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해 가시리의 여름 들판. (사진=이성홍 제공)
어느 해 가시리의 여름 들판. (사진=이성홍 제공)

*이 글은 굿과 신화에 대한 한진오의 <모든 것의 처음, 신화>를 텍스트로 하여 지금 여기 제주와 제주사람에 대한 나의 오랜 생각꺼리를 정리하는 작업이며 제주것이 되기 위한 육짓것의 몸짓이라 하겠다.

한진오는 끝내 ‘제주사람으로 살아남기’의 어려움을 말하는데 이는 조상 대대로 살아온 방식과 사유를 오롯이 지키는 제주사람으로 살아남는 투쟁'이라 한다. 다시 원점이다. 지금 여기 제주사람은 누구이고 무엇인가. 그전에 제주의 현대사를 관통하는 4·3을 들여다보자. 제주사람이거나 제주 사는 사람이면 피해 갈 수 없는. 

#제주4·3의 현재적 의미

한진오는 말한다. ‘4·3의 광풍은 섬사람들의 살과 뼈로 한라산을 쌓아 올렸고 피와 눈물로 바다를 메웠다. 섬땅의 참극은 박명조차 비치지 않는 은폐된 암흑으로 매장되었다.’ 절창이다.

어쩌면 4·3의 기억은 이를 직접 안에서 겪은 이와 겪지 않은 바깥사람 사이를 금긋는 유력한 잣대다. 위에서 그이가 노래한 4·3의 한을 가슴속에 지닌 자와 아닌 자로 나뉘는 것이다. 꼭 그것만일까.

내가 사는 가시리는 4·3 당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중산간마을 중의 하나로 몇 년 전 마을 안에 4·3 순례길이 만들어지기도 하였다. 해마다 4월 초가 되면 유채꽃이 장관인 녹산로를 따라 꽃축제가 열리고 상춘객들과 관광객들로 북새통을 이룬다. 공교롭게도 그 와중에 4월 3일이 되면 마을사람들은 버스를 대절해 4·3 위령제에 참여한다.

어제까지 꽃색물색 방창한 봄기운을 읊조리다가 이제 노란 유채꽃은 피에 젖어있어야 하고 내일 다시 축제가 이어진다 해도 오늘 저녁 저 고운 노을은 검붉은 채여야 한다.

마을에 가까이 지내는 구순을 넘긴 남자삼춘이 있다. 우리 부부가 특별히 청을 넣어 손수 4·3길을 안내하며 그 시절의 참상을 목이 메어 갈라진 목소리로 전해주던 그이는 돌아오는 길에 성산 제2공항이 들어서야 가시리가 부자된다고 힘주어 말하기도 하였다. (지금도 가시리는 부자마을이다)

사는 일이 도깨비놀음이다. 이는 비단 겪은 이와 겪지 않은 이만의 간극이 아니라 겪은 이의 마음 가운데서도 낭패스러운 존재의 이율배반이며 삶의 아이러니다.

누군가 4·3에  대하여 “결코 잊어서도 잊을 수도 없는 일”이라 하였다. 세상에 그런 일이 있는가. 은폐된 암흑 속만 같았던 4·3의 진상이 밝은 천지에 모습을 드러내고 이를 규명하고 피해자와 유족들의 아픔과 한을 공감하고 위무하는 일은 누구의 몫인가.

이제 여야나 죄우가 따로 없고 중앙이고 지역정치고 너나없이 4·3의 진상규명과 피해자 유족들의 배보상을 공언하는 마당에 이제 4·3은 제대로 자리매김하는 것인가.

“제주 4·3은 대한민국의 역사다”라는 어느 글귀처럼 70년이 지난 오늘 여기 우리에게 4·3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되물어야 할 것이다. 더하여 지금 여기 제주사람 또는 제주에 사는 사람의 삶 속에 4·3 의 의미는 무엇이어야 하는지도.

북촌 너븐숭이 4·3기념관에서. (사진=이성홍 제공)
북촌 너븐숭이 4·3기념관에서. (사진=이성홍 제공)

#신화와 굿, 신화와 현실의 사이

신화와 굿에 대하여 한진오의 말을 들어보자. 그이에게 있어 신화는 ‘신이 인간에게 내린 지성이며 신화는 본능’이라고 한다. 그리하여 신화는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이 억압과 차별없는 궁극의 화합을 이루는 것'이 된다.

