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엔 그나마 서늘하더니 오후가 되자 더운 공기가 방안을 채우기 시작한다. 선풍기가 열심히 돌아가곤 있지만 후덥지근한 바람 뿐이라 에어컨을 틀고 싶은 욕망을 간신히 참아내고 있다.

그러다 며칠 전 써놓았던 짤막한 연주곡에 가사를 붙여 볼까하고 노트를 펼쳤다. 근사한 무언가가 떠오르길 기대하며 휘트먼 시집을 읽어보기도 하고 영감을 자극하는 사이키델릭한 영상도 틀어 놓았건만 썼다 지웠다만 반복할 뿐. 결국 펜을 놓고 말았다.ᅠ

누군가 내게 '가사쓰기'와 '곡쓰기'중 무엇이 더 어렵냐고 묻는다면 "작곡은 내면의 에너지를 끌어 올려 창작의 쾌감을 주지만 가사를 쓰는 일은 매번 나를 늙게 만들 뿐이지요."라고 고개를 저으며 말할 것이다. 아마도.

사실 1950년대 이전만 해도 작곡과 작사는 완전히 분리된 고유의 영역이었다.

물론 델타 지역의 블루스 뮤지션들처럼 직접 가사와 곡을 쓰고 기타를 치며 노래하는 싱어송라이터들도 있었지만 우리가 익히 아는 예전의 팝송 대부분은 전문 작사가들이 쓴 가사들이다.

재즈에서 역시 스탠다드 곡들은 대다수가 색소폰이나 피아노 등의 기악연주였다. 그러다 보컬들의 인기가 많아지고 레코딩을 하기 시작하면서 기존의 곡들에 가사를 입혔고 그러면서 노래로 더 유명해진 경우들이 많았다.

브라질의 보사노바는 가사의 비중이 훨씬 컷다. 작곡가 조빔Antonio Carlos Jobim의 유려하고 복잡한 하모니와 질베르토Joao Gilbeto의 섬세한 기타에 시인이자 작사가인 비니시우스 지 모라이스Vinicius De Mores의 노랫말이 더해지자 비로소 특유의 서정이고 지적인 음악이 만들어졌다.

60년대가 오고 그리니치 빌리지의 포크뮤지션들과 (블루스의 영향을 받은) 여러 락밴드들이 직접 곡을 쓰고 연주하기 시작하면서 송라이팅 능력이 아티스트의 정체성과 개성을 나타내는 중요요소가 되었다

우리나라 역시 1950년대 이전부터 손석우,김지평 등 가사를 전문적으로 쓰는 작사가들이 있었다. 8-90년대를 대표하던 작사가에는 양인자, 박주연, 지예 등이 있었고 싱어송라이터가 많아진 요즘에도 강은경, 박창학, 김이나 등 많은 이들이 활동중이다.

반대로 시를 노래로 만든 경우도 있다. 가장 많이 알려진 곡은ᅠ최동원과 테너 박인수가 부른 <향수>일 것인데 토속적인 언어로 선명한 풍경을 그려낸 정지용의 시를 작곡가 김희갑이 너무도 멋드러진 음악으로 표현해냈다,.ᅠ

시가 가진 독특한 운율과 함축된 언어를 그대로 살리며 멜로디를 만들어내는 것은 쉽지가 않다. 정해진 박자안에 리듬을 맞추면서도 시어가 가진 고유의 색깔이 퇴색되거나 너무 도드러지지 않게 곡을 써야 하기 때문에 여러모로 힘든 작업이 아닐 수 없다.ᅠ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라는 잊을 수 없는 한 줄의 가사로 시작되는 박인희의 <세월이 가면>이 낭만파 시인 박인환의 시로 만든 노래임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술집에서 술을 마시다 박인환이 끄적거린 싯구절에 극작가 이진섭이 즉석에서 멜로디를 썼고 동석했던 가수 나애심이 불러서 완성됐다는 영화 같은 이야기도 전해진다. 예술가들이 꿈꾸는 가장 낭만적인 상황일 것이다.

서슬퍼런 70년대에 발표된 곡으로는 고은의 시에다 김민기가 곡을 붙인 <가을편지>가 있다.

특히나 93년도에 발매된 [김민기 1]에 재수록된 버전은 이병우의 미려한 기타 선율위에 소근대는 듯한 저음의 목소리가 어우러지며 노랫말이 가진 음률 그대로를 생생하게 전달한다.

<푸르른 날>은 서정주의 시에 가객 송창식이 직접 선율을 입혔다.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을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 하자’라는ᅠ송창식 특유의 폭발적인 가창으로 시작하는 이 곡은 마치 성악곡처럼 비장하게 흐르다 8비트 바운스 리듬으로 분위기가 전환되고 어느 순간 또다시 웅장하게 변화하면서 마무리된다. 자신의 시가 노래로 만들어지길 꺼려하던 시인 서정주가 직접 송창식에게 건네주며 곡을 써보라고 했고, 송창식은 혼신의 힘을 다해 곡 작업을 했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2013년에는 소월의 시를 담아낸 음반이 발매되기도 했다. 작곡가 박지만이 곡을 쓰고 윤상, 이융진, 안신애, 하림 등 각기 다른 색깔의 보컬들이 노래한  [그 사람에게 : 김소월 프로젝트]에는 <진달래꽃>, <산유화>, <초혼> 등 소월의 대표시들이 빼곡히 담겨져 있다.

특히 작사가 박창학이 부른 <기억, 깊고 깊은 언약>은 지극히 절제된 피아노 반주위에 낭송을 하듯 담담히 부르는 목소리가 빼어난 서정을 드러낸다.

곡이 중반을 넘어가고 피아노가 주선율을 변주하며 보컬과 대화하듯 풀어내기 시작하면 쓸쓸한 감정이 노을처럼 서서히 밀려오기 시작한다.

시가 음악과 만나 이뤄내는 아름다운 순간이다.

양진우
양진우

음악행위를 통해 삶의 이면을 탐구해나가는 모험가, 작곡가이자 기타리스트인 양진우 씨는 이렇게 자기 자신을 소개한다, The Moon Lab 음악원 대표이며 인디레이블 Label Noom의 프로듀서로 활동하고 있다.<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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