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내 심장이 갖고 싶어요?”
박찬욱 감독 영화 《헤어질 결심》에서 해준(박해일)은 서래(탕웨이)의 중국어를 번역기 오류로 잘못 이해한다. 그러나 그 의미마저 잘못 전달되지는 않는다. 해준은 이미 서래가 자신에게, 그리고 자신이 서래에게 마음이 있음을 직감한다. 이 대사 한 마디가, 이 영화 전체를 설명하고 있다고 믿는다.
이 영화는 모든 경계를 허물고 가로 지르는데 선수다. 개연성이 달리 필요치 않다. 서래가 머물고, 해준이 지켜보는 방안 벽지마저 색상이 녹색인지 파란색인지, 그림이 산인지, 바다인지 알 수 없다. 번역 오류조차 사랑으로 해석하는 이 영화는 '이포'라는 안개 자욱한 지역을 배경으로, ‘미결’이란 이름의 서사를 풀어낸다. 헤어질 결심에서 사랑이 시작되는 이 영화는 역설적이게도 불확실성으로부터 선명함을, 불완전으로부터 확신을 얻는다.
그뿐인가. 형사와 용의자, 남성과 여성, 중국인과 한국인, 산과 바다, 까마귀와 고양이 조차 서로 가진 성질이 반대되는 것이 방해되지 않는다.
서래와 해준은 사물의 본질이 가진 특수성의 차원을 무질서하게 넘나들며 경계를 허문다. 그렇게 사랑이라는 문법마저, 기존 틀을 깨고 ‘상실’로 부터 사랑이 시작되는 기이한 영화다. 나는 그렇게 사람들의 고정관념을 헤집는 이 영화의 전개방식 덕분에 ‘N차 관람'이라는 유행이 만들어 졌다고 본다.
이 영화는 ‘추리물'이나 ‘수사극'의 장르를 넘어 관객들이 오히려 추리를 포기하게 만들고, 모든 상황을 받아들이게 몰아세운다. 범인을 찾는 영화치고, 진짜 범인이 누군지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게 된다. 그들이 서로 사랑하는가, 또는 아닌가가 훨씬 더 중요해진다.
《헤어질 결심》이 가진 마력이다.
공감, 무너지고 깨어짐
보는 이들의 감정을 인물에게 온통 스며들게 하면서, 서래는 자신의 사랑을 지속하기 위해 삶을 끊임없이 ‘미궁’에 밀어넣는다. 몸을 꼿꼿이 하고, 모든 것을 똑바로 보려고 노력하는 두 사람의 감정 역시 오히려 ‘붕괴’될 수록 솔직해진다. 이런 말도 안되는 상황이 오롯하게 납득된다. 사랑한다는 말 한번 없이 진행되는 ‘서래와 해준의 사랑’을 익히고(learn) 함께 익어가는(ripe) 과정을 따라가며 관객들은 영화와 공전한다. 좋아하는 남자를 한 번 더 보기 위해, 살인을 계획하는 일조차도 공포스럽지 않을 정도다.
“내가 그렇게 나쁩니까” “참 불쌍한 여자네" 라는 서래의 말은 저절로 연민을 일으킨다. 이때 가장 강력한 형태의 공감이 형성된다. 두 마디 대사를 통해, 나름대로 극악무도한 일을 저지른 서래에게 관객들은 오히려 감정적 지지를 보낼 수밖에 없어진다. 관객들은 ‘붕괴'된다.
한국은 서래와 같은 여성, 중국인, 외국인 노동자, 가정폭력 피해자에 관대한 국가는 아니다. 그럼에도 서래라는 인물을 이미 사랑하게 된 관객들은 그녀를 옹호하게 된다. 서래라는 인물이 가진 여러 정체성 덕분인지도 모르겠다.
‘사랑이 필요한 이유'
서래라는 인물을 따라가다보면 ‘정치는 필연적으로 감정적일 수밖에 없다'는 말이 떠오른다. 정치철학자 누스바움의 책 《타인에 대한 연민》에 언급된 내용이다.
서래의 살인이나 살인계획을 옹호하자는 뜻은 아니다. 서래의 특정한 정체성을 넘어 인간 자체로 바라보는 경험을 기억하자는 의미다. 틈만나면 성별, 인종, 장애여부, 성적지향, 직업 등으로 편가르기를 하는 실제 사회와 달리 《헤어질 결심》은 ‘사랑'을 기반으로 차이 또는 사회에서 말하는 결점마저도 문제가 되지 않게 만든다.
누스바움은 다른 책 《정치적 감정》에서 그렇기 때문에 ‘사랑'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정치적으로 의미있는 사회적 감정들을 키워나가는 일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예컨대 좋은 법과 제도는 지속적으로 감정적 지지가 필요하고, 사회를 악화시키는 나쁜 감정들에게 보호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좋은 정치가, 좋은 지도자라면 타인과 연결될 수 있는 사회를 형성하는 일에 역할을 두고 두려움이나 시기, 질투심 같은 적대적 감정을 이용하려는 태도는 버려야 한다고 제안한다.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늘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은 욕구, 욕망이 저절로 발현되는 것을 상상할 때, 누스바움의 이야기는 들을 가치가 있다.
그렇게, 《헤어질 결심》을 익히다
있는 자체로 아름다움을 음미하고 싶은 영화를 두고 정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쉽지도 않고, 과연 바람직 했는가 수백번 자문하게 만들지만 어떤 관객의 《헤어질 결심》에 대한 또다른 찬사 방식이다.
영화가 끝났을 때, 여러번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느꼈던 감정을 되짚으며 서래와 해준의 한 마디에 마음이 붉어지고 파래지는 경험을 내내 했다.
본래 이 글은, 2022년 말에 나왔어야 했다. 그러나 좋아하는 영화를 해석하는 일은 꽤나 고됐다. 결국 해를 넘겼다. 나로선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중단시키고 ‘잉크처럼 퍼지는’ 감정에 온전히 담겨있는 고요한 상태가 되었을 때, 마침내 박찬욱과 정서경이 다가가고자 했던 사랑의 본질 근처에서 헤맬 수 있었던 것같다. 그리고 비로소 《헤어질 결심》에 대해 글을 몇 자 적어볼 수 있었다. 당신도 이 영화를 그렇게 한 번 바라볼 수 있기를 바라 본다.
김혜미
주의! 저는 영화를 따로 공부하거나 정치학을 전공한 사람이 아닙니다. 다만 영화와 정치를 많이 사랑하는 한 사람의 글로 읽어주세요. 또한 이 연재에서 같이 볼 영화들은 오래된 영화일 경우가 있을 거에요. 현재 사회적 통념과 시대성이 변화한 만큼 옛 영화를 다시 꺼내보는 일은 꽤 고루하게 느껴질 수도, 지루할 수도 있지만, 같이 고민해봐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