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5일, 제주특별자치도의회에서 의미 있는 토론회가 있었다. ‘제주대학교 4·3학 석·박사과정 개설의 의미와 추진방안 특별토론회’가 그것이다. 아쉽게도 논자는 깜빡하여 참석하지 못하고 언론보도를 통해서만 대략의 내용을 살펴볼 수 있었다.
4·3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학문후속세대가 양성되어야 하는데, 4·3연구는 특정 개별학문이 아니라 여러 학문의 학제적 접근을 요하는 분야이므로 관련 학과가 공동으로 운영하는 협동과정의 석·박사과정을 개설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 골자이다. 그리고 과정 운영에 필요한 재원은 제주도를 포함한 뜻 있는 기관들이 도울 수 있을 것이라 한다.
4·3연구 학문후속세대를 양성해야 한다는 점에는 대체로 이의가 없을 것이다. 문제는 방법이다. 특정 연구 분야의 학문후속세대를 길러내는 가장 빠른 정도는 석·박사과정을 개설하여 운영하는 것이 맞다. 그런데 여기에는 행·재정적 측면을 제쳐두더라도 두 가지 조건이 전제되어야 한다. 교사가 있어야 하고 학생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 그것이다. 교육이란 가르침과 배움이 상호작용으로 이루어지는 현상이기 때문이다.
4·3학 석박사 과정 개설 주장..실현 불가능한 메아리
단도직입적으로 4·3학문후속세대를 길러내는 석·박사과정이 개설되려면 먼저 과정을 개설하는 학교에 4·3을 전공한 교수들이 있어야 한다, 토론회에서 발제자는 그동안 4·3진실규명운동에 공헌해 온 활동가들을 배출한 제주대학교에 석·박사과정을 두는 것이 좋겠다고 했는데, 이 학교출신인 논자로는 한편으로 부끄럽고 또 한편으로 뿌듯하긴 하지만 과연 우리대학이 석·박사과정을 개설하여 운영할 능력이 있는지 의심스럽다.
일찍부터 논자는 우리대학에 4·3을 연구하는 전문연구소도, 전문연구인력도 거의 없다는 점에 대해 부끄럽고 안타깝게 여겨왔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우리대학에 4·3관련 교육과 연구가 전혀 없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연구는 이 분야에 관심 있는 몇몇 교수의 개인연구일 뿐이고, 교육은 고작해야 학생들의 선택해야 제공되는 교양교과목 수준일 뿐이다. 논자부터도 4·3연구와는 거리가 먼 학문을 하는 입장에서 우리대학 교수들의 4·3에 대한 연구 관심이 낮은 점을 탓할 수는 없다.
결국 학문연구라는 것의 특성상 4·3연구가 대학 내에서 활성화되기 위해서는 학위과정에서부터 이를 전공한 자를 교수로 채용하는 길만큼 좋은 대안이 없을 것이다. 연구뿐만 아니라 교육을 위해서도 그렇다. 교육은 교사의 능력을 넘어서지 못한다는 것이 진리이기 때문이다.
현재 우리대학에서는 4·3교육도 연구도 너무나 빈곤한 처지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다. 이는 도내 다른 대학의 경우도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사정이 이러한데 학문후속세대 양성을 위한 석·박사학위과정을 개설하자는 주장은 도내대학의 현실에서 실현 불가능한 메아리로 들린다.
차라리 토론회의 자리에서 학부과정에 4·3교육 교과목의 교양필수화를 주장했다는 어느 토론자의 목소리가 더 현실성 있어 보인다. 사실 이마저도 쉽지 않을 것이란 점을 눈 밝은 독자들은 이해할 것이다. 교수자원이 없다는 점 외에도 학문선택의 자율성을 침해하는 필수과목을 설강하기란 쉽지 않다는 점도 부기해 둔다.
직업으로서 학문을 한다는 것, 쉽지 않아
사실 토론회 참가자들도 이러한 도내대학들의 4·3교육과 연구 환경을 모르지 않을 것이다. 아마도 교수자원의 충원을 전제하면서 석·박사과정 개설을 제안했을 것이라 여긴다. 그러나 교수충원을 전제하여 석·박사과정을 개설하면 대학원생들의 수요가 있을까? 석사는 몰라도 박사학위를 따는 것은 직업으로서 학문을 하겠다는 뜻이다.
직업으로서 학문을 한다는 것은 학문하는 행위 자체를 목적으로 삼는 것이라 하지만, 자본주의사회에서 자기 직업으로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일을 권유하거나 선택하긴 쉽지 않다. 논자 같은 행운아가 아니면 솔직히 일반 학문으로 학위를 받아도 전문연구원이 되거나 교수가 되기 쉽지 않은 게 한국사회의 현실이다. 과정초기 몇몇은 몰라도 자칫 고등실업자를 양산할 가능성이 크다. 전망이 이렇다면 과연 4·3만을 전공하려는 대학원생 수요가 있을지 솔직히 의문이다.
그러나 도내 대학에서 4·3교육과 연구는 결코 외면할 수 없는 과제이다. 토론회 참석자들이 이구동성으로 주장했듯 학문후속세대를 양성하는 과업도 매우 중요하다. 그렇다면 대안은 뭘까? 두 가지 방안을 제안하고 싶다.
대학 내 연구소 신설과 연구인력 확충부터
하나는 점진적인 접근으로, 우선 4·3교육과 연구 활성화를 위해 대학 내에 전문 연구인력을 두는 연구소부터 만들었으면 한다. 전임교수와 연구원들은 연구수행은 물론 학부의 4·3교육 활성화에도 기여할 수 있다. 대학 밖의 제주4·3연구소와 제주4·3평화재단 등에도 전문 연구인력을 더 두도록 하자.
