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고 이 호적 정리 허젠허난(하려고 하니까) 완전 피눈물이 났습니다. 모르는 사람들은 특별법 그거만 되민(되면) 호적 정리도 되는 줄 아는 사람, 나 같이 모르는 사람이 있을 겁니다.” (오연순, 1949년생, 성산 수산)
“4·3특별법으로 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아버지로 해도 재산을 돌려받을 것도 없습니다. 그저 아버지로, 남편으로 됐으면 하는 겁니다.” (김정희, 1949년생, 애월 고성)
“그때는 무서운 때니까 혼인신고도 못하고 우리 아버지 사진도 굴묵에 다 불태워 버렸어요. 누구 딸이라고만 들어봤으면 좋겠어요. 그게 원입니다. 장가가서 애기 낳고 죽어도 흔적이 없잖아요. 아버지 자식은 나 하나뿐인데.” (강순자, 1944년생, 애월 하귀)
㈔제주4·3연구소는 4일 오후 제주4·3평화기념관 대강당에서 제주4·3 제73주년 증언본풀이 마당 스무 번째 ‘나의 뿌리, 4·3의 진실-내 호적을 찾습니다’를 열었다.
지난 2월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하 4·3특별법)’이 전면 개정한 법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또 최근 정부가 희생자 배보상안을 내놓으면서 70여년 전 목숨을 잃은 희생자와 죽음보다 더 괴로운 삶을 살아온 생존희생자의 해원에 한 발 더 가까이 다가갔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하지만 부모, 형제와 연이 끊어진 채 70년이 넘게 살아가는 이들이 있다. 말 한마디 잘못했다가 끌려갈까 봐, “빨갱이의 자식”이라 낙인이 찍힐까 봐 말하지 못한 말들을 가시처럼 품은 채 사는 이들이다.
“누구 각시라고, 누구 자식이라고 잡아갈까 무서워서 사진들도 다 떼어서 불살라버리고. 아버지 딸로 안 되고 외삼춘 밑으로 조카고 강순자 해서 올려졌어요. 호적에 아버지 흔적이 없기 때문에 골머리가 너무너무 아픕니다.”
이날 첫 번째 증언자로 나선 강순자 할머니. 호적에 아버지 칸은 항상 빈칸이었다. 어머니가 재가하면서 외삼촌 조카로만 호적에 올라갔다.
강 할머니가 여섯 살이던 1948년 12월 어머니가 저녁밥을 하고 있을 때였다. 아버지 친구들이 “동회당으로 모이렌 햄쪄(모이라고 하는데)”라는 말에 아버지가 나갔다가 영영 오질 않았다고 기억한다. 이날 토벌대는 공회당에 주민을 모아놓고 27명을 호명해 끌고 가 신엄리 자운당에서 집단 총살했다. 그 희생자 중 한 명이 아버지였다.
“열 살에 어머니와 헤어지고 외할머니와 잠깐 살다가 애기업개(젖먹이 아기를 봐주는 일)로 살기도 하고. 부산도 가고 동문통도 가고 중선전기 회사에도 가서 살다 보니 열아홉 살이 됐어요. 그러다 육지 대해바당(바다)에 가서 물질하고 죽을 고비도 몇 번 넘었습니다. 어머니 집에 안 찾아다녀요. 그 집 사람들이 뭐라고 생각하겠어요? 난 그런 눈치 싫습니다. 그러니 어머니한테는 빌어먹어도 안 갔어요.”
마지막 남은 소원이 없느냐 묻자 강 할머니는 “죽기 전에 누구 딸로만 됐으면 좋겠다. 딸로서 아버지의 사망신고를 해서 누구 딸로만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홀로 살아온 삶이 어땠는지 묻자 웃으며 이야기를 이어가던 강 할머니는 겨우 참았던 눈물을 흘렸다.
김정희 할머니는 삶만큼 기구한 호적을 가졌다. 아버지는 1948년 12월 신엄리 ‘원병이’ 서쪽에서 총살당했다. 어머니와 혼인신고를 하지 못한 채 김 할머니가 태어났고 아버지의 사망신고를 바로 하지 못하다가 군대 입대 영장이 나오자 할아버지가 아들의 사망신고를 했다. 이후 김 할머니가 학교에 갈 나이가 되자 할아버지는 ‘가짜 아들’을 만들어 어머니와 혼인신고, 김 할머니의 출생신고를 하게 된다.
어머니는 ‘가짜 남편’, 김 할머니는 ‘가짜 아버지’를 두고 70년을 살았다. 김 할머니의 사연을 들은 동네 삼촌의 권유로 소송을 제기, 지난해 어머니는 ‘혼인무효’ 소송에서 승소했다. 하지만 김 할머니의 호적엔 아직 ‘가짜 아버지’의 딸로 올라가 있다.
“어머니는 살면서 호적 때문에 설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동네 사람들도 ‘허천베세기 해여네 결혼해연 살고 있다’고 헛이름하고 살고 있다고 놀리고 서럽게 살았습니다. 너무 서럽게 살아온 어머니, 이제 살 날이 얼마 없는데, 젊었을 때 동네 사람들한테 설움 받은 거, 이런 수모와 설움을 씻을 수 있게 법이 해결해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세 번째 증언자로 나선 오연순 할머니. 아버지는 1949년 신양리 처갓집에 갔다가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하고 광주형무소에서 옥사했다. 어머니 역시 아버지 때문에 임신 막달에 고문을 당하기도 했다. 다섯 살쯤 어머니는 이웃마을로 재가했고 오 할머니는 출생신고도 하지 못했다.
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아버지 사촌의 딸로 호적에 올렸다. 결혼을 하고 나서 공직에 있던 남편에게 피해가 갈까봐 아버지 이야기는 한동안 꺼내지도 못했다. 그러다 남편이 “돈이 많이 들어도 소송을 해서 호적 정리를 허라”고 권해 흔적을 찾을 수 없는 아버지를 찾아나섰다.
오 할머니는 형무소에 아버지와 같이 있던 분, 성산에서 아버지를 기억하는 분도 만날 수 있었다. 남편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아버지와 어머니를 찾는 소송을 시작했고 패소와 항소 끝에 마침내 지난 2019년 아버지는 오원보, 어머니는 김무옥임을 확인받았다.
“이게 호적 정리가 쉽고도 어려운 겁니다. 꼭 재판을 거쳐서 법원을 거쳐야만이 해결되는 문제입니다. 5년 걸렸습니다. 아버지는 오원보, 어머니는 김무옥입니다.”
한편 이날 증언본풀이는 ㈔제주4·3연구소가 주최하고 제주양돈농협이 후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