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길 / 행정학박사, 前 언론인

8월도 하순에 접어들었다. 벌써 입추․말복이 지나고, 내일(23일)이면 처서이다. 아무리 무더운 여름이라 해도 이맘쯤이면 선선한 기운이 감돌기 시작한다고 하여 처서(處暑)라 이름 지었다 한다. 우리 고장에서는 음력 8월 초하루를 전후하여 일제히 산소의 풀을 베고 있다. 제주도 특유의 풍습이다. 처서가 지나면 따가운 햇볕이 누그러지면서 풀이 더는 자라지 않기 때문에, 이를 좋은 계기로 삼아 벌초를 하는 것이다. 우리 조상들의 현명함이 여기에서도 돋보인다.

8월은 뭐니 뭐니 해도 광복의 달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해방이라는 말을 무심코 쓰고 있다. 하지만 해방이라는 표현은 어딘지 모르게 거부감을 준다. 스스로가 아닌 ‘타력(他力)에 의해 풀려났다’는 자괴감이 드는데다가, 북쪽에서 툭하면 ‘남조선 해방’이니 ‘해방전쟁’이니 하는 용어를 자주 들먹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당초 8.15를 국경일로 제정하면서 해방절이라 하지 않고 ‘광복절’로 명명한 것은 대단히 의미 깊은 일이다. 광복(光復), 빛을 도로 회복했다는 말 아닌가. 잃어버렸던 주권(主權)을 되찾았다는 뜻이니, 대단한 용어의 선택이었다.

그런데 8월은 광복절 ‘환희의 달’이면서도 ‘치욕의 달’이기도 하다. 바로 1910년 8월 29일, 우리는 일본에 굴욕적인 합병을 당하고 말았다. 1905년 우리의 외교권을 박탈하는 내용의 을사늑약을 시발로, 다방면에 걸쳐 마수를 뻗어오던 일본이 마침내 우리나라의 통치권을 빼앗는 합방(合邦)조약을 강제 체결한 것이다. 우리나라 5천년의 역사에 외침(外侵)은 수없이 받아 왔어도, 이처럼 한 나라를 송두리째 먹히고 만 것은 만고에 없는 굴복이요 망국이었다. 이런 수치, 모멸이 어디 있단 말인가. 광복절인 8.15보다도 더 기억해야 할 날이 ‘8.29 국치일(國恥日)’이 아닌가 싶다.

요즘 국내외 사정이 너무 어수선하다. 번잡하고 혼란스럽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현재 대한민국 형편이, 마치 1880년대 말(末)에서 1900년대 초(初) 무렵의 조선정세와 비슷하다고 평한다. 천박한 막말을 거침없이 토해내는 북쪽집단이 버티고 있는데다, 우리 맹방(盟邦)의 대통령이라는 사람은 북한을 편드는 듯한 발언을 서슴치 않고 있다. 일본은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기는커녕 우리 경제를 압박하고 있는가 하면, 중국과 러시아는 우리의 영공을 넘보고 있다. 국내는 국내대로 복잡다단하다.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허둥대는 모습들이 역력하다.

이제 정신을 차려야 할 시기가 되었다. ‘국치의 날’을 상기해야 할 때이다. 그 당시에는 호시탐탐 우리를 삼키려는 주변 열강들 때문에 위기를 맞았었지만 지금은 더욱 다른 모양새다. 남북분단 상태 하에서, 핵보유를 공공연히 내세우며 위협을 일삼는 북쪽집단이 있다는 점이 그것이다.

이럴 때일수록 마음을 놓아서는 절대 아니 된다. 평화는 그냥 주어지지 않는다. 평화란 무엇인가. ‘전쟁이 없는 평온한 세상’을 이른다. 전쟁이 일어나지 않게 하려면 전쟁을 사전에 예방할 수 있는 역량이 있어야 한다. 평화를 계속 유지할 수 있는 힘의 균형이 전제되어야 한다. 힘없는 평화를 상상해보라. 일방(一方)이 강하면 약한 쪽은 반드시 다치기 마련이다. 당장에 강한 자가 덮쳐올게 빤하지 않는가. 역사는 우리에게 ‘상대를 제압할 수 있는 힘을 항상 배양해 두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푹푹 찌는 열대야가 물러나는 것과 더불어, 우리의 불안한 안보도 저만큼 사라져 갔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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