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부장제. (사진=픽사베이)
가부장제. (사진=픽사베이)

“언제까지 성평등 이야기 할 거야? 우리집은 이미 남녀가 평등한데?”

소소한 모임 자리에서 ‘성평등’이 주제로 떠오르면 심심찮게 듣는 얘기다. 목소리에는 불만이 섞여 있다. 어떤 근거로 말하는지도 모르겠고, 어디서부터 따져가며 말을 해야할 지 난감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설거지‧쓰레기 분리수거 몇 번 하고, 월급 통장을 아내에게 맡기는 것을 성평등이라 생각하는 걸까? 사회적 약자에 대한 생각이 그 사회의 인권지수를 보여주는 바로미터라고 한다면, 혹시 여성은 사회적 약자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닌지 하는 의문이 들 정도다.  

#. 한국의 여성대표성, 세계 146개국 중 125위

2022년, 세계경제포럼(WEF)의 '성 격차 지수(Global Gender Gap Index·GGI)' 국가별 순위에서 한국은 세계 146개국 중 하위권인 99위를 기록했다. 특히 국회의원·고위직·관리직 여성 비율은 세계 125위에 그친다. 이는 한국사회에서 여성들이 의사결정과정에서 구조적으로 배제되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따라서 민주적인 의사결정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여성대표성 문제는 가장 절실하고 중요한 성평등 과제라 할 수 있다. 

제주여민회는 2017년 ‘제주여성 100인 원탁회의’를 벌였다. (사진=강은미 제공)
제주여민회는 2017년 ‘제주여성 100인 원탁회의’를 벌였다. (사진=강은미 제공)

#. 마을 여성대표성을 위한 성평등마을규약 표준안 마련한 제주여민회

제주여민회는 2017년 제주도에 여성정책 제언을 목표로 ‘제주여성 100인 원탁회의’를 실시했다. 그 결과, 최우선 해결 과제로 ‘여성대표성 강화’가 꼽혔다. 원탁회의에 참여한 100인의 여성이 토론해 도출해낸 결과로 기업, 마을, 학교, 행정조직 등의 의사결정구조에 있어 여성의 참여율을 높여야 한다는 제언이었다.

이의 결과를 안고 제주여민회는 제주여성의 삶의 표본이라 할 수 있는 ‘마을에서의 여성 대표성’을 들여다보기로 했다. 2018년에는 20개(애월읍 12개 리, 조천읍 8개 리) 마을을 대상으로 마을 여성대표성 실태를 조사했다.

2019년에는 ‘성평등 마을 규약 제주여성이 만들다’를 기치로 성평등마을규약 표준조항 마련 및 공론화 사업을 진행했다. 이 과정에서 마을에 기반을 둔 제주여성농민회에 협조를 요청하고, 적극 결합해 읍면 지역의 마을규약 개정 사업을 시작하게 됐다.

성평등한 마을의 지표는 의사결정권에 있어 성별격차가 어느 정도인가 하는 문제다. 2023년 현재까지 제주도의 172개 마을 중 여성 이장은 5명(애월읍 애월리, 대정읍 동일2리, 한경면 금능리, 한립읍 대림리, 한림읍 귀덕3리)에 불과하다.

마을 운영위원회 성원 중에 여성은 부녀회장 정도며, 마을총회에 참여해 의사결정 권한을 갖는 선거권은 1가구 1표제가 대부분이다. 현실적으로 가족을 대표하는 남성이 투표권을 갖는 격이다. 마을 운영에 있어 여성의 의사결정 참여는 아주 미미한 수준에 머무르고 있었다.

이러한 현실을 목도하면서 2019년부터 2021년까지 제주여민회와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제주특별자치도연합(이하 제주여성농민회)은 ‘성평등마을규약만들기’ 사업을 벌였다. 그 과정은 지난했지만, 반짝이는 성과를 냈다.