이처럼 전문 연구인력을 필요로 하는 곳이 많아지면 자연스럽게 학문후속세대 양성에도 기여할 것이다. 예컨대, 현재 개설된 역사학과나 정치외교학과 등의 석·박사과정에서 4·3을 주제로 학위를 받으려는 대학원생들이 많아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환경을 만드는 데 제주도와 의회, 4·3평화재단 등이 행·재정적으로 대학을 지원해주었으면 좋겠다.
논자는 이것이 현 단계에서 4·3교육 활성화와 학문후속세대를 양성하는 빠른 길이라고 여긴다. 4·3학 석·박사과정 개설은 이러한 실험을 거친 다음에 해도 늦지 않다. 이러한 실험 없이 바로 석·박사과정부터 개설하면 과정 지원자도 별로 없을 뿐만 아니라 있다하더라도 '박사 실업자'만 양산할 가능성이 높다고 여겨진다.
또한 솔직히 이보다 더 우려되는 것은 혹시라도 협동과정으로 개설될 석·박사과정이 학문후속세대 양성보다는 그들을 양성한다는 명분으로 과정운영에 참여하는 교수들의 이권 장으로 그칠 가능성도 없지 않다는 점이다. 한국의 고등교육정책에서 이러한 사례를 종종 경험한 바가 있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4·3에서 ‘통일’ 문제까지 연구 범위 넓혀야
두 번째 대안은 협동과정의 석·박사과정을 개설하되, 분야를 확대하여 ‘4·3과 통일연구’ 과정으로 하는 방안이다. 이는 4·3만을 연구 분야로 한정하여 개설하는 석·박사과정의 한계들을 제한적으로나마 해결하는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현 고등학교 한국사교과서에 규정되었듯이, 4·3은 8·15광복 이후 자주적 민족통일국가 수립과정에서 일어난 민족사적 사건이다.
그렇다면 4·3연구의 범위에는 4·3자체에 대한 연구는 물론이고 분단된 현실의 극복과 통일된 국가의 미래상과 그 실현방안에 대한 연구까지 포함되어야 한다. 좀 더 세부적으로 이 과정에서는 첫째, 제주4·3의 학제적 연구, 둘째, 국제안보와 제주평화 연구, 셋째, 북한 및 통일문제 연구, 넷째, 4·3 및 통일교육론 연구 등을 연구 분야로 다룰 수 있다.
현재 제주에는 제주4·3평화재단, 제주4·3연구소, 국제평화재단과 부설 제주평화연구원 등 비슷하면서도 성격이 다른 학술연구단체가 있다. 제주4·3연구소는 그동안 4·3의 진실규명과 연구의 산실이었고, 제주4·3평화재단은 4·3에 대한 국가적 차원의 사과가 이루어지면서 세워진 곳이다.
반면, 국제평화재단과 제주평화연구원은 제주가 ‘평화의 섬’으로 지정 선포되면서 설립된 단체이다. 4·3재단과 연구소가 4·3자체의 진실규명을 바탕으로 평화연구를 지향한다면, 국제평화재단과 연구원은 국제안보 현실을 바탕으로 평화연구에 접근하는 것 같다. 전자가 진보적이고 국제정치에 대한 이상주의적 접근을 주로 한다면, 후자는 보수적이고 현실주의적 접근을 보여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구분은 논자 개인의 자의적이고 상대적인 구분일 뿐이고, 학문적 접근의 평화연구에서는 모두 필요한 시각이라 본다. 그렇다면 이러한 단체들에 필요한 인적자원과 학문후속세대가 길러져야 한다. ‘4·3과 통일연구’ 석·박사과정이 개설된다면 그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5·18민주항쟁을 겪은 전남지역의 대학에도 5·18을 연구하는 연구소는 있지만, 이른바 5·18학 석·박사과정은 따로 없는 것으로 안다. 개별학과나 유관 분야의 협동과정에서 학문후속세대를 길러내고 있다. 도외 일부 대학에 북한학과 혹은 북한학대학원이 개설된 경우가 있는데, 여기서는 북한학, 안보 및 평화학, 통일문제 등을 연구하고 교육한다.
논자가 제안하는 ‘4·3과 통일연구’ 과정과 비슷하다. 그러나 타 지역의 북한학 과정이 중앙중심의 접근이라면, 논자가 제안하는 과정은 지역의 문제인 4·3을 토대로 평화와 통일연구로 나아간다는 특징을 가질 수 있다. 뿐만 아니라 4·3연구는 평화나 통일의 주제뿐만 아니라 인권과 민주주의, 생태와 정체성 등 훨씬 더 넓은 인문적 가치와 정신을 탐구해나가는 통합학문이 될 수 있다. 이러한 점은 길러낸 학문후속세대가 직업적 봉사의 길을 찾아가는 데도 일정 기여를 할 수 있다.
강봉수(姜奉秀). 제주시(애월읍 어음리)에서 태어나 제주대학교 사범대학을 졸업하고,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동양철학과 도덕교육학을 전공하여 문학석사와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현재 제주대학교 사범대학 윤리교육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재야연구단체인 사단법인 제주대안연구공동체의 연구원장직을 맡아왔다. 때로 일반시민을 대상으로 인문학 강좌를 열었고, 한국(제주) 사회와 교육의 민주화를 위해 시민운동진영에도 기웃거리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