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 한말 제주에 유배 와서 이재수의 난을 직접 목격한 김윤식은 제주 읍성을 포위한 난군에게 문을 열어주는 일에 앞장서는 제주 여성들을 보면서 남자들 저리가라하는 드센 여자들에 대해 한마디 말을 남기기도 했다.
‘본디 악하고 사나워 싸우기를 좋아하여 남자들도 두들겨 패는 사람들이었다.’
제주 여성이 전부 사나울 리는 없지만 강인한 쎈언니로 살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있었다.
유교적 가치관에서 남성중심의 가부장제를 유지하는 근간인 군대, 노동, 세금을 담당하고 관직을 독점하는 일이 제주에선 불가능 했다. 물론 관직에선 소외되었지만 군대, 노동, 세금을 여성도 나눠야 했다. 척박한 섬에서 살아가려면 여성들이 여러 분야에서 열심히 살아야 했다. 이들은 외부인의 눈에는 거칠어보일지 몰라도 제주인의 입장에서는 생존력이고 주체성이었다.
제주의 쎈 언니 계보는 구석기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제주섬을 만든 신화의 주인공은 설문대할망이다. 이후 자지명왕아기, 삼승할망, 가문장아기, 용왕국따님아기를 거쳐 제주에 농사법을 알려줘서 농사의 신이 된 자청비까지 신화 속 여성 영웅들은 제주의 자연 ·문화· 생명·운명·농업을 주관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조선이 건국된 후 제주에선 중앙정부의 권위를 받아들여야 했기 때문에 또 하나의 권위인 신화는 사라진다. 그러나 여전히 쎈언니 계보는 이어진다.
여의사 '장덕'
세종부터 성종까지 장안을 떠들썩하게 한 여의사 장덕은 제주에서 이름 난 의녀였다. 배고픈 사람 먹이고, 아픈 사람 치료하는 일은 왕실의 존재이유였으니 조선은 의료체계를 갖추는데 총력을 다했는데, 특이하게 여의사가 존재했다.
여자 의사 제도인 의녀제도가 도입된 것은 태종 때인 1406년으로 중국에도 없는 의녀제도가 생긴 것은 정통 유교 국가를 표방한 조선왕조이기에 가능했다.
‘남녀칠세 부동석’이라고 해서, 남녀의 구별을 분명히 하고, 여자환자들은 여자의사가 돌보게 하려는 뜻에서였다. 여의들은 관비, 즉 관의 노비신분이긴 해도 조선시대 내내 거의 유일한 전문직여성으로서 이름을 남겼다. 드라마 덕에 유명해진 '대장금'도 그 중 하나이다.
드라마 '대장금'에서 제주에 유배온 대장금이 의술을 배웠다는 제주 여인이 '장덕'인데 둘은 시대가 완전히 다르니 사실과는 다르다.
그러나 장덕은 대장금에 못지 않은 이름을 얻은 인물이다. 대장금이 의과에서 최고였다면 장덕은 치과에서 최고였다. 장덕의 이야기는 중종 때 사람인 이육이 남긴 야담집인 <청파육담>에서 소개되었는데, 가씨라는 사람에게서 치통에 대한 치료법을 배웠다고 한다.
장덕은 제주의 풍토병인 코와 눈의 부스럼제거에도 일가견이 있었다고 한다. 그것은 탐라국시대부터 전해내려온 고유의 비법이었을 것이다. 소문이 궁궐에까지 닿고 임금은 장덕을 불러 치통을 치료했고, 제주에서 키운 제자인 귀금과 옥매까지도 혜민서의 의녀가 되는 영광을 얻었다고 한다.
출륙금지령을 뚫고 신문고를 울린 '곤생'
억울함을 호소하기 위해 출륙금지령을 뚫고 한양에까지 올라가 일을 해결한 쎈언니 '곤생'도 제주여인의 강인함을 보여준 예이다.
제주목사는 부임할 때 가족을 데리고 올 수 없었다. 그런데 이형상의 뒤를 이어 새로 온 제주목사 이희태는 첩과 조카를 데리고 왔다. 조카라고는 하지만 사실은 아들이었고, 그 사실을 숨기기 위해 조카라고 한 듯하다.
관청기생으로 목사의 일거수 일투족을 다 볼 수 있었던 곤생은 이희태가 꽁꽁 감추려고 했던 이 비밀을 사람들에게 말해버렸는데 이희태는 그것을 고깝게 여기고는 어디 두고보자하고 이를 갈고 있었다.
