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일 오전 제주시 아스타호텔 3층에서 제주여성가족연구원과 제주4·3희생자유족부녀회가 공동으로 ‘제주4·3 여성유족 100인이 골암수다’ 포럼을 열고 있다. 사진은 100인 원탁회의를 거친 팀들이 발표를 하는 모습. (사진=조수진 기자)
8일 오전 제주시 아스타호텔 3층에서 제주여성가족연구원과 제주4·3희생자유족부녀회가 공동으로 ‘제주4·3 여성유족 100인이 골암수다’ 포럼을 열고 있다. 사진은 100인 원탁회의를 거친 팀들이 발표를 하는 모습. (사진=조수진 기자)

“4·3 때 우리가 살던 마을이 불에 타서 없어졌어요. 그러니까 우리 어머니가 아라리로 가서 애를 밴 몸으로 밤마다 매일같이 주춧돌 12개씩 날라서 쌓았어요. 마을을 새로 만드는 일을 한 거예요. 이건 꼭 사람들한테 고라줍서.”

“군인들이 와서 우리 마을에 와서 폭도 가족이라면서 부녀자들 10명을 모아놓고 총을 쏘려고 했어요. 그때 우리 어머니가 나를 업고 있었는데 군인이 ‘업은 애기를 던져라’ 소리 질렀대요. 그래도 어머니는 ‘나 죽으면 애기 키울 사람 없으니 우리 둘 다 죽여라’면서 끝까지 나를 업고 있었대요. 군인이 총알 10발을 쏜다고 하는데 마지막 한 발 소리가 안 들리더라는 거예요. 어머니가 눈을 떴더니 애기를 업고 있던 본인만 안 쐈구나 하는 걸 그제서야 알았다고 하대요.”

“저는 외가나 친척 모두 4·3 때 희생됐습니다. 그래서 집안 제사를 모두 제가 지내고 있어요. 제가 죽으면 저희 집 대가 끊어진다는 생각으로 살았습니다.” 

TV에서 4·3과 관련된 방송을 할 때 화면에 할머니(여성)들이 나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힘들었던 이야기하시겠구나’ 생각한다. 이처럼 4·3 역사를 말할 때 ‘여성’은 주로 비극적인 측면을 강조하거나 피해 사실을 극대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쓰여진다. 

70년이 넘게 지났지만 여전히 4·3에서 여성을 주체로 바라보는 시각은 드물다. 하지만 4·3을 거치며 파괴된 공동체를 다시 쌓아올린 장본인이 바로 여성들이다. 그들은 어떻게든 살아내고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지며 제주 공동체를 지켜왔다. 

이 여성들이 세계 여성의 날을 맞아 누구의 ‘엄마’, 누구의 ‘딸’, 누구의 ‘부인’, 누구의 ‘누이’가 아닌 오롯이 자신의 이야기를 말하는 자리가 마련됐다. 

8일 제주여성가족연구원과 제주4·3희생자유족부녀회가 공동으로 아스타호텔 3층에서 ‘제주4·3 여성유족 100인이 골암수다’ 포럼을 열었다. 
 

여성들의 목소리는 왜 배제됐나

이날 강경숙 전 제주여성가족연구원 연구위원이 ‘4·3 이후 제주 여성의 삶과 향후 과제’를 주제로 발표에 나섰다. 지난해 2월부터 11월까지 이뤄진 ‘근현대 제주여성구술사 I’ 연구(강경숙, 강은미, 염현주, 이해응, 이화진)를 중심으로 진행됐다.  

8일 오전 제주시 아스타호텔 3층에서 제주여성가족연구원과 제주4·3희생자유족부녀회가 공동으로 ‘제주4·3 여성유족 100인이 골암수다’ 포럼을 열었다. 강경숙 전 연구위원이 주제 발표를 하고 있다. (사진=조수진 기자)
8일 오전 제주시 아스타호텔 3층에서 제주여성가족연구원과 제주4·3희생자유족부녀회가 공동으로 ‘제주4·3 여성유족 100인이 골암수다’ 포럼을 열었다. 강경숙 전 연구위원이 주제 발표를 하고 있다. (사진=조수진 기자)

강 연구위원은 기존 4·3 연구 및 진상 규명 과정에서 여성의 경험과 기억이 주변화되고 있는 점을 지적했다. 

군사적 사건들은 공식적이고 사회적인 것으로 인정받은 반면 여성들의 자녀 양육이나 마을 재건을 위한 노동 과정은 조명을 받지 못했다는 것. 공동체를 복원하는 데 가장 크게 기여한 주체가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여성들은 일상적 경험을 증언한다는 특성상 중요한 증언자로 채택되기 어려웠다는 설명이다. 

게다가 냉전시기와 반공국가, 가부장적 사회 문화 속에서 여성들은 ‘속솜’할 수밖에 없었다. 

