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평화공원을 찾은 어르신이 홀로 4·3추념식장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고 있다.(사진=김재훈 기자)
4·3평화공원을 찾은 어르신이 홀로 4·3추념식장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고 있다.(사진=김재훈 기자)

제75주년 제주4·3 추념식이 3일 오전 10시부터 제주4.3평화공원에서 열렸다. 경건히 지내야 할 추념일이지만 보수 우익 세력이 왜곡과 폄하로 일관된 '4·3흔들기'에 나서면서 얼룩졌다. 굳이 추념일에 제주를 찾아온 보수 우익 세력이 4·3평화공원에 이르는 길목에서 집회를 열었다. 괴성을 내질렀다. 괴성에 놀라 가까이 가보니 그들은 4·3희생자 추념과 아무 관계없는 “문재인 사형” 등의 구호를 외치며 유족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딱, ‘제사상’을 걷어차려는 심사였다.

그들이 ‘인간 미만’의 몰지각한 발언들을 토해냈지만 경찰은 신고된 집회라면서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이에 4·3유족청년회 등이 적극적으로 항의했다. 4·3 당시 잔혹한 양민 학살에 앞장 섰던 서북청년단을 경험한 유족들은 그들을 ‘인간의 머리 가죽을 뒤집어 쓴 짐승’으로 기억하며 몸서리를 친다. 괴성을 내지르는 보수 우익 세력의 얼굴에 당시 서북청년단의 얼굴이 비쳤다.

그래도 평화기념공원에는 햇살이 들었다. 벚꽃잎이 바람에 날렸다. 나이가 지긋한 유족들은 해가 갈수록 조금씩 무거워지는 다리로 추념식장을 찾았다. 주로 가족 혹은 동네 지인과 함께였다. 홀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는 어르신도 있었다. 유족들은 그리운 어머니, 아버지의 이름이 새겨진 각명비에 앞에서 머리를 숙였다. 위패 봉안실에 봉안된 이름을 물끄러미 올려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한 4·3 유족이 위패봉안실에서 가족의 이름을 바라보고 있다.(사진=김재훈 기자)
한 4·3 유족이 위패봉안실에서 가족의 이름을 바라보고 있다.(사진=김재훈 기자)
4·3 유족이 행방불명된 희생자의 이름을 새긴 각명비 앞에서 절을 올리고 있다.(사진=김재훈 기자)
4·3 유족이 행방불명된 희생자의 이름을 새긴 각명비 앞에서 절을 올리고 있다.(사진=김재훈 기자)

행방불명인 묘역을 찾은 유족은 젖은 수건으로 사람의 얼굴을 씻듯 비석을 말끔하게 닦았다. “앞으로 내가 안 오면 더 이상 찾는 사람이 없을 거야”고 말하는 유족이 있었다. 형제가 어린 나이에 죽었다. 까마귀들이 바람을 타고 공중으로 떠올랐다. 다시 내려와 각명비 위에 앉았다.

최근 4.3유족회 및 관련 단체와 제주도는 4·3의 진실을 파악하는 데 도움을 준 기록물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4·3의 전국화’에 이어 ‘4·3의 세계화’로 한 발 나아가겠다는 취지다. 이날 추념식에서도 이와 관련된 메시지가 나왔다. 앞서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5.18광주민주화운동의 사례가 있다.

한편으로는 4·3기록물의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하는 것 자체가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미국의 책임 규명에 대해서는 진척이 이뤄지지 않는 상황에서, 세계기록유산 등재만으로는 ‘4.3의 세계화’를 말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보수 우익 세력이 추념식까지 찾아와 4·3을 왜곡하고 폄하하려는 의지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가운데, 현 ‘4·3운동’의 보폭을 아쉬워 하는 목소리도 들린다. 홀로 4·3평화공원을 찾는 어르신들이 함께 발을 맞춰 걸을 수 있는 정도로 여유 있는 속도로, 동시에 75년 전의 기억이 흩어지는 만큼 빠른 속도로 걸어갈 필요가 있겠다.

그 두 속도는 사실 같은 속도일 것이다. 해방 후 77년이 지나도 녹지 않는 이념의 동토에 봄꽃들이 피어나며 북상하는 속도. 한반도 끝까지 봄꽃이 번지는 속도. 75년여 전에 목숨을 잃은 가족의 이름을 찾아 걸음을 옮기는 어르신이 바로 그 속도로 걷고 있었다.

4·3을 경험한 유족들에게 어떤 기억을 갖고 있는지 매년 이야기를 청해 듣고 있지만, 매번 쉬운 일은 아니라고 느낀다. 추념식장을 향해 걷는 어르신들이 자주 멈춰 쉬는 모습을 보면서 그들의 목소리를 들을 날도 아주 많이 남아 있지는 않다는 생각이 든다. 20여년의 시간이 더 흐른 뒤의 4·3추념식은 어떤 모습일까. 20년, 그리 길지만은 않은 시간이다. 그때 4·3추념식이 어떤 모습을 갖도록 해야 할지 고민해 나가야 할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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