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객은 길들이기 나름?!’

몇 해 전 서울 출장 때다. 가볍게나마 끼니를 때울 요량으로 모 패스트푸드점에 들렀다 허둥댔던 기억이 새삼스럽다. 무인계산기, 키오스크(kiosk)라 불리던 생경한 기계 앞에서. 혼자서는 처음이라 어찌할 바 모르던 참에 쉴 새 없이 움직이는 문자와 그림들을 따라잡기도 힘겨워 혼쭐났다. 두 세 차례나 초기 화면으로 되돌아가길 거듭한 끝에서야 가까스로 주문에 성공(?)했던 것. 뒤에서 기다리던 사람들 신경 쓰느라 식은땀마저 잔뜩 배었더랬다. 한데 이제는 제법 익숙한 편이다. 그래서 ‘고객은 길들이기 나름?!’이라 했던가.

무인화(無人化) 열풍이 거세다. 코로나 여파이기도 하겠지만 키오스크는 이미 일상 곳곳에 스며든다. 여기저기서 무인점포 또한 부쩍 늘어난다. 더 이상 패스트푸드점이나 대형마트만의 얘기가 아니다. 편의점과 카페는 물론 영화관에서도 사람이 아닌 기계가 손님을 맞이하는 진풍경이 전혀 낯설지만은 않다.

무인화에 여념 없는 업체들은 하나같이 소비자의 편의성을 높이려고 도입했다는 취지다. 신속하고 빠르게 주문하고 계산할 수 있다는 것. 비대면 서비스를 선호하는 소비자들을 위한 '언택트(Untact) 마케팅'의 하나라 주장한다. 결국 소비자들은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키오스크 앞에 줄지어 다가선다. 필자처럼 '기계치'만 아니라면 세상 사람들은 한껏 환호한다. "세상 참 편해졌다!"

대한항공 고객이 키오스크(무인탑승수속기)를 이용해 탑승수속을 하고 있다.
대한항공 고객이 키오스크(무인탑승수속기)를 이용해 탑승수속을 하고 있다.

무인화(無人化) 열풍, 그 이면에 감춰진 것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반기는 건 아니다. 키오스크는 사람에 대한 배려가 없다. 직원들은 키오스크로 일자리를 빼앗기고, 고객들은 따뜻한 미소와 환영인사를 잃어버렸다. 한마디 말도 건네지 못한 채 단지 차가운 터치스크린과 사투(?)만 벌일 따름이다.

키오스크 확산이 일부 계층에겐 소외감을 불러온다는 말도 들린다. 다름 아닌 '디지털 소외'. 주로 기기사용에 어려움을 느끼는 고령층에서 자주 발생한다. 이들은 주류에서 멀어지거나, 아니면 억지로라도 사용법을 배워야만 한다. 아무리 혁신적인 기술이라도 쉽게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겐 되레 또 다른 장벽을 만드는 셈이다.

키오스크 때문에 일자리를 빼앗기는 사람도 있다. 대부분 청년이거나 노동시장에서 밀려난 사회적 약자들이다. 사람을 쓰기보다 키오스크가 더 효율적이라는 생각에 사업주는 직원을 고용할 필요가 없어졌다. 키오스크 1대가 직원 3명분을 대체하면서 일자리가 점점 줄고 있는 것. 그도 그럴 밖에?! 

키오스크는 급여를 올려 달라 요구하거나, 집안 일로 결근도 하지 않는다. 하루 8시간만 일하겠다는 사람과는 달리 잠도 없고 24시간 연중무휴 강철 체력으로 꼬박 일만 한다.

하물며 마트 같은 데선 종업원이 고객들에게 셀프계산대를 이용하도록 도와주는 모습도 종종 눈에 띈다. 장기적으로 자신의 일자리를 없애는 방법을 고객들에게 알려주고 있는 것. 이 얼마나 ‘웃픈’ 장면인가.

오히려 무인화가 소비자에게 노동을 전가한다는 볼멘소리도 쏟아진다. 키오스크에 다가가 버튼을 누르고, 메뉴를 선택하고, 결제를 하는 일은 본디 종업원이 하던 노동의 일부. 키오스크로 종업원은 사라졌지만 일 자체는 고스란히 남는다. 소비자는 아무런 대가도 없이 이를 대신한다. 기업은 키오스크를 써서 인건비를 줄이는데 그로 인한 불편은 소비자가 겪는 것. 소비자가 무보수로, 노동이라고 인지하지도 못한 채 일하는 이 생뚱맞은 노동을 오스트리아 철학자 이반 일리치는 이렇게 이름 붙인다.

