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수 숙명여대 법학부 교수가 지난달 29일 제주시 설문대여성문화센터에서 '평화-인권의 섬을 향한 미래로 특강'을 진행하고 있다. (사진=박소희 기자)
홍성수 숙명여대 법학부 교수가 지난달 29일 제주시 설문대여성문화센터에서 '평화-인권의 섬을 향한 미래로 특강'을 진행하고 있다. (사진=박소희 기자)

정부 및 지자체 차원의 인권발전이 정체돼 있는 지금, 제주가 인권헌장 제정을 통해 새로운 계기를 마련할 수 있을까?

지난달 29일 제주시 설문대여성문화센터에서 '평화-인권의 섬을 향한 미래로 특강'을 연 홍성수 숙명여대 법학부 교수는 "인권헌장 제정을 통해 제주가 평화인권의 선도지역으로 자리잡을 수 있을 것"으로 봤다. 

 

내용보다 시민참여 '과정'이 핵심

헌장은 기관 및 단체 등에서 어떠한 사실에 대해 약속을 이행하기 위해 정한 규범이다. 강제적 구속력은 없다. 헌법재판소가 실질적으로 운영되기 전인 1987년 전 헌법과 비슷한 모양새다.

제주에너지공사와 제주국제자유도시개발센터의 인권경영 헌장 인권경영헌장, 제주개발공사의 청렴인권 윤리헌장, 제주은행의 소비자보호 헌장 등. 이미 도내 여러 기관에서는 인권 관련 헌장을 내세우고 있다.

그러나 단지 선언적 성격만 가진다고 해서 쓸모없는 것은 아니다. 조직의 이념이나 지향하는 최고 가치가 '인권' 또는 '평화'임을 선포하고, 도민과 공무원 등 지역의 구성원들에게 확실한 메시지를 줄 수 있다.

직접적 구속력은 없지만 헌장을 바탕으로 각종 법령 제정과 정책, 교육 등을 추진할 수 있는 발판이 될 수도 있다.

이러한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캠페인이나 행사 등 '이벤트'적 성격이 가미된다. 하지만 구성원들에게 각인시키는 효과를 위해 오히려 꼭 있어야 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강제력을 가진 법 규범이라면 예산, 타 법령과 충돌·모순 가능성 등 여러 부분이 문제될 가능성이 높다. 그렇기에 내용에 대한 세밀한 고민이 필요했을 것이다.

하지만 구속력이 없는 헌장에서 중요한 것은 과정이다. 내용은 대부분 비슷하기 때문이다.

홍 교수는 "헌장 내용을 잘 구성하겠다는 관점으로 접근하면 의미 없는 작업이 될 수 있다. 오히려 부차적 문제"라면서 "시민의 합의 수준을 제고하고, 의지를 모으는 과정을 어떻게 설계할지 고민하는 게 핵심"이라고 강조했다.

제주차별금지법제정연대가 지난달 29일 제403회 임시회 전 제주경찰청 앞에서 '제주특별자치도 혐오표현 방지 및 피해자 지원 조례안'을 적극 지지했다. 도의회 행정자치위원회는 해당 조례안을 심사 보류 결정했다. (사진=독자 제공)
'제주특별자치도 혐오표현 방지 및 피해자 지원 조례안'을 지지하고 있는 '제주차별금지법제정연대'. 이 조례안은 11대 도의회에서 두 차례 심사 보류돼 사실상 폐기됐다. (사진=독자 제공)

정체된 인권 발전 ... 제주가 새로운 계기 마련할까

지자체는 시민들의 생활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중앙정부보다 가까운 위치에서 국민들의 의견을 수렴하고, 접촉하는 역할을 맡고 있기 때문이다.

인권행정도 마찬가지다. 과거 인권이슈는 집회나 시위의 자유였다. 민주화 이후 관련 이슈는 사회복지와 보건, 교육, 주택, 식수, 치안, 세금 등 국민의 생활과 밀접한 주제가 대부분이다. 중심은 중앙에서 지자체로 상당 부분 옮겨졌다.

2010년 자연스럽게 지차체별로 인권조례제정운동이 활발히 이어졌다. 2020년 기준 243개 지자체 중 인권조례를 제정한 곳은 전체 47.7%인 116개에 달한다. 모두 이 당시에 제정된 조례였다.

인권'이라는 단어가 명시돼 있지 않더라도 다문화 가족 지원, 외국인 주민 인권 증진, 장애인 차별 조례 등 관련 조례가 다수 생겼다. 제주만 해도 10개가 넘는다.

그러나 2013년을 기점으로 중앙에서부터 흐름이 바뀌었다. 일종의 백래시(backlash : 진보적인 사회 변화에 따라 기득권층의 영향력이 약해질 때 그에 대한 반발)였다.

2007년 17대 국회에서 처음으로 발의된 차별금지법(안). 2013년 19대 국회에서만 2번이나 발의됐지만 반발이 거셌고, 결국 철회됐다. 20대 국회에서는 관련 법안이 발의조차 되지 않았다.

문제는 차별금지법뿐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19대 국회에서는 인권교육지원법안과 증오범죄 통계법안 등이, 20대 국회에서는 국가인권위원회법 일부개정법률안 등 11개의 인권·차별 관련 법안이 꾸준히 발의됐지만 모두 철회됐다.

한국사회에서 '인권·차별'이라는 키워드가 사실상 금기어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

이는 지자체도 영향을 받았다. 2000년대 후반 주요 지자체에서는 인권조례를 제정하는 시도가 늘었지만, 2010년대에 들어서면서 오히려 퇴행하는 사례가 많아졌다. '대전 성평등기본조례 개정' 사태를 비롯해 여러 인권조례에 포함한 성소수자 관련 조문이 줄줄이 지워졌다.

