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4·3을 이야기할 때 대한민국 정부는 ‘화해와 상생’의 정신을 강조하지만 어불성설이라는 지적이다.
30일 오후 제주4·3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도민연대는 제주4·3평화공원 교육센터에서 ‘제주4·3대전형무소 수형희생자 실태조사 보고회 및 토론회’를 열었다.
이날 지난해 이뤄진 실태조사와 관련한 보고가 끝나고 나서 ‘제주4·3항쟁 가해자는 누구인가’ 주제로 토론회가 진행됐다.
주제발표에 나선 역사연구자인 주철희 박사는 지난 2003년 정부 공식보고서로 확정한 ‘제주4·3진상조사보고서’와 지난 2019년 발간된 ‘제주4·3추가진상보사보고서’에서 가해자의 주체와 명령·지휘 체계를 밝히지 못하고 있는 문제에 초점을 맞췄다(관련기사☞주철희 “가해자가 없는 제주특별법연구로라도 밝혀야”).
이어진 토론에서 강호진 제주4·3기념사업위원회 집행위원장은 “‘화해와 상생’이 필요하긴 한데 지금 이 시점에 4·3과 관련해 동의될 수 있는 단어인가”라며 의문을 던졌다.
이어 “만약 4·3희생자나 유족 입장에서 넓은 아량을 가지고 ‘당신과 화해하겠다’ 하고 싶어도 정작 그 대상이 없다”며 “가해자가 명확하게 밝혀진 이후에 유족이나 도민사회의 합의를 이루고 나서야 화해와 상생을 논의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피력했다.
또 앞서 주 박사가 “4·3특별법이 여섯 차례 개정되는 동안 진상규명에 대한 노력이 소홀했다”는 지적에 대해선 “진상규명도 중요하지만 이번 특별법 전부개정에서 당장 시급한 문제는 (희생자의 명예회복을 위한)일괄재심과 호적 관계 정정, 희생자 배보상 등이었다. 이 부분을 법에서 해결하고 진상규명에 대한 작업도 이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아울러 4·3 당시 미군정의 책임을 묻는 것과 관련해서 “아직 쉽지 않다. 유족회가 공동으로 노력해서 미국 백악관에 가서 시위도 하고 10만명 서명도 받아서 전달했지만 백악관 측은 ‘우리와는 관계없다’는 태도만 보였다”며 “진상규명을 제대로 하고 구체적인 사실을 입증한 이후에 미군정의 책임을 묻는 과정으로 넘어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4·3학살 주범을 영웅으로 기려도 말 한마디 못하는 게 현실
강 위원장은 또 4·3 당시 이승만 정부의 책임과 관련해 “당시 대통령인 이승만의 책임이 있다는 것은 사회적으로도 어느 정도 규명이 됐지만 현실은 만만치 않다”며 “당시 장군과 중령급 이상었던 인물들은 서울 현충원이나 대전 현충원에 있다”고 한탄했다.
이어 “이게 무엇을 의미하느냐. 국가가 추념하고 위로하고 숭배할 대상으로 여긴다는 것”이라며 “거기에 대해 한마디도 못하는 게 4·3유족과 저희의 입장”이라고 분개했다.
그러면서 4·3 당시 학살 주범이면서도 추도비가 세워진 박진경을 언급했다.
강 위원장은 “서울 현충원에 가면 박진경 묘비에 육사동기회까지 등장해서 추모하는 비문이 있고 남해에 가면 남해군민동산에 박진경 동상이 세워져 있다”며 “이 동상도 처음엔 공원 중앙에 있던 걸 지역 시민사회 단체가 싸워줘서 구석으로 옮겼고 그 앞에 있던 돌하르방도 치울 수 있었다”고 말했다.
또 “게다가 제주시 충혼묘지에 있던 박진경 추도비는 국립묘지로 옮겨질 예정이었는데 시민사회 단체가 열심히 싸워서 제주시와 보훈청이 ‘안 보이는 데 놔두겠다’고 했는데 결국 제주시가 가장 잘 내려다보이는 명당 자리로 옮겨졌더라”며 “없앨 수 없다면 추도비 옆에 그의 죄상을 정확히 명시한 단죄비를 세울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박진경을 4·3학살을 잘 진행해서 승진한 사람이 아니라, ‘창군 영웅’이 아니라, 4·3학살의 주체였다는 걸 다음 세대에 알리는 데 힘을 모아달라”고 호소했다.
#가해자 규명 못한 이유는 사회적 힘이 없기 때문
강 위원장의 토론 이후 이창수 법인권사회연구소 대표는 제주4·3을 과거사 청산의 관점에서 봤을 때 진상규명, 명예회복, 책임자 처벌, 재발방지 대책 등의 과제가 있다고 강조했다.
이 대표는 “4·3특별법을 만들 때 가해자를 정확히 드러내지 못하고 배상 문제를 빼버리고 통과시킨 것은 시민권을 박탈한 것”이라며 “물꼬를 텄다는 데 의미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근대적인 시민적 권리도 충족시키지 못한 법안이었다”고 평가했다.
이어 “진상조사보고서를 낼 때 진상규명을 안 했겠느냐. 국방부가 반대해서 못 냈을 것”이라며 “가해자를 밝히지 못한 배경에 (주 박사가 지적한)법이나 제도적 한계는 크지 않다고 본다. 사회·정치적 힘의 한계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아울러 “5·18보상법에선 국가에 대해 ‘배상(위법한 행위로 인해 일어난 피해나 권리 침해에 대한 보상)’을 해야 한다고 명확히 하고 있는데 반해 4·3은 ‘위자료’ 같은 이상한 표현을 쓰려고 하지 않았느냐”며 “왜 5·18은 되고 4·3은 안 되겠느냐. 사회적 힘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 대표는 또 “가해 주체를 말할 때 책임자에게만 책임이 있는 것은 아니”라며 “기획한 사람, 명령한 사람, 지시한 사람, 실행한 사람, 방조한 사람, 침묵한 사람까지를 포함한다. 이웃이 침묵한 데 대해서도 도덕적 책임이 있다. 총체적으로 조망하면서 가해 책임을 밝혀야 한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