‘그림자 노동’이라고.

(사진=박소희 기자)
(사진=박소희 기자)

대가 없이 떠넘겨진 보이지 않는 일들, ‘그림자 노동’

집에서 살림하고 애 키우는 것은 과연 ‘일’이 아닐까. 맞벌이 부부가 급증하면서 여성들에겐 감당키 어려운 부담이 떠맡겨진다. 전업주부들은 ‘돈벌이가 없다’는 이유로 하루 종일 육아와 살림에 치이면서도 재취업 걱정에 가슴앓이하고, 직장에서 일하는 엄마들은 ‘아이에게 전념하지 못 한다’는 이유로 자신을 다그치며 퇴근하자마자 밀린 살림살이와 아이들 뒤치다꺼리에 시달린다. 바로 이런 ‘대가 없는 노동’이 그림자 노동이다.

‘그림자 노동’이란 보수를 받지 않고 당연히 하는 것으로 포장된 노동을 말한다. 살림이나 육아에만 그치지 않는다. 셀프주유나 무인발권, 카페나 식당에서의 셀프서비스, DIY식 가구조립에 이르기까지, 이른바 ‘셀프서비스’라는 이름으로 자잘하고 사소한 일들에 점령당한다. 우리가 ‘소비’자라는 이름으로 대가없이 해내는 일 모두가 그림자 노동이다.

가정에서건 직장에서건, 시장에서건 온라인에서건 가릴 것 없이 그림자 노동이란 물결은 거침없이 밀려든다. 임금을 받지도 못하고, 눈에 띄지도 않는 그림자 노동 덕분에 이 사회가 오늘도 묵묵히 돌아가고 있는 것. 우리는 이 명백한 사실을 너무 자주 잊고 살아가는 건 아닐까.

혹시 당신은 주부의 가사노동을, 종업원들의 온갖 허드렛일을, 그리고 스스럼없이 해내는 비생산적 잡무들을 ‘일 같지도 않은 일’이라며 하찮게 생각하진 않았던가. 한번쯤은 되돌아볼 일이다. 바로 그 무시와 편견이 그림자 노동에 드리운 차별과 억압을 더욱 견고하게 만든다.

"그림자 노동은 아주 매력적인 방식으로 기업에 보상을 안겨준다. 돈도 받지 않고 일해 주는 고객들에게 짐을 떠넘기면서 그만큼 엄청난 인건비를 줄일 수 있는 기회를 거부할 자본가가 어디에 있겠는가.” <그림자 노동의 역습>이라는 책에서 저널리스트 크레이그 램버트가 꼬집는 말이다.

심인요양원 원직복직 10리길 행진을 마치고 해고자 발언을 하고 있는 황선숙(61) 씨. (사진=박소희 기자)
심인요양원 원직복직 10리길 행진을 마치고 해고자 발언을 하고 있는 황선숙(61) 씨. (사진=박소희 기자)

그림자 노동자, 또 다른 우리의 이름

그림자 노동은 우리 사회 곳곳에 넘쳐난다. 가사노동이 대표적. 밥하고, 청소하고, 빨래하는 일은 생존을 위해 필수적인 노동이다. 매일 매일 가정에선 무수한 가사노동이 부가가치를 창출한다. 하지만 국내총생산(GDP)에는 반영되지도 않을 뿐더러 그 가치는 아무렇지도 않게 지워진다. 심지어 가사노동자는 곧잘 가정부라 무시당하기 일쑤다.

이밖에 사회 유지에 꼭 필요한 일에도 그림자 노동이 파고든다. 병원에서 환자를 돌보는 간병사, 가정에서 가사노동을 하는 요양보호사, 주민들 개인 심부름을 하는 경비노동자 등이 그 사례다. 택배노동도 마찬가지. 택배노동자의 주 평균 노동시간은 71시간, 이 중 절반가량은 분류작업이다. 당연히(?) 무임금이다. 택배 배송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사전작업이지만 그림자 노동으로 취급받는다.

그림자 노동은 말이 없다. 문제가 터지고 사람이 죽어 나가야 사회가 관심을 갖는다. 재가 요양보호사, 방문노동자는 성폭력에 시달린다. 올해도 적지 않은 택배노동자가 과로로 사망했다. 한 경비노동자는 주민의 갑질에 시달리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우리는 이런 식으로만 그림자 노동을 기억한다. 너무나 익숙해서 그 소중함을 잊은 채 살아가다 말이다.