부계 혈통 중심인 호적 제도에서 남자 아이들은 양자 또는 어떤 방식으로라도 호적에 올랐지만 여자 아이는 그렇지 못했다. 이로 인해 4·3을 경험한 제주 여성들은 지금까지도 가족관계등록부(예전의 호적)에 제대로 등록되지 못한 경우가 많다. 

지난 2021년 제주4·3희생자유족회가 실시한 가족관계등록부 불일치 사례의 76.9%가 여성이라는 결과가 이를 방증한다. 

또 4·3 전후 태어나 호적에 오르지 못한 제주 여성들은 학교를 다니거나 취업을 할 때도 많은 제약이 뒤따랐다. 남자 형제를 학교에 보내기 위해 노동을 해야 했던 사회적 분위기도 여성들의 교육 기회를 차단했다. 학교를 다니지 못했거나 오래 다니지 못한 여성들은 일자리를 구할 때도 선택의 폭이 매우 좁다. 
 

4·3의 가치, 생명·돌봄·공동체로 확장해야

가족을 잃고, 삶의 터전을 잃고, 이웃을 잃은 제주 여성들이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8일 오전 제주시 아스타호텔 3층에서 제주여성가족연구원과 제주4·3희생자유족부녀회가 공동으로 ‘제주4·3 여성유족 100인이 골암수다’ 포럼을 열고 있다. (사진=조수진 기자)
8일 오전 제주시 아스타호텔 3층에서 제주여성가족연구원과 제주4·3희생자유족부녀회가 공동으로 ‘제주4·3 여성유족 100인이 골암수다’ 포럼을 열고 있다. (사진=조수진 기자)

강 연구위원은 “나치 강제 수용소 생존자이자 연구자인 빅터 플랭클은 ‘살아야 하는 이유를 아는 사람은 그 어떤 상황도 견뎌낼 수 있다’고 했다”며 “4·3에서 살아남은 제주 여성들이 살아갈 수 있었던 이유는 '살아야 하는 이유'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인간과 생명에 대한 존중, 사랑에서 비롯된다”고 설명했다. 

그는 발표를 마무리하며 “구술자 중 한 분의 말씀을 전하고 싶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실 때 ‘난 한마디도 못했지만 너는 말을 하고 죽어라’고 유언을 남기셨다고 한다”며 “4·3 희생자와 유족들이, 여성은 물론이고 누구든 배제되는 이들 없이 모두가 안전하게 말할 수 있는 성숙한 사회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 치유에까지 이를 수 있다”고 피력했다. 

또 4·3 역사의 의미와 가치를 ‘인권’과 ‘평화’를 넘어 ‘생명’, ‘돌봄’, ‘공동체’로 확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100명의 제주 여성이 말하는 4·3

주제발표 이후 10개의 테이블에서 4·3을 겪은 제주 여성 100인의 원탁회의가 이어졌다. 

각 팀에선 ‘4·3은 나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4·3과 여성의 삶에 대해 후세대에게 남기고 싶은 이야기’ 등을 주제로 대화 시간이 이뤄졌다. 

8일 오전 제주시 아스타호텔 3층에서 제주여성가족연구원과 제주4·3희생자유족부녀회가 공동으로 ‘제주4·3 여성유족 100인이 골암수다’ 포럼을 열고 있다. (사진=조수진 기자)
8일 오전 제주시 아스타호텔 3층에서 제주여성가족연구원과 제주4·3희생자유족부녀회가 공동으로 ‘제주4·3 여성유족 100인이 골암수다’ 포럼을 열고 있다. (사진=조수진 기자)

그런데 시작하고 몇 분이 지나도록 회의장은 조용했다. 어떤 여성은 열 장은 되어보이는 A4 종이를 만지작거리기만 했다. 글씨가 빼곡하게 쓰인 출력물이었다. 각 팀에 배정된 연구원들이 입을 닫고 있는 여성들의 이야기를 이끌어내기 위해 발언 순서를 정하고 독려를 했다. 

5분 정도가 지났을까. 여성들이 어렵게 말문을 열기 시작했다. 옆 사람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들이었다. 한 사람의 사연을 듣던 다른 여성들은 그제서야 맞장구도 치고 눈물도 흘리며 말을 시작했다. 한 여성이 “어머니와 둘이서 정말 어렵게 살았다. 나같이 살아온 사람이 있을까”라고 하면 다른 여성이 “나는 부모도 없이 동생들 키우면서 소 먹이면서 살았다”고 받으면 또 다른 여성이 “나는 부모, 형제 아무도 없이 나혼자 큰집에서 애기업개하면서 눈치 보며 살았다”고 하면 또 다른 여성이 “나는 친척도 다 죽고 나만 살아남았다”는. 이런 식이었다. 