홍 교수는 "관련 법안이 국가 차원에서 오랫동안 정체돼 있는 상황에서 하나가 통과되면 여러 관련 법안도 급물살을 탈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아직 고비를 넘기지 못하고 있다"면서 "제주에 헌장이 마련된다면 국가 차원의 인권 발전에 새로운 계기가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홍성수 숙명여대 법학부 교수가 지난달 29일 제주시 설문대여성문화센터에서 '평화-인권의 섬을 향한 미래로 특강'을 진행하고 있다. (사진=박소희 기자)
홍성수 숙명여대 법학부 교수가 지난달 29일 제주시 설문대여성문화센터에서 '평화-인권의 섬을 향한 미래로 특강'을 진행하고 있다. (사진=박소희 기자)

기존 생각의 변화 부르는 '숙의 민주주의' 

의회의 결의문 채택과 여론조사, 신문고, 민원, 공청회·토론회, 인권위원회 심의 등 기존 의견수렴 방식도 모두 시민참여형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형식적 절차에 그친다. 최종 결정은 행정과 전문가 몫이였다. 

시민들간의 토론과 숙의를 통해 직접 결론을 도출하는 시민참여 모델은 없을까. 홍 교수는 이와 관련 '숙의 민주주의형' 모델을 제안했다.

해당 모델을 적용한 여러 사례가 있지만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2014년 '서울시민 인권헌장' 제정 과정이다.

실제로 제정 과정에 참여했던 홍 교수는 이에 대해 "전형적 시민참여형 방식"이라면서 "인권교육과 민주시민의 학습장으로 자리매김했고, 시민성과 전문성이 결합됐던 사례"로 평가했다.

2014년 6월 12일, 서울시민 인권헌장 제정 준비위원회가 발족했다. 서울시 공무원으로 이뤄진 준비위원회와 각계 전문가로 이뤄진 전문위원회는 같은해 11월까지 약 5개월간 41차례의 회의를 거쳐 주민참여 방식에 대해 논의했다. 선례가 없었기 때문에 고민을 거듭해야 했다.

서울시는 이후 10세 이상 시민을 대상으로 시민위원을 공개모집한 결과, 1570명이 응모했다. 무작위 추첨을 통해 선발된 150명은 '서울시민인권헌장 제정 시민위원회'로 구성돼 활동했다.

150명의 시민위원이 토론을 통해 자유롭게 의견을 내고, 전문위원은 제시된 의견을 취합·정리해 다음 회의의 안건으로 제시하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홍 교수는 "시민들이 인권증진에 주체적으로 참여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는 방식에 대해 정말 많은 고민이 있었다"면서 "회의 전문가를 섭외하기도 하고, 소품과 음향 등 사소해보이는 것들도 주민들이 자부심을 느낄 수 있는 장치라고 판단해 힘을 들였다"고 회고했다.

이어 "실제로 직장인이나 학생, 주부 등 생업이 있는 시민들이 다수였는데, 6차례 열린 시민위원회의 참석률은 약 90% 이상일 정도로 모두 열정을 보였다"면서 "시민 참여의 의미를 가장 잘 살렸던 모델"이라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특히 헌장에 반대를 외치는 시민들은 자신들이 부정했던 존재를 토론장에서 실제로 마주한 후 그동안 보였던 행동과 다른 양태를 보이기도 했다"면서 "공론은 그 자체로 힘을 갖고 있다. 숙의민주주의의 핵심은 기존 생각의 변화"이라고 강조했다.

서울시민들이 2014년 12월 10일 시민위원이 자체적으로  선포한 '서울시민 인권헌장'을 지지하고 있다. (출처=홍성수 교수)

규범적 근거 충분 ... 주도면밀한 준비 필요

제주에는 제주특별자치도 인권 보장 및 증진에 관한 조례(이하 인권조례) 등 인권헌장이 마련될 규범적 근거는 이미 충분하다. 

홍 교수는 헌장제정 과정이 유의미하면서도 매끄럽게 진행될 수 있도록 주도면밀한 준비가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인권의 보편성과 함께 '평화와 인권의 섬, 제주'라는 슬로건을 보유하고 있는 지역적 특징을 살리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고 봤다.

또 제주4·3 정신을 계승해 만든 기본원칙을 지역사회 공동체 속에 구현해 나간다면 인권도시로 자리잡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현 상황에서 각기 다른 도민의 가치관을 통합할 수 있을까? 제주에서는 최근 '혐오표현 방지 조례(안)'이 발의된 바 있지만 사실상 폐기됐다. 보수단체의 반발의 영향이 컸던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서울시민 인권헌장 제정 과정에서 보인 한계도 비슷했다. 공청회 과정에서의 폭력 사태와 시민의 대표성, 시민위의 의결 방식, 예산 등의 문제였다.

특히 당시에도 '성적지향' 항목이 쟁점으로 자리잡았다. 2014년 11월 시민위가 마련한 50개 조항 인권헌장이 최종 확정됐으나, 보수단체의 반발로 인해 서울시장이 선포를 거부하는 사태도 일었다. 결국 12월 시민들이 자체 선포했다.

홍 교수는 "주민참여형 인권헌장 제정은 충돌을 회피하는 기존 방식을 넘어 합리적으로 조정하는 시도를 벌이는 과정"이라면서 "그 전 제정하려는 이유가 명확해야 한다"고 말했다.

시민들이 실제로 모여 토론을 하는 과정을 밟기 위해서는 결론이 긍정적 방향으로 도출될 것이라는 확신이 있어야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이다.

그는 "특히 해당 의제는 수위 높은 결론을 도출하는 게 아닌, 최소한의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한 합의를 도출하는 과정이기 때문에 인권지향적인 결론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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