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거리에 차가운 공기가 깔리기 시작한다. 옷장 깊숙이 넣어둔 갈색 가디건을 꺼내 입곤 바닷가 옆 작은 선술집을 향해 걷는다. 

한 여름의 무더위가 시원한 맥주를 부르듯 '가을'이라는 말과 함께 오는 쓸쓸함은 막걸리와 와인을 부른다. 더군다나 이렇게  찬바람이 불어오는 절기엔  굴과 전어회, 꼬막과 과메기가 곳곳에서 술꾼들을 유혹한다. 계절에 따라 제철음식이 있듯이 이맘 때 역시 듣기 좋은 '제철 음악'들이 있다.

이 계절의 제철 음악으로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음반은 Gerry Mulligan Sextet의 63년도 앨범 <Night Lights>이다.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새벽녘의 도시 '맨하탄'을 배경으로 하는 푸른색감의  자켓이다.

고즈넉히 울려퍼지는 혼과 부드러운 기타소리, 나지막히 울리는 리듬섹션이 가을날의 우수를 온몸으로 느끼게 한다.

제리 멀리건은 밥 브룩마이어, 쳇 베이커등과 함께 쿨재즈를 대표하는 음악가로 마일즈 데이비스의 <Birth of Cool>에 참여하며 출중한 편곡 능력을 보여주기도 했다.

1952년엔 트럼펫 연주자 쳇 베이커와 함께 자신의 4중주단을 결성하며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독특하게도 피아노나 기타가 없는 편성이었다. 반주악기가 없는 빈 공간을 쳇의 트럼펫과 그의 색소폰 소리가 자유롭게 유영하며 큰 인기를 끌었다.

큰 키에 호리호리한 체구, 어딘지 연약해 보이는 얼굴이지만 진지하고 강건한 태도를 지닌 음악인이었던 제리는 피아노를 치면서  음악에 재능을 보였다. 클래식을 전공한 재원이었다. 그는 독특하게도 바리톤 색소폰을 자신의 주악기로 선택했다. 묵직한 톤을 가진 이 악기를 젠틀한 모습으로 우아하게 연주했다. 가끔 자신의 악기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이 들린다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심각한 헤로인 중독으로 경찰에 연행됐다. 유럽으로 이주한 후에도 평생을 마약과 가난, 정신병과  싸워야 했다. 내가 처음 이 음반을 들었을 때는 모든 삶의 방향성이 재즈로만 향해 있을 때였다.

흠모하던 음악가인 짐홀이 참여했다기에 무턱대고 구입했지만 딱 한 번 듣고는 시디장에 오래도록 묵혀 두었다. 비밥재즈의 현란하고 복잡한 코드진행과 빠르고 화려한 솔로라인을 탐구하던 시절에 이 음반은 그저 평범한 무드음악으로만 들렸다.

즉흥연주의 생동하는 느낌이 거세된 '차분하고 정적인 연주'와  불꽃튀는 인터플레이보다는 '서로의 화성을 중시하는 음악'을 들을 여유가 당시에는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 사려깊은 편곡과 연주자들의 정갈한 솔로 라인들이 귀에 들리기 시작하면서 무척이나 애청하는 음반이 되었다.

첫 곡은 앨범의  타이틀 곡인 'Night Lights'.

피트 졸리가 연주하는 도입부의 투명하고 맑은 피아노 소리는 새벽의 여명처럼 푸른 색감을 지녔다. 짐홀의 기타가 들릴 듯 말 듯 조용히 따라가고 이어서 Art Farmer의 꺼클한 트럼펫이 다시 한 번 주멜로디를 변주하며 분위기를 이끌어 간다.

영화 <Black Orpheus>의 주제가인 'Morning Of The Carniaval'은 원곡의 우울한 정서를 담으면서도 좀 더 쓸쓸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브라질의 원초적인 보사노바의 느낌과는 사뭇 다른  할로바디 기타의 컴핑과 도회적 이미지의 프루겔혼, 밥 브룩마이어의 밸브 트럼본 사운드는 쿨재즈 특유의 섬세하고 절제된 연주를 들려준다.

드러머 데이브의 브러쉬 연주가 전체 분위기를 이끄는 'Tell Me When' 부드러운 기타 컴핑위로 스산한 느낌의 멜로디를 들려주는  'In The Wee Small Hours Of The Morning'도 좋다.

긴장감 넘치는 인트로 섹션에 이어  짐홀의 기타솔로가 돋보이는 'Festival Minor'는 느슨히 스윙잉하고 쇼팽의 아름다운 전주곡 'Prelue in Eminor'는 완전히 새로운 느낌의 보사노바 리듬으로 편곡되어 근사한 무드를 만들어 낸다.  늦가을 오래된 선술집에 앉아  나홀로 술 한잔을 기울고 싶게하는 그런 음반이다.

※참고문헌: 「악마가 부른 천사의 노래」, 「거친 영혼의 속삭임」

양진우
양진우

음악행위를 통해 삶의 이면을 탐구해나가는 모험가, 작곡가이자 기타리스트인 양진우 씨는 이렇게 자기 자신을 소개한다, The Moon Lab 음악원 대표이며 인디레이블 Label Noom의 프로듀서로 활동하고 있다. 매달 마지막 주 음악칼럼으로 독자들을 만난다.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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