(사진=강은미 제공)
제주여민회는 2019년 성평등마을규약 표준조항 마련 및 공론화 사업을 진행했다. (사진=강은미 제공)

#. 전국 최초 성평등마을규약으로 개정한 마을, 신도3리

2020년 1월, 신도3리마을회는 총회를 거쳐 전국 최초로 성평등 마을규약으로 개정한다. 개정된 마을규약의 내용에는 ‘개발위원회’의 명칭을 ‘운영위원회’로 바꿨다. ‘운영위원회 정족수 중 여성 비율을 30%인 5명의 여성으로 한다’는 내용도 포함했다. 기존의 신도3리 마을규약은 1972년 새마을운동 규약(안)이 수정 없이 그대로 2020년까지 남아 있었다. 

마을규약이 있는지도 몰랐던 여성들은 사업에 참여하면서 처음으로 마을규약을 읽어보면서 충격적이었다고 고백했다. 예를 들어보자. 기존 신도3리 마을규약 주민의무 제5조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겨 있다.

(...) 본 리에 거주하는 모든 주민은 다음 사항을 지키고 실천한다.                                  

1. 검소한 생활과 가정의례 준칙을 지킨다. 

2. 도박과 미신을 타파하고 명랑하고 부지런한 생활을 한다.

3. 마을 환경을 아름답게 가꾸고 향토문화재를 보호한다.(...)

개정안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포함됐다.

- 연령‧성별 등에 따라 차별이 발생하지 않도록 서로 배려하고 존중한다.                       

- 마을 내 인권문제(가정폭력, 아동학대, 노인학대, 성폭력 등)발생 시 주민 누구나 적극적으로 피해자 보호조치를 시행한다.

#. 관건은 마을 운영 리더의 성평등의식

이 마을이 전국 최초로 성평등마을규약으로 개정할 수 있었던 데는 당시 고봉희 신도3리 마을이장 부부의 공이 컸다. 고봉희 이장의 아내 현진희씨는 현재 전여농제주도연합 정책위원장이기도 하다. 평소에 성평등의식이 투철했던 그는 남편인 이장을 설득해 적극적으로 이 사업을 추진하도록 권했다고 한다. 남녀가 평등한 마을규약을 만들기 위해서는 마을이장의 성평등의식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게 진희씨의 생각이다.

 “2019년부터 성평등마을규약만들기 사업을 시작했는데, 우리 마을이 전국 최초로 성과를 거뒀어요. 이장의 도움이 없으면 이 사업은 정말 힘들어요. 마을을 찾아가서 이장이나 부녀회장을 만나도 참여를 두려워해요. 마을 사람들을 설득하기 힘들 거든요. 

우선 이장님들 성평등의식 교육이 제일 중요한 것 같아요. 제가 속해 있는 제주여농의 힘으로는 역부족이다는 걸 많이 느꼈어요. 도에서 읍장, 면장, 이장들 설득을 시켜줘야 가능하지요. 그래도 우리 마을은 운영위원회에 여성비율을 30%라도 참여하게 했는데, 정말 잘한 일이지요. 선거권도 1인 1투표제로 바뀌었구요. 한 가지 아쉬운 건 부녀회 명칭을 여성회로 개정했어야 했는데, 그걸 못했죠.”

신도3리의 성과를 본 다른 마을들도 성평등마을규약 만들기 시작했다. 코로나19 여파로 마을총회가 원활하게 진행되지 못하면서 속도가 나진 못했다. 열악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제주여성농민회 회원이 속한 마을에서는 상황을 헤쳐 나갔다. 그렇게 신도3리 뿐만 아니라 신산리, 신도1리, 동일2리, 금악리 등 5개 마을에서 성평등 마을규약이 만들어졌다. 

전여농제주도연합 정책위원장 현진희씨. (사진=강은미 제공)
전여농제주도연합 정책위원장 현진희씨. (사진=강은미 제공)

특히 올해 1월, 금악리 마을은 총회를 거쳐 성평등 마을규약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마을운영위원회에 여성 비율을 50%로 확정한 것이다. 고무적인 성과다.

