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류하는 세계침구학술대회

이창빈씨는 대회를 개최하는 데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당시 대한민국 유일무의 한의대를 보유하고 있는 경희대 총장을 찾아가기도 했고 대한한의사협회의 임원들과 접촉하기도 했다.

물론 이씨의 원조 요청에 한의계가 응할 이 없었다. 침구술에 관심도 없을뿐더러 이창빈씨 개인을 신뢰할 수 없었던 대학과 단체는 관여하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밝혔다. 경희대는 학교 외부의 대회에 대해서는 관여하지 않는다는 것이 공식적인 입장이었고, 대한한의사협회는 협회와 관계없는 일에는 어떤 도움이나 원조도 할 수 없다는 주장이었다.

제정 원조 요청이 거절당하자 이창빈씨는 대한침구사협회와 명칭이 유사한 ‘대한침구학회’라는 위장단체를 만들기에 이른다. 그는 이 위장단체 명의로 국내의 온갖 관계 기관을 돌아다니며 원조를 요청했고 전세계 회원국에게도 대한침구학회가 대회를 추진할 것이라고 선정하고 다녔다.

이창빈씨의 의한 파장이 국제적인 망신의 지경에 이르자 드디어 정부가 대회 개최를 둘러싼 잡음에 끼어 들었다.

1972년은 침구술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시기이다. 닉슨의 중국 방문으로 침술이 서방 세계에 획기적으로 알려진 것이 바로 1972년이기 때문이다.

이창빈씨의 몰상식한 행동이 알려지면서 국내의 언론이 분개하고 국외 침구관계 인사들의 불신이 점점 높아 지자 정부는 이씨에게 대회 추진을 중지하라고 명령했다. 그리고는 경희대 한의학과대학에 대회 개최 의사를 타진했다.

정부의 제안에 대한 경희대의 답변은 ‘거절’이었다. 그러자 정부는 다시 대한한의사협회에 대회 개최를 제안했다. 이에 한의협 역시 대회 개최를 책임질 수 없다는 입장을 표명하자 정부는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 여느 때보다 수십배의 이목이 집중된 가운데 열리는 세계침구학술대회가 주최자를 찾지 못해 표류하다 자칫하면 실패할 수 있는 난관에 봉착했기 때문이다.

#대한한의사협회의 갈팡질팡에 한심한 생각

궁지에 몰리자 정부는 그제야 대한침구사협회를 찾았다. 당연한 우리의 권리를 빼앗기고 먼 길을 돌아 온 느낌에 울분과 설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으나 그렇다고 모른척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정부를 통해 공식적으로 제3회 세계침구학술대회 개최권을 인정받은 침구사협회는 대회 개최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줄곧 이창빈씨와 한의계의 활동을 주시하는 한편 비공개적이지만 대회를 차근차근 준비해왔던 침구사협회는 세계침구학술대회 준비위원회를 결성하고 본격적으로 대회 준비에 들어갔다.

그러나 혼란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학술대회 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던 어느 날 마른하늘에 날벼락과도 같은 소식이 들려왔다. 대한한의사협회에서 세계침구학술대회를 주최하게 되었다는 이야기였다.

처음에는 무슨 뜻인지, 도대체 어떻게 된 이야기 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즉시 나는 침과 뜸을 놓으러 다니며 알게 된 고위직의 지인을 통해 사건의 배경과 핵심을 찾아 나섰다. 그러자 놀랍게도 사건의 한복판에 대한한의사협회와 정부, 대한침구사협회의 신임회장이 있음을 아아냈다.

이창빈 씨를 회장에서 퇴출시키고 후임으로 선출한 신임 회장 임수성씨가 당시 대한한의사협회와 공모하여 대회 개최권을 한의협에 넘겨버린 것이었다.

그 두 사람은 국무총리실 정무비서이나 아무개씨를 통해  대회 개최권을 사고 팔았다고 했다. 침구사협회를 비롯한 침구인 전체는 비탄에 빠져들었다. 믿었던 이들의 등돌림에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속이 쓰렸고 자금력을 내세워 사람을 현혹하는 이들에게 느끼는 분한 마음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한의사협회가 갑자기 마음을 바꾼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침구사협회가 세계적인 대회를 서방 여러 나라의 이목이 집중된 가운데 주최한다는 결정이 나자 한의협은 갑자기 위기감을 느꼈음이 자명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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