전신이라 볼 수 있는 기구이자 모임이었다.

총회인 동시에 학술대회인 세계침구학술대회가 개최되는 주기는 3년에 1번이었다. 1969년 파리에서 열린 제 2회 대회에서 회원국들은 다음대회를 대한민국의 서울에서 개최하기로 결의했다.

그때 한국대표 자격으로 파리 대회에 참가했던 이는 이창빈씨였다. 당시 대한침구사협회장이었던 이창빈씨는 파리대회 이후 한의사가 된 인물로 이후 경희대 한의대학장을 지내기도 하는 한의계의 원로이다.

파리대회에서 돌아오고 얼마 뒤 이창빈 씨는 대한침구사협회의 회장직에서 퇴출되고 말았다.회장의 임무를 소홀히 했고 그 때문에 많은 문제가 발생해서였다.

도망치듯 미국으로 건너갔던 이창빈씨가 한국에 다시 모습을 도러낸 것은 1972년 제3회 세계침구학술대회 개최가 얼마 남지 않은 어느 날이었다. 한국에 돌아온 이씨는 세계침구학술대회를 개최하기 위해 침구사협회와는 별도로 분주하게 돌아다녔다.
 
파리 대회에서 개최권을 확보해온 사람은 이씨이므로 본인이 제3회 서울 대회를 개최해야 한다는 논리였다. 우리 침구사 모두는 기가 막혔다. 파리 대회에 참가한 이가 이창빈씨였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때 그는 개인이 아니라 대한침구사협회장 자격으로 참가했었고 그런 만큼 세계침구학술대회가 인정한 개최권은 대한침구사협회에 있었다.

하지만 이씨는 대회의 개최권을 자신의 독점물로 착가했다. 그는 침구사협회와는 단 한마디 상의 없이 이씨 본인의 이름으로 대회를 개최하기 위해 각계 인사를 만나러 다녔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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