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의 세계화는 어떻게 하는 걸까요? 단순히 4·3을 알리는 작업은 많이 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제주삼다수 라벨에도 4·3이 쓰여 있습니다. 이 물을 미국이나 유럽에서도 먹고 있어요. 그런데 이게 세계화, 국제화라 할 수 있을까요? 4·3이 어떤 모습으로 알려져야 할지를 고민해야 합니다.”
27일 오후 제주시소통협력센터 5층 다목적홀에서 ‘진실과 정의를 위한 제주4·3국제네트워크’(이하 국제네트워크) 창립식과 ‘4·3 진실과 정의를 위한 국제포럼’이 열렸다.
이날 포럼에서 이택광 경희대학교 교수이자 월든코리아 고문은 ‘4·3담론, 국제화를 위한 과제’ 주제로 발표했다.
이 교수는 “개인적으로 2차 세계대전 이후 냉전 체제, 특히 한국 문제에 관심이 많았다”며 “분단이나 냉전, 군사독재가 우리들의 문제라고 생각했는데 서양 철학과 현대 철학을 공부하면서 이게 전 세계의 문제라는 걸 깨달았다”고 발표를 시작했다.
이어 “대학생 시절 4·3을 알게 되면서 한국 과거사 중 여러 사건이 있었고 항쟁이 있었지만 그 중에서도 4·3이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고 생각했다”며 “처음부터 4·3사건은 국제적으로 시작됐다는 게 제 생각이었고 지금까지 4·3과 관련한 연구와 활동을 해오신 분들과 달리 철학적 과정에서 이론화하는 작업을 했다”고 설명했다.
또 “4·3의 전국화를 통해 한국 역사의 문제라는 사실을 사회적 합의로 이끌어내는 데 성공했지만 국제화는 어떻게 해야할까”라며 “선언적 의미로서 국제적 사건이 아닌 진상을 규명하는 차원에서 4·3이 국제적인 사건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정의가 승리한 전쟁에서 제주도민은 왜 죽어야 했나
이 교수는 영국의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이 정의한 ‘단기 20세기’의 개념을 끌고 와 4·3이 일어난 배경을 설명했다. 단기 20세기는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1914년부터 소련이 무너진 1991년까지를 말한다.
이 교수는 “헐리웃 영화에서도 볼 수 있듯 미국은 자신들이 가진 패러다임으로 정의(justice)를 정의(definition)하고 있다. 우리도 그런 개념으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다”며 “그래서 우리는 2차 세계대전이 나치 히틀러를 타도함으로써 정의가 승리한 전쟁이라고 생각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미국이 이끈 연합국이 승리한 전쟁의 그늘에서 4·3 대학살이 일어났다”며 “4·3에서 피해를 입은 사람들과 유족들은 죄를 지은 게 없는데 죄를 지은 것처럼 살아왔다. 갑자기 죄를 짓게 된 것이다. 우리는 ‘가스라이팅’을 당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나치에 저항했던 사람들이 모두 힘을 합쳐서 정의를 위해 싸웠고 승리했다고 하는데 왜 제주도민은 죽어야 했을까”라며 “제주에서 제3세계 전쟁이라는 새로운 전쟁이 시작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에릭 홉스봄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났을 때 전쟁이 종식된 게 아니라고 쓰고 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아시아와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등 제3세계에서 내전이 시작됐다. 국가 간 전쟁에서 국가 내 전쟁으로 전환된 것이다. 20세기 후반을 지배하는 새로운 폭력의 형태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최초로 일어난 민간인 학살인 제주4·3은 이런 가설을 뒷받침하는 사건이다.
#4·3 학살의 원인은 반공주의 때문이 아니다?
“극우보수라 불리는 사람들은 ‘4·3이 공산주의 세력이 일으킨 것이다’라고 말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냉전 때문이다’라고 하지만 그 당시엔 실제로 냉전이 없었습니다. 담론으로만 존재했었죠. 최근 냉전 연구가들이 새롭게 밝혀낸 사실입니다.”
이 교수는 4·3과 한국전쟁은 냉전(자유 민주주의 국가와 공산주의 국가 간 대립하는 양상) 체제 때문에 일어난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국의 일원이었던 소련이 미국과 실질적으로 대립하진 않았다는 것. 오히려 당시 담론으로만 존재하던 냉전이 한국전쟁 때문에 실제로 발생할 수 있었던 것이라 봤다. 담론이 사건을 만든다는 논리다.
