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살 정근효. 서귀포고등학교에 다니고 있다. 제주중앙여자고등학교에 다니고 있는 오은솔·이현지. 올해 18살로 둘은 친구다. 이들은 앞으로 정치인이나 행정가 등 사회에 좋은 영향을 끼치는 일을 하고 싶다.
그런데 미래로 가는 길이 캄캄하다. 머금은 웃음만으로도 눈부셔 '꽃다운 나이'라고 한다는데, 지구에 비상벨이 울리고 있다.
'종말론'은 시대마다 단골 메뉴로 등장한다지만, 사회에 나가기도 전 맞닥뜨린 '기후위기'는 책에서 읽은 철학·신학적 '종말론'들과 전혀 딴판이다. 일부 과학자 등에 따르면 산업화 이전과 견줘 지구 평균 기온 상승폭을 1.5도 이내로 제한하지 않으면 인류 문명은 궤멸할 수 있다고 한다.
'기후 음모론'이라 믿고 싶지만 기록적인 폭염·폭우·가뭄·, 슈퍼 태풍 등 산업화 이후 1.2도 상승한 지구에서 벌어지는 현상들이 심상치 않은 상황. 빙상 붕괴, 광범위한 영구동토층 해빙, 대류 붕괴, 열대 산호초 소멸 등 기후 티핑 포인트(전환점)를 지났을 수 있다는 연구 결과(영국 엑서터대와 독일 포츠담기후영향연구소, 국제연구네트워크 ‘지구위원회’ 등 국제공동연구팀 발표)도 나왔다. 티핑 포인트란 균형을 이루던 것이 깨지고 급속도로 특정 현상이 커져, 작은 변화로도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줄 수 있는 상태를 말한다.
근효·은솔·현지는 마치 화재 경보기가 울리는 건물 안에서 입시 준비를 하는 기분이다. 기후비상벨이 울리는 지구에서 미래를 꿈꿔도 될까. 서울시립과학관에서 열린 '2022년 특별기획전 기후비상' 특별전 입구에는 ‘1.5도 상승, 10년도 남지 않아’라는 '기후비상특보'가 설치됐다. 10년 후, 안정적인 직장에 다니면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결혼도 하고, 토끼 같은 자식을 낳아 지지고 볶는 가장 보통의 일상이 가능할까.
2014년 4월 16일 '가만히 있으라'는 선장의 지시에 따른 단원고 학생들은 세월호와 함께 가라 앉았다. 이들 또래였다. 자신들의 암담한 미래 앞에서 가만히 있을 수 없던 이들은 제주청(소)년기후평화행동(이하 제청기행)을 만들어 기후위기 심각성을 알리고 있다.
근효는 억울했다. 기성 세대 과오를 왜 청소년 세대가 짊어져야 하나. 그렇다고 아무것도 안 하면서 신세 한탄만 하는 '잉여 인간'이 되고 싶진 않았다. 모두가 함께 살아야 할 지구. 근효는 동료 A와 함께 제주에서 기후위기를 이야기하는 청(소)년 당사자 조직을 만들었다. A는 부모님이 환경운동 하는 것을 극심하게 반대해 전면에 나서지 못하고 있다.
제청기행은 2022년 12월 자발적으로 모임을 시작해 현재 13명 청(소)년 회원이 활동 중이다. 기후위기를 직면할 청소년당사자로서 정부와 기성세대에 적극적인 기후위기 대응을 촉구하기 위해서다.
이들은 자발적 참여와 민주적 의사 결정이라는 원칙을 기반으로 다양한 방식을 통해 이들 의사를 전달하고 있다. 난개발이 심한 지역에서 기후 행진을 진행하기도 하고, 요즘은 일본 후쿠시마 핵오염수 투기 반대 목소리를 적극적으로 내고 있다.
근효는 일찍이 평화와 인권에 관심이 많았다.
두 살 때 부모님이 이혼해 재혼 가정에서 자랐는데 새어머니로부터 아동학대를 당했다. 자신의 '힘없음'이 억울해서 언젠가 힘을 가지면 자신을 학대한 새어머니를 자신 앞에 무릎 꿇게 하고 싶은 생각이 강했지만 사회를 돌아보니 인간다운 대접을 받지 못하는 사람이 너무 많았다.
부정적 생애 경험은 답습하기 쉽다는데, 근효는 자신이 겪은 고통을 아무도 겪지 않았으면 했다. 저와 같은 사람을 지켜주고 싶었다. '분노'는 근효를 사회참여로 이끈 힘이 됐다.
평화가 기본값인 사회는 가장 약한 존재의 인권이 지켜지는 사회겠지. 인권 운동에 관심을 갖다 보니 자연스럽게 기후 운동과 만났다. 2021년 대한민국에서 개최된 P4G(Partnering for Green Growth and the Global Goals 2030)에 청소년 대표로 나가 기후위기와 불평등에 관한 연설을 하기도 했다.
기후위기는 사회의 가장 약한 고리부터 무너뜨린다. 노인, 여성, 어린이, 빈민. 이는 이미 코로나19로 증명됐다. 그는 힘없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정치인이 되고 싶다.
