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날인 9일 제주지법 제5형사부가 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이하 아청법) 위반과 강제추행 혐의로 구속 기소된 정모씨에 대한 국민참여재판을 진행하고 있다. (사진=박지희 기자)
전날인 9일 제주지법 제5형사부가 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이하 아청법) 위반과 강제추행 혐의로 구속 기소된 정모씨에 대한 국민참여재판을 진행하고 있다. (사진=박지희 기자)

"선서. 사실을 정당하게 판단할 것과 재판장이 설명하는 법과 근거에 의하여 진실하게 판결할 것을 선서합니다. 대표 배심원 ○○○."

전날인 9일 오전 11시 제주지방법원 201호 법정. 제주지법 제5형사부는 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이하 아청법) 위반과 강제추행 혐의로 구속 기소된 정모(55)씨에 대한 심리를 진행했다. 일반 재판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배심원 7명과 예비 배심원 1명이 앉아 있었다. '국민참여재판'으로 진행되면서다. 

2008년부터 시행된 국민참여재판 제도는 만 20세 이상 국민 가운데 무작위로 선정된 배심원들이 형사재판에 참여, 유·무죄 평결을 내리는 제도다. 사안에 따라 적게는 5명, 많게는 9명이 참여한다. 배심원은 유무죄에 관한 평의·평결과 양형 의견을 낼 수 있다. 다만, 권고적 효력만 가질 뿐 법적 구속력은 없다.

이번 재판에서는 별도로 꾸려지는 '그림자 배심원' 17명까지 동원됐다. 그림자 배심제는 2010년 제주지법에 도입된 이후 2018년까지 6차례 진행된 바 있다. 이로부터 6년 만에 운영된 날이었다. 기자도 이번 재판에 그림자 배심원으로 참여했다.

그림자 배심원은 모의 배심원으로 국민들의 사법부에 대한 이해도를 높인다는 취지로 운영되고 있다. 정식 배심원과 마찬가지로 평의·평결, 양형 의견을 낼 수 있으나 판결에 반영되지 않는다. 평결 과정도 일반에 공개될 수 있는 점, 법원 전자민원센터에 직접 신청해야 하는 점도 정식 배심원과 다르다.

대표 배심원의 선서로 본격 시작된 이번 재판은 오후 8시께까지 이어졌다. 정씨는 지난 3월 6일 오후 5시 50분께 제주시 일도이동 탐라문화광장에서 버스킹 공연을 하던 피해자 A(19)씨에게 다가가 욕설을 하거나 엉덩이 부위를 손으로 수차례 접촉한 혐의를 받고 있다. 그 모습을 보고 제지하던 B(16)양에게도 다가가 어깨를 접촉한 혐의도 받는다.

생소한 법률 용어 쉽게 설명 ... 검찰-피고인 배심원 설득 노력

일반 재판과 확연히 달랐던 점은 판사와 검사, 변호사 모두 법률용어를 이해하기 쉽게 설명했다는 점이다. 법률용어가 생소할 가능성이 높은 배심원들의 눈높이에 맞춘 것이다.

재판장은 모두절차와, 증거조사 등이 어떤 식으로 이뤄지는지, 증인의 진술을 판단할 때 고려해야 할 점 등에 대해 한자어를 지양하고 의미를 풀어 설명했다. 검찰 측에서는 '합리적 의심' 원칙을 설명하기 위한 수단으로 코끼리 퍼즐을 내보이기도 했다. 

이번 재판에서의 쟁점은 고의성의 유무였다. 검찰의 공소사실에 따르면 범행 당시 만취 상태였던 정씨는 A군의 마이크를 빼앗으려고 했으며, 수차례 제지에도 범행했다. 성범죄, 공무집행방해 등 18차례의 범죄전력도 있었다.

증인으로 법정에 선 피해자 A씨는 "(엉덩이를) 4~5차례 '토닥토닥'하다가 강도가 점점 세졌다"는 취지로 말했다. B양은 '성적인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느껴졌냐'는 변호인의 질문에 "어깨를 접촉했을 때까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손이 밑으로 내려오면서 그런 것 같았다"고 증언했다. 두 증인 모두 성적수치심을 느꼈다는 질문에 "그렇다"고 답했다.

