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대학교 일반대학원 4·3융합전공에 참여하는 교수와 대학원생들은 지난달 13일부터 21일까지 ‘사회적 기억과 서사, 그리고 인권’ 주제로 독일 베를린 답사를 진행했다. <제주투데이>는 3차례에 걸쳐 답사 관련 기록을 연재한다. 

지난달 13일 제주대학교 일반대학원 4·3융합전공에 참여하는 교수와 대학원생들은 독일 베를린 학살된 유럽 유대인을 위한 추모지를 찾았다. (사진=조수진 기자)
지난달 13일 제주대학교 일반대학원 4·3융합전공에 참여하는 교수와 대학원생들은 독일 베를린 학살된 유럽 유대인을 위한 추모지를 찾았다. (사진=조수진 기자)

지난달 13일 오전 가을비가 내리던 독일 베를린. 브란덴부르크 문에서 남쪽으로 5분가량 걸어가자 수천 개의 검은 비석들이 죽 늘어선 장관이 펼쳐졌다. 마치 시멘트 관들이 모여있는 공동묘지 같아보이기도 하는 이곳은 학살된 유럽 유대인을 위한 추모지(Denkmal für die ermordeten Juden Europas·Memorial to the Murdered Jews of Europe)다. 

1만9073㎡(약 5700여평)에 이르는 부지의 지상에는 콘크리트 비석 2711개가 격자 모양으로 세워져 있다. 이 비석은 가로 95㎝, 세로 2.38m이며(관의 그것과 비슷하다) 높이는 겨우 정강이 높이 정도인 것에서부터 4.7m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비석과 비석 간 간격은 95㎝라서 한쪽 팔을 다 펴지 못할 정도의 폭으로 한 사람만 겨우 지나다닐 수 있다. 

지난달 13일 제주대학교 일반대학원 4·3융합전공에 참여하는 교수와 대학원생들은 독일 베를린 학살된 유럽 유대인을 위한 추모지를 찾았다. (사진=고영구 제공)
지난달 13일 제주대학교 일반대학원 4·3융합전공에 참여하는 교수와 대학원생들은 독일 베를린 학살된 유럽 유대인을 위한 추모지를 찾았다. (사진=고영구 제공)

비석 위에는 새겨진 글이나 그림이 없어 누구를 위한 것인지 알 수 없다. 비에 젖은 노란 낙엽만이 주위에 쌓여있다. 마치 독일 나치 정권 아래서 행해진 홀로코스트에서 죽임을 당한 사람들의 이름이나 나이, 고향, 생애가 학살자에게 전혀 중요하지 않았던 것처럼. 이곳은 익명의 집단 죽음을 상상하게 한다. ‘나’라는 존재는 철저히 지워지고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죽임을 당했던 무참함을 떠올리게 한다. 

미로 같기도 한 비석들 사이로 몸을 들여놓자 공동묘지처럼 보였던 곳은 전혀 다른 공간으로 변했다. 좁은 통로 안으로 들어갈수록 바닥이 점차 낮아지면서 나를 둘러싼 비석들은 점차 높은 기둥이 되어간다. 공간이 주는 위화감에 압도되어 얼른 여기서 빠져나가야겠다는 생각에 발걸음은 빨라진다. 

지난달 13일 제주대학교 일반대학원 4·3융합전공에 참여하는 교수와 대학원생들은 독일 베를린 학살된 유럽 유대인을 위한 추모지를 찾았다. (사진=조수진 기자)
지난달 13일 제주대학교 일반대학원 4·3융합전공에 참여하는 교수와 대학원생들은 독일 베를린 학살된 유럽 유대인을 위한 추모지를 찾았다. (사진=조수진 기자)

숨바꼭질을 하는 아이를 놀래키기 위해 어른들이 내는 “워!”하는 소리들이 울리면서 이곳저곳에서 폭탄 터지듯 들린다. 예상치 못한 순간에 옆 기둥에서 튀어나오는 사람들과 마주치는 일이 반복되자 블록 하나하나를 지날수록 긴장은 높아진다. 숨을 돌리기 위해 올려다본 하늘은 돌 기둥에 잘려 나갔다.

들어가는 입구도, 나가는 출구도, 정해진 동선도 없다. 눈앞 저 끝에 간신히 보이는 풍경으로 내 위치를 가늠할 수밖에 없다. 이름 모를 죽음들에 둘러싸여 있지만 절대 그들이 내는 목소리를 들을 수 없고 그들의 공포를 실감할 수 없을 것이라는 절망에 다시 한 번 길을 잃게 된다. 

지난달 13일 제주대학교 일반대학원 4·3융합전공에 참여하는 교수와 대학원생들은 독일 베를린 학살된 유럽 유대인을 위한 추모지를 찾았다. (사진=조수진 기자)
지난달 13일 제주대학교 일반대학원 4·3융합전공에 참여하는 교수와 대학원생들은 독일 베를린 학살된 유럽 유대인을 위한 추모지를 찾았다. (사진=조수진 기자)

한국에서 추모 공간이라고 하면 ‘슬픔’과 ‘아픔’의 감정이 으레 떠오르지만 이곳은 그보다는 ‘불편함’과 ‘불안’, ‘공포’ 등의 감정을 일으킨다. 

