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라국 건국 신화를 간단하게 요약하면 이렇다
땅속에서 솟아난 세 명의 신인인 삼을나가 바다에서 온 벽랑국 세 여인을 맞아 결혼하여 농사를 짓게 되었고 나라 살림이 나날이 불어나 살기 좋은 땅이 되었다. 삼을나는 활을 쏘아 3구역으로 나눠 평화롭게 다스렸다.
탐라국의 건국과정이 이토록 평화로웠을까? 고대국가로 발전하려면 갈등과 전쟁이 없이는 불가능한데도 말이다. 그렇다면 사실은 어땠을까? 그때 일어난 일을 알려주는 또 하나의 신화가 송당 본향당신화이다.
송당 본향당 신화를 간단하게 요약하면 이렇다.
제주 토박이 소천국은 바다 건너온 농경인 금백주와 결혼하여 18명의 아들과 28명의 딸을 낳았다. 그러나 소천국은 태생적으로 수렵인이라 밭을 갈아야할 소를 잡아먹어버렸다. 이에 화가 난 금백주는 자식들을 데리고 소천국과 별거를 하였는데, 훗날 막내 아들인 궤네기가 아버지를 만나서 불경한 짓을 벌이고 추방당한다. 궤네기는 엄청난 지혜와 무력으로 바다건너 나라를 평정하고 돌아온다. 이에 놀란 소천국과 소천국의 새로운 아내인 세명주 그리고 금백주는 놀라 달아나다 죽어 송당 세 마을의 당신이 된다. 그리고 그 자식들은 제주도 곳곳에 흩어져 마을신이 된다.
이것은 탐라국 건국신화인 을나신화와 비교해보면 소천국은 삼을나, 금백주는 벽랑국 공주와 놀랍도록 일치한다. 하지만 다른 점이 있다. 소천국과 금백주는 평온한 부부관계를 이어가지 않았다.
고조선이 중국 연나라에 밀려 평양으로 도읍을 옮긴 이후 철기문화에 영향을 받아 세습왕조가 만들어지면서 단군신화가 완성되었듯이 탐라건국신화는 탐라국 세 가문이 제주의 지배왕조가 되면서 완성하였을 것이다. 제주의 지배자가 된 그들은 자신들이 조화롭고 평화롭게 탐라국의 지배자란 것을 신화로 보여주고 싶었을 것이다. 탐라건국신화가 남성중심의 세습왕조가 만들어진 이후 완성되었다면 보다 더 진실에 가까운 것은 송당본향당 신화라고 볼 수 있다.
송당 본향당 신화는 본향당 본풀이라고 하는데, 본은 근본을 의미하고 풀이는 내력을 뜻한다. 따라서 본풀이란 신들의 내력으로 부족국가에서 우두머리를 신으로 형상화한 신들의 서사시라고 할 수 있다. 신화란 문자가 없던 시대의 역사기록이므로 본풀이란 탐라국 건국과정에 대한 역사이다.
탐라국 건국신화에선 남성인 삼을나기 주인공이다. 조선시대에 이것이 탐라국의 건국신화가 아니라 세가문의 시조설화인 삼성신화로 격하되면서 남성중심의 이야기로 더욱 굳어져갔다. 그에 비해 송당 본향당 신화의 주인공은 금백조이다. 금백조는 수렵부족의 추장이었던 남편 소천국을 설득해 농경문화를 정착시켰다.
신석기시대가 시작되자 여성들의 역할이 두드러졌다. 식물의 열매를 채집하는 역할을 하던 여성들은 오랜 시간 관찰을 통해 식물들이 나고 자라는 과정을 이해했고, 농경이 시작되었다. 물론 처음부터 대규모 농경이 이뤄진 것은 아니다. 주거지 부근 텃밭에 씨뿌리고 거두는 텃밭농사나 식물 군락지를 발견하여 그곳에서 채취해오는 소규모 농업이 대부분이었다. 이것만으로는 먹고 살 수가 없었기 때문에 여전히 남성들은 수렵에 몰두했다. 한라산을 배경으로 뛰노는 야생동물 사냥을 통해 식량을 구해오던 소천국이 제주 토박이들의 부족장으로서 신으로 모셔졌다.