검찰 측은 최종 의견 진술에서 징역 3년 등을 구형했다. 일반인 입장에서 성적 불쾌감을 느낀다면 추행으로 볼 수 있다는 것. 검찰은 판례를 들며 "'고의'에 대해 객관적으로 일반인들에게 성적수치심을 느끼게 하고, 성욕을 자극하는 주관적 동기까지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판시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피고인 측 변호인은 행위에 대해선 인정하나 성적인 고의는 없었다고 반박했다. 그는 "피고인은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술에 취해있었고, 날이 밝은 시각 공개된 장소에서 일어난 행위"라며 "특히 피해자 모두 접촉 강도를 '토닥토닥'이라고 표현했는데 강제추행이 성립될 정도인지 판단해 달라"고 배심원들을 설득했다.

또 "정씨는 자연동굴에서 20년 동안 살다가 나와 다리 밑에서 7년 넘게 산 사회부적응자다. 범죄전력이 많은 것도 사실"이라며 "하지만 이 사건 자체는 범죄가 되지 않는다. 피고인은 자신이 한 행동에 대해서만 법적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모두진술과 증인신문, 범행 장면이 담긴 폐쇄회로(CC)TV 시청 등 증거조사, 검찰 구형, 최후변론 등으로 7시간이 흘렀다. 이 과정에서 배심원은 증인신문 과정에서 규정대로 재판장에게 질문이 적힌 쪽지를 건네기도 했다. 방청석에 앉은 그림자배심원들도 배부받은 자료에 메모를 빼곡히 써내려갔다. 각자 고민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직접 평결해보니 ... 배심원 평결-법원 판결 비슷

심판의 시간. 그림자배심원들도 2개의 조로 나뉘어 판사의 도움을 받으며 평의를 진행했다. 판사처럼 유·무죄를 판단하고, 양형에 대한 방법.형량을 정해야 했다.

오전까지만 해도 간단해 보였으나, 직접 판단하려고 하니 범행 동기, 범행 당시 상황, 피해 정도 등 고려해야 할 사항이 많았다. 서로 의견이 엇갈리기도 했다. 1시간 가량의 평의 끝에 그림자배심원들은 아청법 위반은 무죄, 강제추행은 유죄로 결론이 났다. 양형은 1년 6개월로 결정했다.

재판부는 이날 피고인 정씨에 대해 징역 1년을 선고했다. 이에 더해 아동·청소년 및 장애인 관련 기관 5년 취업제한, 위치추적 전자장치 부착 5년 등도 명령했다.

재판부는 "공개된 장소에서 특별한 이유 없이 피해자를 강제 추행해 비난 가능성이 높고, 피해 회복 조치도 하지 않았다. 성폭력 전력으로 누범 기간인 중에 범행했다"며 "다만 사실관계를 대체로 인정하고 추행 정도가 무거워 보이지 않는 점을 참작했다"고 양형 사유를 밝혔다.

이어 "배심원 6명은 징역 1년, 1명은 징역 9개월이 적절하다는 의견을 낸 점 고려했다"고 덧붙였다.

그림자 배심원으로 참여한 제주대 법학전문대학원 2학년에 재학 중인 박민경(31)씨는 "제주지법에서 실무수습을 하고 있는데 참여 기회가 와서 참여하게 됐다"며 "목소리가 잘 안들리는 아쉬움이 있었지만 내용을 쉽게 설명해줘서 좋았다"고 소감을 밝혔다.

또 "검사는 형의 구성요건을 판단하고, 변호사는 죗값만 받게하려는 노력이 수반되는 것 같다. 법관은 양측의 입장을 판단해야 하는 등 각 분야마다 고충이 있어보였다"며 "국민참여재판제가 시행된지 꽤 됐지만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방청시 느끼는 바가 많아서 많은 사람들이 경험했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한편, 법원행정처에 따르면 2008년부터 지난 2022년 사이 국내 법원 중 제주지법 국민참여재판 접수건수는 185건으로, 실제로 국참이 이뤄진 재판은 40건(전체 21.9%)으로 파악됐다. 배심원 후보자 실질출석률은 36%로 전국 18개 지방법원 가운데 가장 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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