이 공간을 설계한 미국 건축가 피터 아이젠만(Peter Eisenman)은 “하나의 체계로 보이는 것 속에 내재한 불안전성과 시간 속에 소멸되는 것에 대한 잠재적인 가치를 보여주고자 했다. 이는 모든 폐쇄된 질서로 이루어진 닫힌 체계는 실패하게 된다는 개념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지난달 13일 제주대학교 일반대학원 4·3융합전공에 참여하는 교수와 대학원생들은 독일 베를린 학살된 유럽 유대인을 위한 추모지를 찾았다. (사진=조수진 기자)
지난달 13일 제주대학교 일반대학원 4·3융합전공에 참여하는 교수와 대학원생들은 독일 베를린 학살된 유럽 유대인을 위한 추모지를 찾았다. (사진=조수진 기자)

독일 내 학살된 유대인을 위한 추모 공간을 만들어야 한다는 논의는 1988년 한 언론인이 제안한 토론회에서 시작했다. 이후 세계 각국의 저명한 건축가들과 조각가들이 참여하는 공모를 거쳐 지금의 디자인이 선정됐다. 다만 2700여개의 조형물들이 지나치게 추상적이고 학살된 유대인들의 구체적인 역사가 드러나지 않는다는 비판이 있어 추후 지하에 전시관을 설립하는 계획이 추가됐다. 2000년 초 현재 부지에서 첫 삽을 뜨고 2005년 5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60년 만에 추모지가 문을 열었다. 

추모지가 조성된 이곳은 유대인을 학살한 역사와는 직접적인 관련은 없다. 현재는 각국의 대사관이 위치해 있고 예전에는 주요 관청들이 있었던 곳이다. 제주로 따지면 관덕정이 있는 원도심, 서울로 따지면 광화문 인근 정도가 될 것이다. 독일의 수도인 베를린, 그중에서도 중심부인 지역에 5000평이 훌쩍 넘는 거대한 추모 공간을 만든다는 것은 독일인들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지난달 13일 제주대학교 일반대학원 4·3융합전공에 참여하는 교수와 대학원생들은 독일 베를린 학살된 유럽 유대인을 위한 추모지를 찾았다. (사진=조수진 기자)
지난달 13일 제주대학교 일반대학원 4·3융합전공에 참여하는 교수와 대학원생들은 독일 베를린 학살된 유럽 유대인을 위한 추모지를 찾았다. (사진=조수진 기자)

이름 없는 추모비라고 하면 제주에서도 비교할 수 있는 비석이 하나 있다. 지난 3월 제주4·3평화공원 위패봉안실 내 세워진 ‘4·3희생자 무명신위’이다. 이는 ‘4·3희생자로 결정되지 못한 희생자를 위무한다’는 의미로 설치됐다. 이 조형물을 보는 관람객은 무엇을 상상할 수 있을까. 

이 조형물의 설치 목적대로 4·3 당시 학살의 광풍에 스러져간 모든 죽음들을 애도하고 추모하게 될까. 아니면 오히려 ‘무명’이라는 ‘낙인’에 찍혀 앞으로도 이름을 드러낼 수 없는 죽음의 ‘한 덩어리’로 남게 될까. 

지난 3월12일 제주특별자치도가 제주4.3평화공원 내 위패봉안실에서 4.3희생자 무명신위 제막식을 진행하고 있다. (사진=제주특별자치도 제공)
지난 3월12일 제주특별자치도가 제주4.3평화공원 내 위패봉안실에서 4.3희생자 무명신위 제막식을 진행하고 있다. (사진=제주특별자치도 제공)

고성만 제주대학교 사회학과 교수는 이와 관련해 한 일간지에 기고한 글(관련글 [고성만의 한라시론] ‘무명신위’의 효과)을 통해 ‘무명신위’가 ‘희생자’의 반대되는 개념으로 고착화한다고 지적한 바 있다. 그는 “주최측이 ‘무명신위’를  2003년에 추정된 희생자 2만5000명~3만명 가운데 공식 결정된 ‘희생자’ 1만5000명을 뺀 ‘나머지 1만 명이 넘는 자’로 구체화하고 있다”며 “(‘희생자’로 공식 결정되지 않은) 그들을 ‘무명신위’로 일원화, 균질화할 수 있을까”라고 질문을 던진다. 

이어 “아직 신고하지 못한 이들만 있는 게 아니라 신념에 따라 ‘희생자’로 편입되기를 거부하는 이들, 남로당 제주도당의 이력 때문에 희생자 자격을 박탈 당한 이들 등 제 자리를 찾지 못한 채 떠돌아야 하는 이들도 존재한다”며 “‘무명’은 아직 부상하지 않은 이름들의 가능성을 억누르는 효과를 초래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제주4·3평화공원 내 ‘무명신위’의 ‘무명’은 대부분 ‘이름 없는 죽음’이 아니라 ‘이름을 드러내기를 거부 당하는 죽음’에 가깝다. 이런 방식은 ‘평화’라는 4·3의 가치에 가깝다고 볼 수 있을까. 아니라면 이들에 대한 위무는 어떻게 이뤄져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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