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무장봉기가 1948년에 있었죠. 그래서 시기적으로는 (항일)독립운동과 무관하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내적으로, 또 그 심층에는 이 둘을 아우르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지난 27일 오후 제주사회적경제지원센터 1층 몬딱가공소에서 노무현재단 제주위원회와 제주투데이가 공동 주최한 ‘2023 노무현시민학교 6강’이 열렸다.
임경석 성균관대학교 사학과 교수가 ‘제주4·3과 독립운동’을 주제로 일제강점기 조선에서 일어난 독립운동의 양상을 설명하고 4·3과의 공통점에 대해 강연했다.
임 교수는 본격적인 강의에 앞서 “‘독립’이란 표현은 역사적 맥락에 따라 다양하게 쓰일 수 있지만 어느 경우든 국가 주권의 소재라는 의미를 가진다”며 “특정 세력으로부터 분리되거나 의존 또는 예속으로부터 자립을 뜻한다”고 설명했다.
M자형을 그리는 항일독립운동의 흐름
그에 따르면 항일운동은 세 번의 고조기가 있었다. 의병운동(1907~1909년)과 3·1운동(1919~1921년), 공황기 민중운동(1930~1932년) 등이다.
세 운동 모두 한반도를 침탈한 일본제국 세력을 전복하기 위해 민중 다수가 합법 및 비합법적 수단을 사용해 행동에 나선 혁명적 정세를 보였다. 또 대중 정치운동으로서의 고조와 퇴조, 무장투쟁으로서의 고조와 퇴조 등 흐름이 두 개의 봉우리를 가진 M자형 곡선을 그린다.
우선 의병운동의 경우 1905년 일본이 대한제국을 강압해 을사늑약을 체결하자 이에 저항하는 움직임에서 시작했다. 향후 일제강점기 항일 독립운동의 기반이 됐다. 교전횟수와 교전 의병수의 추이를 보면 1907년부터 대중 정치투쟁으로 고양되다가 1908년 최고조기를 찍는다. 이후 1909년부터 운동세력이 약화한다.
3·1운동은 일제강점기였던 1919년 3월 전국적인 대중 만세시위로 고조에 이르렀다. 3·1운동은 초반엔 민족대표 33인에 의해 주도됐지만 이후 서울 지역 학생들의 비밀운동을 중심으로 이어졌다. 그 다음으로는 농민들이 운동의 주체가 되면서 전국을 휩쓰는 거대한 격동으로 확산됐다.
이 운동은 비폭력 평화 시위 형태로 진행됐다. 하지만 일본군이 2개 사단 병력을 조선 전 지역에 배치해 실탄 사격으로 대응하는 등 강경한 탄압이 이뤄지자 6월에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1921년과 1922년 사이에 독립군의 무장 투쟁 방식으로 항일운동이 이어지지만 내부 분열로 또다시 퇴조기를 맞는다.
다음으로 1929년 대공황 시대에 접어들자 민생이 극도로 어려워졌다. 민중의 불만은 일제 체제에 대한 저항으로 이어졌다. 그해 11월 광주 지역 학생들이 항일 독립운동을 주도, 전조선학생운동으로 발전했다. 3·1운동과 비교해 더 많은 학생들이 참여하는 대중운동이었지만 농민의 참여는 저조했다. 이 때문에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하는 데엔 한계가 있었다.
1931년 9월 일본이 식민지를 확장하기 위해 만주를 침략하고 1932년 만주국이 들어섰다. 이때 북간도에서 무장투쟁 형태의 항일 독립운동이 일어났다. 하지만 ‘일국일당’의 원칙에 따라 이 운동은 중국공산당 지도 아래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북간도 항일무장투쟁은 조선 지역까지 이어지지 못하고 약화됐다.
4·3은 독립운동의 역사를 재현한다
임 교수는 “거시적으로 봤을 때 제주4·3은 독립운동의 역사를 재현한다”고 강조했다. 4·3이 혁명적 고조기 현상을 띠고 있다는 것.
그 근거로 첫째로 광범위한 대중 운동이 무장투쟁으로 전환한 점을 들었다. 항일 독립운동이 학생과 농민, 민중을 중심으로 한 전국적인 대중운동으로 진행된 것처럼 4·3 역시 1947년 3·10총파업이라는 전도(全島)적인 대중운동으로 나타났다.
둘째로 국가권력의 소재와 향방을 둘러싼 갈등이라는 데 공통점이 있다. 독립운동은 일제로부터 조선의 주권을 되찾겠다는 운동이었고 4·3은 (미군 또는 단독정부가 아닌)남북의 통일된 주권을 이 나라에 세우겠다는 운동이었다.
셋째로 탄압과 대규모의 희생이 뒤따랐다는 점이다. 독립운동의 경우 비폭력 평화시위에 대해서도 일제가 실탄으로 민중을 학살했다. 4·3 역시 미군정과 남한 단독정부의 공권력(우익단체 포함)으로부터 강경한 탄압이 있었고 대규모 학살이 이어졌다.
다만 독립운동과 4·3 간 직접적인 연관성에 대해선 관련 연구가 부족하다며 말을 아꼈다. 임 교수는 “4·3에 참가했던 사람이 일제 시대 독립운동과 얼마나 연관이 있느냐에 대해선 충분히 연구가 이뤄지지 않았다고 본다”며 “일본이 항복을 선언한 1945년에 가까울수록 독립운동과 관련된 정보가 적다. 이 때문에 해방 직전 조선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에 대한 연구가 미진한 상태”라고 아쉬워했다.
이어 “여전히 민족 분단이라는 해결되지 않은 한국의 역사적 문제와 관련해 독립운동과 4·3은 동일한 본질을 가지고 있다”며 “거시적으로 볼 때 이 둘을 아우르는 시선을 확보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관점에서 강연을 준비했다”고 설명했다.
한편 임경석 교수는 한국 근대사를 전공했고 조선총독부 고등경찰 기록과 구 코뮌테른 문서보관소 한국 관련 자료를 비교·검토하는 연구에 힘을 기울이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한국 사회주의의 기원> (2003), <이정 박헌영 일대기> (2004), <잊을 수 없는 혁명가들에 대한 기록> (2008), <모스크바 밀사> (2012), <독립운동 열전> (전2권, 2022), <역사논문 작성법> (2023) 등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