그림자 노동을 하는 이들 대부분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이다. 이용자의 작은 항의만으로도 고용이 위태롭다. 개인 사업자로 나설라 치면 일감이 끊길 위험이 도사린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불합리한 요구를 들어주고 업무 외 잔일도 도맡는다. 물론 무보수다. 그림자 노동은 갑질·폭언·폭행·성폭력 등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그럼에도 사용자는 노동자를 보호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해고도, 고용도 쉬우니 어찌 보면 당연하다.

반면 외국에선 사회기능 유지에 꼭 필요한 일을 수행하는 이들을 ‘필수 노동자’또는 ‘핵심 노동자’라 부르며 보호와 지원에 앞장서 왔다. 대체로 의료·돌봄·보육·교통·물류 분야 종사자들이다.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필수 노동자’라는 개념을 도입하려는 움직임이 생겨났다. ‘필수 노동자 보호 및 지원에 관한 조례’가 그것.

간만에 반가운 소식 한 가지. 근로기준법이 제정된 지 68년 만에 가사근로자가 법적으로 근로자 지위를 인정받았다. ‘가사근로자의 고용개선 등에 관한 법률’이 국회 문턱을 넘어선 것. 마침내 가사근로자도 4대보험·퇴직금·유급휴일 등 근로관계법령을 적용받을 수 있게 됐다.

고(故) 노회찬 전 정의당 의원 (사진=정의당)
고(故) 노회찬 전 정의당 의원 (사진=정의당)

“6411번 버스라고 있습니다.”...故 노회찬을 기억하며

“6411번 버스라고 있습니다.”

지금은 고인이 된 노회찬의원이 10년 전 어느 정당 대표를 맡으면서 말문을 열었던 수락연설 첫 마디다.

“서울 구로구 거리공원에서 출발해서 강남을 거쳐 개포동 주공 1단지까지 대략 2시간 정도 걸리는 노선버스입니다...(중략)... 출발한지 15분 만에 신도림과 구로시장을 거칠 때쯤이면 좌석은 만석이 되고 버스 안 복도까지 사람들이 한 명 한 명 바닥에 다 앉는 진풍경이 매일 벌어집니다...(중략)...이 버스 타시는 분들은 새벽 3시에 일어나서 새벽 5시 반이면 직장인 강남의 빌딩에 출근해야하는 분들입니다...(중략)...아들, 딸과 같은 수많은 직장인들이 그 빌딩을 드나들지만, 그 빌딩이 새벽 5시 반에 출근하는 아주머니들에 의해서 청소되고 정비되는 것을 의식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습니다.

이분들은 태어날 때부터 이름이 있었지만 그 이름으로 불리지 않습니다. 그냥 아주머니입니다. 그냥 청소하는 미화원일 뿐입니다. 한 달에 85만원 받는 이분들이야말로 투명인간입니다. 존재하되 그 존재를 우리가 느끼지 못하고 함께 살아가는 분들입니다.

저는 스스로에게 묻습니다...(중략)...이 분들의 삶이 고단하지 않았던 순간이 있었겠습니까? 이분들이 그 어려움 속에서 우리 같은 사람들을 찾을 때 우리는 어디 있었습니까? 그들 눈앞에 있었습니까? 그들의 손이 닿는 곳에 있었습니까? 그들의 목소리가 들리는 곳에 과연 있었습니까?”

 

강종우 제주살림충전소장

뉴턴의 물리학 법칙에 따르면, 호박벌은 절대로 날 수가 없다. 날개 길이가 몸무게를 지탱할 만큼 길지 못하기 때문. 그런데 호박벌은 날아다닌다. 마찬가지로 통상의 경제학 이론으로는 협동조합은 장기적으로 실패해야 마땅하다. 하지만 실제로 다양한 분야에서 협동조합이 활동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협동조합을 호박벌에 비유하기도 한다. 2000년부터 근로빈곤층 자활사업이란 말죽은 밭에 빠져 근 20여년간 시민경제를 업으로 삼아온 강종우 센터장이 제주살림충전 소장이란 새로운 직함으로 '호박벌의 제주비상'을 월 2회로 늘려 가장 약한고리조차 날아오르는 경제, 불가능해 보이는 희망을 노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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