마찬가지로 제주신화의 요체도 ‘정복과 억압의 불평등이 아닌 평등과 화합’이며 제주사람이면 누구나 ‘이러한 굿판의 영성과 더불어 사람 또한 자연의 일부이며 섬 안팎의 모든 생명과 공생했던 주술의 심성’을 지녔다고 한다. 그리고 이제 잃어버렸던 태초의 시간, ‘모든 것의 처음’으로 만생명을 이끄는 시원의 굿판을 열자, 한다.

책을 읽는 내내 드는 의문 중의 하나가 ‘왜 책 제목을 제주굿으로 하지 않고 신화라 하였는지’였다. 그이는 이와 관련한 강의에서 자칫 신화의 스토리에 치우쳐 굿판의 역동성과 현재성을 놓칠 수 있으며 또한 신화(또는 본풀이)는 굿판에서 그 생명력을 제대로 드러낼 수 있다고도 하였다.

그럼에도 굳이 신화를 중심에 가져온 것은 굿판이 가지는 비신화적 요소를 의식한 것은 아닐까. 굿판의 영성과 주술의 심성을 가진다 하여 그것이 신화로 곧바로 연결되는데 어려움을 느낀 것은 아닐까. 신화가 의례를 필요로 하지만 (굿이라는) 의례가 모두 신화로 읽히는 것이 아니라면.

제주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되어 어떤 이의 강의에서 ‘제주는 1만8천 신의 고향이지만 신화가 없다’는 말을 들은 적 있다. 물론 엄연히 신화가 존재하고 신화와 전설과 민담으로 나누어질 수도, 신화에서 전설이 갈라지기도 하겠지만 제주의 설화가 제주의 민속이 제주의 굿과 신화가 이처럼 짜가르듯 나눠지는 걸까. 굳이 신화임을 내세워 시원의 영성을 회복하는 일, 가능할까. 아니 그런 본디 자리가 있기는 한 것일까.

문득 그 옛날 제주에 존재하였던 탐라(국)의 모습이 궁금해졌다. 남정네들은 들로 바다로 사냥을 나가고 고기를 낚고 여인네들은 옷을 짓고 농작물을 갈무리하는, 밤이면 둘러앉아 부족한 식량이나마 골고루 나누어 먹으며 춤추고 노래하고 신을 경배하는 그런 그림이었을까.

어쩌면 그 옛날 탐라(국)의 모습을 마치 계급과 불평등이 없는 공산사회를 말하며 그 보기로 역사 이전 동굴과 짐승의 가죽으로 추위와 맹수를 피하고 자연에 대한 두려움과 매일의 굶주림 속에 서로 부둥켜 나누며 살았던 원시공동체의 그림을 그리듯 그렇게 여긴 건 아닐까. 혹 그때는 그때대로 지위와 신분을 나누어 뺐고 빼앗기는 시절이지는 않았을까.

굿판에 올릴 정성스레 마련한 마을 아낙들의 제물꾸러미. (사진=한진오 페이스북)
굿판에 올릴 정성스레 마련한 마을 아낙들의 제물꾸러미. (사진=한진오 페이스북)

혹 신화란 평등과 화합과 공생의 증거이기보다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의 억압과 차별을 가상의 공간 속 여행으로 달래보려는 장치는 아니었을까. 혹 살암시민 살아지는 현실의 질곡을 벗어나려는 일탈의 가상공간은 아니었을까.

신화의 창조성이 지배하던 선사시대의 여신, 젠더 너머의 신성한 힘은 존재하였는가. 신인동락의 시대 영성이 지배했던 세상은 실제로 존재하였는가. 

가령 그 옛날 여신들의 시대는 영등할망을 모시던 잠수(녀)들에게 돌아가 꼭 만나고픈 시절이겠는가. 또 그이의 글에 자주 비치는 여성과 남성의 대비를 통한, 창조와 풍요에 반한 생태파괴와 오염의 남성성 전가 또한 또 다른 젠더폭력은 아닐까. 인류의 몰락은 젠더 너머에 있다는 레토릭도 마땅하지 않을까.

한진오는 사람들에게 묻는다. 

“사는 형편이 나아져서 더 이상 풍요를 점지하는 뱀의 화신이 필요치 않은 걸까. 질병에 걸리더라도 병원과 약국을 찾으면 되는 세상이 되어서일까. 미신이라고 여겨 더 이상 신성시하지 않게 된 것일까”

다시 되묻고 싶다. 그이와 이 글을 읽는 당신들에게.

#아름다운 굿을 위하여

제주사람으로서 제주에 사는 일은 어떤 것일까. 제주의 영성과 신성을 가슴에 품고 기리며 기꺼이 평등과 공생의 굿판을 꿈꾸는 이들, 그럴 것이다.