같은 고등학교에 다니는 은솔과 현지는 ‘2023 제주 청소년 연설대전’에서 근효를 만났다. 더불어민주당 김한규 국회의원(제주시을), 송재호(제주시갑), 위성곤(서귀포시) 의원 및 ‘다준다연구소’가 함께 지난달 27일 도내 중고생을 대상으로 개최한 행사였다. 근효와 은솔은 연설대전 참가자로 만났다.
현지는 친구 은솔이 참가한다고 하니 응원차 따라나섰다. 근효의 연설을 들은 현지는 전율을 느꼈다. 같은 또래로부터 기후위기 심각성을 전해 들었다.
은솔은 부조리한 관습을 그냥 지나치기 힘들었다. 인권에 관심이 많은 부모님 영향도 있었다. 중학교 당시 불합리한 교칙에 의문을 품고 학생인권조례 재정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 "나는 왜 자유를 억압당하면서 학교에 다녀야 하는지" 의구심이 들어서다. 기후위기의 심각성은 고등학교 내 독서동아리 활동을 하다 알게 됐다.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면 멸종한다. 과학 시간에 배운 멸종위기는 동식물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었다. 저 역시 멸종위기에 직전일 수 있었다. 사회에 영향을 끼치는 사람이 되려면 지속가능한 삶의 터전은 필수조건이다.
당사자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곳이 제청기행이었다. 제청기행 활동은 일종의 '멸종저항'이라 볼 수 있다. 은솔이 맘 놓고 꿈을 꿀 수 있도록.
근효의 연설에 소름이 돋았다는 현지는 그가 참여하고 있는 활동에 관심이 갔다. 제청기행 활동에 참여하게 된 계기는 주제주일본국총영사관 앞에서 일본 후쿠시마 핵오염수 투기 반대 시위도 하고 있어서다.
현지는 역사 과목을 제일 좋아하는데, 한국역사를 공부하다 보니 일본에 대한 공분이 일었다. 바다는 연결돼 있다.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고는 자신의 삶과 무관하지 않았다. 지구 반대편에서 발생하는 동식물의 멸종이 저와 무관하지 않을 터. 돌이킬 수 없는 상태가 되기 전에 이제 당사자로서 뭐라도 해야겠다는 의지가 타올랐다.
친구따라 '강남'간다는데 친구따라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된 셈.
현지는 코로나19가 극심했던 중학교 2학년 때를 회상하면 어두컴컴한 교실이 떠오른다.
당시는 친구들과의 관계도 불안정했다. 불안정한 가정, 불안정한 교실, 불안정한 사회. 불안정한 상태가 계속되면 기후위기에 의한 문명 붕괴보다 청소년들의 정서적 붕괴가 먼저 일어날 지 모른다. '꽃다운 나이'라지만 웃음은 불안에서 꽃피지 않는다.
코로나19가 한발 물러선 요즘 교실 분위기는 그나마 밝아졌다. 코로나 19 발생이 환경 파괴와 무관하지 않다고 한다. 영구동토층이 녹으면 더 많은 바이러스들이 창궐할 거라고 한다. 현지는 공부를 열심히 해서 정책을 결정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자본이 아닌 지속가능한 사회를 위한 정책을 발굴하고 실현하는 것이 그의 꿈이다.
속상할 때도 있다. 은솔이 영사관 인근에서 1인피켓 시위를 하던 중 20대 남성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그런다고 안 바뀔 것 같은데 왜 추운 데서 고생하냐"
코로나19로 사회 시스템이 멈춘 2년여. 청춘을 빼앗긴 것 같아 억울했다는 은솔은 그런 말을 들으면 맥이 빠진다. 은솔의 기후행동은 넓게 지속가능한 터전을 지키기 위한 싸움이다. 핵오염수 바다 방류를 반대하는 이유도 같은 이유다. 지속가능한 지구를 함께 만들자. 그는 "추운 게 정 걱정이면 따뜻한 음료를 사다 주면 된다"고 했다.
근효는 제 삶이 무겁다. 약한 존재들을 그냥 지나칠 수 없어 멈춘 길마다 억울함 투성이다. 분노가 제 삶을 억누를 때도 있지만 너무 빨리 성숙한 근효는 투정도 부릴지 모른다. 다른 또래들처럼 가벼워지고 싶다가도 아직 무거운 자신을 받아들인다. 지나던 시민들의 응원이, 또래들의 연대가 그나마 버티는 힘이 된다고 했다.
제청기행은 청소년 기후소송을 위한 스터디도 준비하고 있다. 한국에서도 청소년들이 정부와 국회를 대상으로 헌법 소송을 제기한 바 있다. 그러나 아직 지자체를 대상으로 한 기후소송은 없다.
제주에서 살아야 할 청소년들을 위해 제주도정이 지금이라도 '탄소없는 섬 제주' 정책을 제대로 펼쳤으면 하는 게 그들 바람이다.
끝으로 하고 싶은 말이 없냐고 묻자 현지와 은솔은 "이제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는 나이다. 우리 목소리를 대변하는 정치인에게 투표할 것"이라고 했다.
숙제도 있다. 근효가 투표권을 행사하려면 현행 만18세에서 연령을 더 낮춰야 한다.
나아가 '단결한 청소년은 결코 패해하지 않는다'면서 제청기행은 언제나 연대할 준비가 돼 있다고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