사냥감은 들쑥날쑥 했기 때문에 차츰 여성들의 텃밭에서 나오는 안정된 식량이 중요해지기 시작했다. 학자들은 이때 경제권을 가진 여성중심의 모계사회가 펼쳐졌을 거라고 한다. 따라서 한해의 농사가 풍요롭기를 기원하는 여성중심의 제사의식이 차츰 발달했다. 농업기술을 습득하고 다양한 식물에 대한 지식이 풍부한 여성들이 마을의 우두머리, 즉 신으로 모셔졌고, 그녀가 금백조 즉 백주또이다.
백주또는 백주라고 하는 신을 의미하는데, 또는 ‘도’의 된소리이다. 도는 우두머리를 뜻하는 우리말이다. 목수 중에서도 우두머리 목수를 도편수라고 하고 이런 류의 단어는 도사공, 도원수 등 많다. 그러므로 부족장이었던 금백주가 나중에 신화로 표현되면서 신으로 불린 것이다.
그러나 보잘것없는 텃밭농사로는 18명의 아들과 28명의 딸을 먹여 살릴 수 없었다. 즉 불어나는 인구를 감당할 수 없었다.
이과정이 소천국과 금백주와의 갈등과정으로 적나라하게 표현되었다. 소천국은 감히 농사짓는데 가장 중요한 생산도구인 소를 잡아먹는 만행을 저지른다. 수렵부족의 추장인 소천국으로서는 다시 과거로의 회귀를 꿈꾼 것이다. 그러나 역사를 되돌릴 수는 없는 법이다. 금백조는 감히 별거를 감행한다. 다른 건국신화에서 남성들이 떠났다면 탐라국 건국신화에서는 금백조가 떠남으로써 새로운 시대로의 발전이 멈추지 않았던 것이다.
금백조에 의해 키워진 아들 궤네기가 소천국에 대항하였다가 추방당했지만 결국은 돌아와 탐라국을 건국한다. 만일 금백조가 소천국을 따라 수렵생활로 회귀에 동의했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다. 제주도 신화에선 그때가 서기 65년이라고 한다. 1세기 전후에 탐라국이 건국되었다고 하는 역사책의 서술과 같다. 그들에 대해서 중국의 역사서에선 주호라는 나라로 표현된다. 주호란 바다건너 오랑캐 마을이란 뜻으로 동굴에서 살고, 수렵과 소와 돼지를 키우는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삼한이나 삼국을 건설한 부족이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하는 것에 비해 탐라국의 건국자들은 땅에서 솟아났다고 한다. 제주에는 궤라고 불리는 동굴이 아주 많고 그곳은 오랫동안 제주에 살던 사람들의 주거지였다. 땅은 사람들의 안식처이면서 화산폭발에 대한 기억을 가진 제주인들은 거대한 힘은 하늘이 아니라 땅에 있다고 믿음으로써 만들어낸 독특한 신화이다. 신이란 결국 모든 힘의 원천에 대한 탐구가 낳은 결과이다. 그래서 과학이란 합리적인 신화학이라고 한다.
하늘은 하나이며 나눌 수 없지만 땅은 그렇지 않다. 제주로 이주해온 수많은 이주민들을 받아들여 탐라국을 건국하고 발전시킨 힘은 여기에서 나왔다.
고대국가 탐라국은 수렵으로도 소규모 농경으로도 만들어질 수 없었다. 보다 강력한 새로운 문명에 의해 가능했는데, 이 새로운 시대를 연 것이 궤네기이다. 이 위대한 영웅의 이야기는 다음편으로 ...
고진숙 작가
고진숙 작가는 용눈이오름 아래에서 태어나 제주 밖에서 바람처럼 살았다. 지금은 일 년의 절반을 제주에서 보내는 반서(울)반제(주)인이다. 역사동화 '이순신을 만든 사람들'을 시작으로 최근 '청소년을 위한 제주 4.3'까지 다양한 역사콘텐츠들을 쓴 고 작가. 올해부터 매월 세번째 월요일에 독자들과 만나는 [제주옛썰]은 고진숙 역사작가의 눈으로 제주가치를 재평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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