출신을 떠나서 제주를 아끼고 망가지는 제주를 아파하고 기꺼이 이에 반대하는 이들, 제주에서 나거나 제주에 들어와 제주에서 나머지 삶을 살다가 제주에 뼈를 묻겠다는 이들, 그럴 것이다. 

뭔가 빠진 듯한 느낌은 없는가. 어쩌면 해답은 가까이에 있는지도.

1991년, 그러니까 무려 30년 전에 개발과 투기자본이 들어와 난개발을 일삼으며 제주의 자연경관을 파괴하고 훼손하며 제주민의 삶터를 거덜 낼 것을 미리 본 듯 제주의 한 청년이 제 목숨을 던져 이에 저항하였다.

양용찬, 한진오가 전하는 그이의 유서에는 “우리의 삶의 터전으로서 생활의 보금자리로서의 제주도를 원한다”고 적고있다.

양식 있는 이라면 누구나 제주의 제2공항 건설을 반대하고 자연생태의 파괴와 훼손을 안타까와한다.

어쩌면 제주사람은 그러한 개발과 그에 따른 자연의 훼손을 제 ‘삶의 터전’으로서 연결지어 아파하고 반대하는 이 아닐까. 끝내 제주를 ‘생활의 보금자리’로 여기고 누리고 살아가려는 이 아니겠는가.

어느 해 돌문화공원 춤 축제에서. (사진=이성홍 제공)
어느 해 돌문화공원 춤 축제에서. (사진=이성홍 제공)

나는 제주에 ‘살러’ 왔다. 한때의 자연경관을 벗 삼고 풍광을 즐기고자 함이 아니라 끼니를 챙기고 텃밭을 일구고 호롱불 아니라도 저녁 무렵 장작불 환한 난롯가에서 콩꼬투리를 까고 일찌감치 곤한 잠들어 내일의 노동을 준비하는 생.활.자.의 모습을 그리며 ‘살러’왔다.

감히 꿈꾼다. 까맣고 깨끗한 밭 위로 줄지어 선 모종 대신에 삐뚤빼뚤 검질과 어우러져 제각각 뽐내며 자라나는 푸성귀와 과수들, 소닭돼지들이 한가히 거닐며 꽥꽥움매꼬꼬댁 제소리를 내는 들판.

마을마다 오름마다 걸어서 또는 자전거로 제주의 속살을 즐기며 자연을 벗삼는 가난한 여행객들, 저녁 무렵 아장걸음 아가들이 뛰어놀고 모닥불 곁에 집에서 장만해온 음식을 나누며 이웃끼리 노곤한 하루의 노동을 위로하고 축복하는 바닷가의 꿈, 가시리 놀부가 아닌 오래전 어느 벗이 그려준 대로 생명을 일구는 농부의 꿈.

‘굿처럼 아름답게’는 몰라도 30년 전 양용찬이 꿈꾸었던 제주, 세상에서 가장 붉은 노을을 등에 이고 정말 제주사람들이 두루 어울려 어깨 겯고 발맞추며 아름다운 굿판을 열어가는 봄섬 제주의 그림을 그려본다.

다시 마음 깊이 우러나오는 성실하고 단정한 몸짓으로 봄섬 제주에 대한 예의와 경의를 다하여 스스로에게 물어본다 당신은 제주사람인가. 

조심스럽지만 분명한 목소리로 그.렇.다.고 답한다.

뒷말, 
글머리에서 밝혔듯이 많은 부분 한진오의 의견과 맞선다 그럼에도 제주와 제주굿에 대한 피붙이로서의 애정과 열정, 이를 바탕으로 한 폭넓고 깊이 있는 공부와 부단한 현장의 발걸음으로 지금 여기 제주의 아픈 현실을 보듬는 제주사람 한진오의 작업에 존경과 찬사를 보낸다.

그이의 글을 찬찬히 읽고 내 생각을 정리하여 글로 만드는 과정에서 제주 속으로 조금씩 더 들어가는 스스로를 발견하는 일, 큰 즐거움이었다. 이를 안내해준 한진오에게 우애와 연대의 정으로 감사를 전한다.

이성홍. (사진=정미숙 작가)
이성홍. (사진=정미숙 작가)

제주에 살러온 8년차 가시리주민이다. '살러오다', 한 때의 자연을 벗삼고 풍광을 즐기고자 함이 아니라 끼니를 챙기고 텃밭을 일구고 호롱불 아니라도 저녁무렵 은근한 난롯가에서 콩꼬투리를 까고 일찌감치 곤한 잠들어 내일의 노동을 준비하는 생.활.자, 그리 살고싶다, 그리 살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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