마침 기생 몇 명이 개인적인 감정으로 곤생을 미워하다가 관가에 고발하는 일이 생겼다. 이희태는 옳다구나하고 곤생과 그녀의 자식 다섯을 모조리 불러다가 고문을 하기 시작했다.
곤생은 숙종의 처남으로 한양을 휘어잡던 김진구란 인물이 제주에 유배왔을 때 총애를 받았었다. 김진구는 이희태가 부임하기 전에 유배에서 풀려 한양으로 돌아간 후 승승장구했다. 그러다 김진구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은 이희태는 이때다 하고 곤생을 몰아붙이기 시작한 것이다.
분노에 찬 이희태의 모진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곤생의 딸 셋은 결국 죽고 말았다. 그 자리에 배석했던 대정현감, 정의현감은 아무리 봐도 이희태의 개인적인 복수이고 곤생의 딸들은 무고한 듯 보여서 추안(범죄혐의조사서류)에 사인을 하지 않았다.
곤생은 억울함을 참지 못하고 한양까지 달려간다. 당시 제주에는 출륙금지령이 있어서 섬을 떠나려면 허가를 받아야 했으니, 아마도 제주 사람들이 곤생의 억울함을 알고 봐 준 것으로 보인다.
한양에 도착한 곤생은 나름 김진구의 인맥들을 찾아서 하소연을 해봤겠지만 어디 감히 천한 기생 따위가 양반, 그것도 제주목사의 일에 대해 말하느냐는 핀잔만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방법이 하나 있었다. 그것이 신문고였다.
조선 중기에는 거의 울리지 않다시피하던 신문고가 울리자 궁궐은 화들짝 놀랐고, 사연을 알아보니 만만치가 않았다. 아무리 제주사람의 전권을 손에 쥔 제주목사의 일이라 해도 딸 셋을 고문으로 죽인 것은 심각한 일이었다. 게다가 당시 이희태는 전임 목사인 이형상의 업적을 비방하다 파직된 상태였다.
심상치 않다고 여긴 조정에서 사건의 진상을 조사하게 하였다. 결국 곤생의 억울함이 해결되었고 이희태는 유배형을 당하였다. 하지만 이희태는 이후 복권되어 다시 지방수령으로 보내졌으니 조선시대에 사대부 관리가 기생의 딸 셋 쯤 죽이는 일은 그 정도의 일이었던 셈이다.
인간의 존엄을 지킨 '홍윤애'
조선후기가 되면서 중앙정부는 당쟁이 격화되며 정치적 경쟁자가 아니라 가문의 원수로 변하는 와중에 제주도가 느닷없는 당쟁의 피해를 보게 된다. 정쟁의 패자들이 유배형을 받아 제주에 내려왔기 때문이다.
양반사대부들의 추악한 정쟁으로 더럽혀진 제주에서 이에 맞서 인간의 존엄함을 지킨 여인이 있다. 홍윤애이다.
홍윤애는 1754년 경 향리집안의 막내딸로 태어났다. 1777년에 조정철이 한양에서 유배를 오면서 평범했던 삶이 뒤흔들리게 된다.
조정철은 노론벽파가문 사람이었다.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가 즉위하자 노론벽파는 위협을 느낀다. 사도세자의 죽음에 책임이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노론벽파 일부에서 정조를 끌어내고 새 임금을 올리려는 반란을 벌이다 실패했는데 이 일에 조정철의 처가가 모조리 연루되어서 줄줄이 처벌을 받는다. 조정철의 아내는 자살을 선택했고, 아내를 잃은 슬픔이 가시기도 전에 조정철은 제주로의 유배형을 받는다.
머나먼 섬 제주에서 고독한 유배생활을 하는 조정철을 돕기 위해 이웃 홍윤애가 드나들기 시작했다.
조정철의 집안은 명문가답게 오랜 동안 정쟁의 일선에 있었고, 할아버지를 비롯해서 가문사람들이 유배형에 처해 제주를 들락거렸으니 제주에서 조정철은 특별한 대접을 받을 만했다. 지금은 유배객이지만 언제 임금의 부르심을 받을지 모르니까 말이다.
제주 사람들은 자신의 딸이 유배객과 결혼하는 일에 대해 약간의 기대를 갖고 있었다. 일종의 결혼동맹인데 부인이 없는 경우에는 자손이 적자가 되고, 부인이 있다고 해도 그렇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여초사회인 제주는 첩이나 소실이라 하지 않고 ‘작은각시’라고 해서 본처와 다른 대접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내가 죽고 처가마저 박살이 난 조정철에겐 자신의 유배생활을 도울 수 있는 사람이 없었고, 집을 드나들며 돌봐주는 홍윤애만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둘의 관계는 사랑으로 발전했고, 마침내 딸을 낳게 된다. 그러나 불과 한달 뒤 김시구라는 인물이 제주목사로 부임하면서 비극이 시작되었다.