'30%, 50% 등 여성위원 비율이 뭐 중요하느냐'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마을운영에 있어 성별 비율의 의미는 매우 크다. 실제로 마을 사업을 결정하고, 운영하고, 추진하는 데 있어서 성별 의식 차이가 크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마을주민의 복지 증진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논의하는 데 있어서도 성별에 따라 마을회관 증축과 마을화합 문화프로그램 활성화로 의견이 나뉜다. 결국 마을의 구체적인 사업 결정, 추진 과정에 있어 좀 더 평등하고 민주적인 결정이 이루어지려면 성비를 맞추는 게 합리적이다.

“지금까지 마을에서 부녀회는 마을행사나 총회할 때 음식이나 만들고 하는 사람이었지, 의견을 낼 수 있는 사람은 아니었지요. 온갖 허드렛일은 다 하지만 중요한 일을 결정할 때는 남성들이 다 결정했지요.”

마을 일에 있어 온갖 허드렛일은 다 했으면서도 정당한 인정을 받지 못한 여성들. 의사결정에도 참여하지 못했던 여성들. 이들은 부녀회를 중심으로 전담조직(TF)를 구성한 후, 기존 마을규약을 검토하고 개발위원들과 논의하는 과정을 거쳤다.

하지만 새로운 규약을 만들려고 하니 그 또한 쉬운 일은 아니었다. 대부분 남성들이었던 개발위원들은 마을규약 개정에 호의적이지 않았고, 성인지감수성도 낮았다. '굳이 몇 글자 바꾸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따지는 식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을총회에서 성평등마을규약 개정에 성공했다.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도 부녀회 회원들이 뜻을 굽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개정안에 대해 마을주민 일부의 부정적인 의견도 만만찮다. '여성들이 날뛴다'는 등 마을 내 비하적 발언도 심심찮게 들린다.

어렵게 이룬 일이다. 그만큼 조심스럽게 반응할 수밖에 없다. 씁쓸하다. 이 모습이 제주 여성의 현주소다. 

(사진=강은미 제공)
(사진=강은미 제공)

#. 제주도, 성평등 정책 추진체계 강화 시급

5개 마을의 성평등마을규약 개정은 물론 큰 성과다. 물론 사업 추진 및 실행에 있어 마을에 기반을 둔 제주여농회가 주체로 참여한 공이 크다. 마을에 기반을 둔 여농의 노력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역량의 총동원에도 불구하고 아직 갈 길이 멀다고 느낀다. 이같이 성평등규약이 만들어진 마을들은 172개 도내 전체 마을의 3%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제주도는 제주형 양성평등정책 세 번째 프로젝트, ‘성평등 빛나는 제주’를 선포했다. 정책과제 6대 전략 중에 성평등정책 추진체계 강화 세부과제로 ‘여성대표성 강화’가 포함됐다.

현실화 되기 위해서는 ‘성평등마을규약만들기’의 성과를 확대재생산 할 수 있는 구체적인 안이 나와야 한다. 민관 거버넌스 운영 활성화를 빠른 시일 내에 구축하고, 이를 기반으로 구체적 대안이 모색되고 실행되는 것이 그 첫걸음이 될 것이다. 

제주에서 나고 자랐습니다. 어려서부터 기록하는 것을 좋아하다 보니 시인이 되었고, 글쓰기 강사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개인 또는 시대를 기록하는 것은 특별한 사람만의 몫은 아닙니다. 아무도 기록하지 않는 것은 존재했으나 존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제주, 그리고 여성의 목소리를 기록하고 싶었습니다. 아주 것도 정해지지 않은 백지의 상태에서 누구의 목소리부터 들어봐야 할지 고민해보려 합니다. 

저작권자 © 제주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AI학습 및 활용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