다른 이의 아픔에 공감하면서 내 아픔을 털어놓고 그렇게 서로를 위로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제대로 이야기가 나올 수 있을까 했던 걱정은 기우였다. 토론 시간을 훨씬 넘기고도 여성들은 이야기를 끊지 못했다. 70년 넘게 묻어둔 세월이었고 어떻게든 이어온 삶이었다. 
 

8일 오전 제주시 아스타호텔 3층에서 제주여성가족연구원과 제주4·3희생자유족부녀회가 공동으로 ‘제주4·3 여성유족 100인이 골암수다’ 포럼을 열고 있다. (사진=조수진 기자)
8일 오전 제주시 아스타호텔 3층에서 제주여성가족연구원과 제주4·3희생자유족부녀회가 공동으로 ‘제주4·3 여성유족 100인이 골암수다’ 포럼을 열고 있다. 100인의 원탁회의에서 나온 이야기 키워드들을 메모지에 정리하고 있다. (사진=조수진 기자)


제주 공동체 복원의 주인공들

“다음에 또 이런 거(행사) 하게 되면 그땐 잘 말할게요”

A4 종이 열 장 빼곡히 해야할 말들을 출력해온 여성은 못내 아쉬워했다. 그는 “이렇게 말하게 하는 시간이 있으니 너무 좋다. 너무 잘됐다”라며 “이번 말고 또 (말할)기회가 없는 건 아니죠”라고 묻기도 했다. 

8일 오전 제주시 아스타호텔 3층에서 제주여성가족연구원과 제주4·3희생자유족부녀회가 공동으로 ‘제주4·3 여성유족 100인이 골암수다’ 포럼을 열고 있다. (사진=조수진 기자)
8일 오전 제주시 아스타호텔 3층에서 제주여성가족연구원과 제주4·3희생자유족부녀회가 공동으로 ‘제주4·3 여성유족 100인이 골암수다’ 포럼을 열고 있다. (사진=조수진 기자)

이날 원탁회의에선 지금까지 4·3의 역사에서 숨겨졌던 ‘여성’들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자식과 함께 살아남기 위해 총 앞에서도 당당히 맞선 여성, 임신한 몸으로 몇 달을 매일밤 주춧돌을 직접 날라 마을을 세운 여성, 가족과 친척이 모두 희생 당했으나 홀로 70년을 넘게 살아남아 집안 제사를 챙기며 대를 이은 여성. 

이 여성들이 다음 세대들에게 전하고 싶은 이야기로는 “전쟁이나 싸움 없이 편안한 마음을 가지고 서로 돕는 사회, 우리가 제사떡 나누는 그 모습 그대로 전하고 싶다”, “그저 평화를 바란다”, “오늘 나왔던 이야기들을 그대로 알리고 싶다”, “눈이 터지도록 노력하면서 사니까 살아졌다” 등이 있었다. 

그중에서도 의외였던 답이 있었다. 많은 여성들이 “근검절약하며 살라”는 말을 전하고 싶다는 것. 일상에서 부모로부터 들을법한 ‘잔소리’를 굳이 다음 세대에게 꼭 전하고 싶은 이야기로 꼽은 이유는 무엇일까. 

그들은 자신들이 먹을 게 없어 배곯았던 경험, 몸 누일 방 한 칸 없었던 경험, 공부를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한 경험 등 춥고 배고프고 서러웠던 경험을 물려주고 싶지 않아서가 아닐까. 

여성이 4·3의 주체로 나서는 일은 이제 시작이다. 강 연구위원의 말처럼 그들의 이야기는 4·3을 입체적으로 만들고 나아가 4·3에 제대로 된 이름을 붙이는 과정에 반드시 필요한 기억이다. 

김종민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위원회 위원은 지난해 한 직권재심 선고 공판 자리에서 “저를 가장 기쁘게 하는 건 유족분들 집에 들어갔을 때 거실에 팔순 잔치 같은 자리에서 자식들과 손주들 다 모아놓고 기념촬영한 사진이 걸려있을 때”라며 “열 살도 안 된 어린아이들이 어떻게 그 세월을 견뎌왔는지 상상조차 가지 않는다. 그분들이 살아남아서 아름다운 제주 공동체를 복원해냈다. 굉장히 기적적인 일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다소 늦었지만 공동체 복원의 주인공들, 제주 여성들이 조명 받아야 할 때다.

8일 오전 제주시 아스타호텔 3층에서 제주여성가족연구원과 제주4·3희생자유족부녀회가 공동으로 ‘제주4·3 여성유족 100인이 골암수다’ 포럼을 열고 있다. (사진=조수진 기자)
8일 오전 제주시 아스타호텔 3층에서 제주여성가족연구원과 제주4·3희생자유족부녀회가 공동으로 ‘제주4·3 여성유족 100인이 골암수다’ 포럼을 열고 있다. (사진=조수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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