소론가문 출신의 김시구는 노론출신의 조정철에 대한 복수심에 불탔다. 두 집안은 원수가문이었기 때문이다. 김시구는 조정철을 어떡하든지 죽이고야 말겠다고 결심하고 온갖 트집을 잡아 관아에 끌고 와서 매질을 했다.
그래도 죽지 않자 면포 50필과 함께 일등 벼슬자리를 주겠다는 현상금까지 내걸어 그의 죄를 고발하라고 독려했다. 조정철의 집에 드나드는 사람은 데려다 취조를 했고, 그것도 모자라 자신이 은밀히 잠복을 하기도 했다. 그렇게 끈질기게 기다린 결과 홍윤애가 걸려들었다.
김시구는 즉시 잡아다가 조정철의 죄를 고발하라고 고문을 하기 시작했다. 모진 매질과 회유에도 굽히지 않자 발가벗겨서 성적 수치심까지 자극했다. 그러나 홍윤애는 여전히 완강하게 버텼고, 결국 숨을 거두고 만다.
이후 조정철의 기나긴 유배생활은 22년간 더 이어지다가 1805년에 마침내 유배에서 풀렸다.
관직에 복귀한 후 제주목사를 자청하여 다시 한 번 제주땅에 발을 디뎠다.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홍윤애의 무덤을 찾아 통곡을 하고 추모시를 써서 비석을 세웠다. 홍윤애와의 사이에 낳은 딸에게는 목사생활 1년간의 봉급을 다 털어 도왔고, 곽지리에 아담한 초가집도 마련해줬다. 이 집을 사람들은 ‘조목사 딸집’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또 외손자들은 자신의 호적에 입적시켰고 한양으로 불러 공부를 시켜주기도 했다.
그녀는 어떤 당파에 속하거나 어떤 당파를 반대하지도 않았으며 오로지 한 인간을 사랑했을 뿐이었다. 정치적 반대자들에 대한 피의 복수가 난무하던 조선 말기에 홍윤애는 복수극에 희생되었지만 끝까지 의리를 저버리지 않음으로써 남성들의 추악한 권력다툼을 비웃었다. 제주의 쎈언니다운 포부와 의리를 보여준 것이다.
쎈언니 No1. '김만덕'
뭐니뭐니해도 제주의 쎈언니하면 김만덕을 빼놓을 수 없다.
그녀는 기생 출신으로 당시 출륙금지령으로 고통받는 제주 사람들을 위해 조선정부가 일부 상업활동을 장려할 때 기회를 살려 거상이 되었다.
그러나 그녀가 여자의 몸으로 거상이 되었다는 것보다 더 놀라운 것은 가산을 털어 쌀을 사들이더니 진휼미로 몽땅 기부한 것이다. 당시 흉년은 제주에 속담으로 아직까지도 전래되는 갑인년 흉년으로 흉년이면 쌀값이 3배 상승하고, 섬이기 때문에 그야말로 쌀을 팔면 돈더미에 앉을 기회였는데도 말이다.
제주의 부자들이 흉년에 기부하는 일은 드문 일은 아니었다. 기부의 대가로 관직과 명예를 얻을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녀에겐 그 어떤 대가도 기대할 수 없었지만 기꺼이 굶주린 사람들을 위해 모아두었던 재산을 털어서 굶주린 제주 사람들을 도왔다.
자신의 재능을 이용해서 사람들을 돕기도 하고, 운명에 굴하지도 않고 불의에도 굽히지 않았던 제주 쎈언니들의 계보는 일제강점기에는 대규모 항일항전인 해녀항쟁의 승리로 이어졌고, 지금도 제주 여성들이 자신의 삶을 열심히 살아가는 동력이 되고 있다.
제주는 제주여성들에게 가혹했지만 그러나 그것에 굽히지 않았던 쎈언니들이 있었던 곳이기도 하다.
고진숙 작가
고진숙 작가는 용눈이오름 아래에서 태어나 제주 밖에서 바람처럼 살았다. 지금은 일 년의 절반을 제주에서 보내는 반서(울)반제(주)인이다. 역사동화 '이순신을 만든 사람들'을 시작으로 최근 '청소년을 위한 제주 4.3'까지 다양한 역사콘텐츠들을 쓴 고 작가. 올해부터 매월 세번째 월요일에 독자들과 만나는 [제주옛썰]은 고진숙 역사작가의 눈으로 제주가치를 재평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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