그는 “시기상으로 제주4·3이 발생했을 무렵엔 반공주의가 명분을 얻지도 못했다”며 “미국이 중국을 소련에 대항하는 기지로 만들려고 하다가 실패한 상황이 제주4·3과 맞물려 있다. 4·3은 단순히 이승만이 양민을 학살한 국내 사건이 아니라 국제적인 정세와 엮인 사건”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2차 세계대전 이후 ‘전후 체제’는 미국의 ‘아시아 태평양 시대’를 의미한다”며 “당시 미국에겐 잘 교육된 인구와 지하자원이 풍부한 아시아 국가를 장악하는 게 중요한 문제였다. 실제로 소련이 아시아를 차지하려는 걸 막기 위해 일본에 원폭을 투하하는 무리수까지 뒀다”고 설명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는 대동아공영(일본이 아시아의 여러 나라를 침략하며 내세운 개념)권에서 팍스 아메리카나(미국이 주도하는 평화 체제)의 영향권으로 넘어갔다.
이 교수는 “4·3은 미국의 팽창정책이 낳은 비극”이라며 “전후 필리핀과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타일랜드에서도 모두 학살이 일어났다. 4·3의 진실규명은 아시아 전후 체제에 대한 반성이 동반될 수밖에 없다”고 피력했다.
#국제적 사건으로 4·3을 담론화하려면
이 교수는 4·3을 국제적인 사건으로 담론화하기 위해선 우선 국내 정치의 한계를 극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4·3은 반공주의 등의 담론으로 규정할 수 있는 사건이 아니기 때문이다. ‘공산주의냐, 아니냐’ 이념 논쟁은 4·3의 결과로 만들어진 소모적인 싸움이라는 게 이 교수의 주장이다.
둘째로 “4·3이 보상운동에 그쳐선 안 된다”며 “과거의 이야기만 하고 그치는 게 아니라 현재적인 의미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셋째로 4·3을 통해 전후 체제를 새롭게 규정할 수 있어야 한다고 제언했다. 이 교수는 “이 모든 게 팍스 아메리카나 때문에 일어난 것”이라며 “미국은 일본 제국주의를 타도했다고 하면서 일본 제국주의를 그대로 가져왔다. 정의의 전쟁을 했다는 이들이 죄 없는 사람들을 학살했다. 미국에게 책임을 물어야 하는 이유”라고 비판했다.
이를 위해 미국의 책임을 규명하는 학술 작업이 이뤄져 철학적인 내러티브를 만드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 같은 4·3 진실규명은 이 세계에 대한 새로운 관점과 질서를 정립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마지막으로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의 대외 정책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국제운동과 연대해 의제를 확장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주제발표가 끝나고 이어진 토론 순서에서는 이 교수의 ‘냉전 체제와 4·3 간 비연관성’에 대한 주장을 두고 질문이 이어지기도 했다.
김종민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위원회 위원은 “발제 내용 중 한국전쟁 이전에 냉전이 없었기 때문에 냉전과 4·3은 관련이 없다고 말씀하셨는데 그렇지 않다”고 반박했다.
이어 “냉전은 2차 세계대전 종식과 더불어 바로 시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며 “1947년 3월 미국 트루먼 대통령이 의회에서 발표한 ‘트루먼 독트린’은 유럽 내 소련의 팽창을 막기 위한 선언이었다. 이에 따라 미국이 그리스와 터키의 반공 정부에 (경제적·군사적)원조를 제공하면서 냉전이 노골화, 본격화 됐다고 본다”고 설명했다.
방청을 하던 김동현 제주민예총 이사장 역시 “제주4·3이 반공 체제 산물이 아니라는 발표 내용에 대해선 동의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에 이택광 교수는 “냉전과 관련해서 전달이 잘못된 거 같다”며 “한국전쟁 이전에 냉전이 아예 없었다는 게 아니라 미국이 제주에 와서 4·3을 통해 본격적으로 폭리를 취하기 위한 명분을 만들기 위해 양민을 학살했다는 걸 말씀 드리고 싶었다”고 답했다.
한편 이날 창립식과 국제포럼은 진실과 정의를 위한 제주4·3국제네트워크가 주최, 제주4·3기념사업위원회가 주관, 제주특별자치도와 제주시소통협력센터가 후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