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체가 하늘로 발사되는 소리. 폭탄에 의해 땅에서 집기가 무너지는 소리. 전자는 출발을 의미하고, 후자는 끝을 의미하지만 영화 《가가린》에서 두 사건은 엇비슷한 소리를 낸다. 이 영화는 굉음으로 끊임없이 관객의 머리와 몸을 깨운다.
영화 속 배경은 2019년에 철거된 프랑스 파리 남부의 ‘가가린 주택단지(Cité Gagarine)’다. 철거되기 직전 영화를 촬영한 것으로 알려졌다.
‘가가린'은 1960년에 프랑스 공산당에 의해 지어진 아파트 단지로, 러시아 최초 우주비행사 ‘유리 가가린'의 이름을 붙였다. 그렇기에 영화는 종종 실제 상황을 담은 영상을 교차로 보여준다. 1963년, 유리 가가린이 주택단지를 찾아와 인사하는 장면을 비추는것이 대표적이다.
장르로는 SF영화이긴 하나, 영화에 유리 가가린이 환상처럼 등장하거나, 프랑스 공산당이 영웅처럼 나오지는 않는다. 2010년대를 살아가는 평범한 주민들이 영화의 주인공이다. 1970년 이후 프랑스에 탈산업화가 진행되며 노동자들이 떠나고 그 자리를 이주민과 빈민들이 채우게 되었던 사실과 일치되는 전개다. 그렇게 그곳에 살며 우주비행사를 꿈꾸는 ‘유리(알세니 바틸리)' 라는 인물이 영화를 진행시킨다.
‘집'이 ‘건축물'이 될 때
유리는 ‘가가린'을 지키기 위해 끊임없이 움직이는 사람이다. ‘집’이 ‘위험 건축물’로 분류되어 ‘철거' 되는 것을 막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고장난 이곳 저곳을 수리하고, 가가린 단지의 수명처럼 깜빡거리는 조명들에 빛을 달아준다. 그렇게 서먹하고 척박했던 주택단지에 다시 생기가 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안전 조사단이 방문한 그날, 한 주민이 불을 지른다. 그리고 가가린은 철거 판정을 받는다.
실제로 2018년 말 마르세유에서 건물 내 가스누출로 인해 대형 화재와 붕괴로 인한 사망사고가 발생하며 파리시는 노후주택에 대한 경각심을 갖게 된다. ‘고위험 건물'에 대한 수리지원이나 관리를 강화시킨다. 물론 안전한 주거환경을 보장하는 것이 정부의 역할이자 의무이겠지만, 역설적으로 그러한 행정이 가가린 주택단지에 기거하는 이들의 생활을 빼앗는다. ‘집'이 ‘건축물'이 되는 순간이 그렇다.
한 순간에 위험 건축물이 되어버린 가가린에서 사람들은 떠날 채비를 한다. 오로지 ‘유리'만을 제외하고. 오히려 유리는 가가린의 가장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 집이자, 건축물인 ‘가가린'의 쓸모를 바꾼다. 당장이라도 지구를 벗어날 수 있을 것처럼 주택 내부를 비행선으로 개조한다. 토마토가 열리는 온실을 짓고, 콘크리트 벽면을 허물어 각 장소의 중력을 깬다. 자신 역시 세입자 또는 거주자에서, 탐험자 또는 개척자로 변신한다.
구조로 끝나는 결말
그러나 밖은 철거 집행이 계속된다. 전기와 가스가 끊기고, 집을 구성했던 자재들은 쓰레기 더미가 된다. 유리는 더 악착같이 그곳에서 버틴다. 그리고 결국 자신이 만들었던 우주 속에서 친구들에 의해 구조되는 모습으로 영화가 끝난다.
이렇게 이 영화를 결론지으면 다소 아쉬울 수 있지만, 늘 그렇듯 현실이다. 영화를 본 많은 사람들은 공동체를 지키려고 애쓰는 유리의 모습에 감동하고, 결국 한순간의 굉음속으로 사라지는 가가린의 모습에 마음 아팠을 것이다. 나또한 그랬다.
하지만 이런 일은 꽤 자주 있다. 불과 며칠전에도 한국에선 ‘노점없는 거리' 사업에서 쫓겨나지 않기 위해 버틴 노점상인들에게 법은 ‘법정구속형'을 선고했다.
다만 이 영화가 가진 힘은, 그 비슷한 빈곤의 자리에 드나드는 현실이 꽤나 다른 힘을 가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중력에 발붙여 다른생각을 금기시하는 사회에서 감독들은 ‘유리’라는 인물로 뾰족한 질문을 던진다.
진짜 우리가 이대로 살아도 괜찮은지.
유토피아는 있는가? 진짜로?
가가린이 폭발되기 직전, 그 앞에 모여있는 주민들의 얼굴 표정과 분위기 연출은 이 영화에서 가장 압도적인 부분이라 생각된다.
특히나 실제로 그곳에 살았던 사람들도 출연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영화에서 가장 고요한 장면이지만 다양한 삶의 에너지가 모아지는 장면이기도 하다. 그러면서 무너지는 가가린 속을 유영하는 ‘유리’의 모습은 아슬아슬하고 무척 아름답다.
영화가 끝으로 갈수록 하나의 질문이 명징하게 부상한다. 나를 불행하게 만드는 불안에서 벗어나 ‘좋은 삶이란 무엇인가’ 라는 물음이 말이다.
한국에선 <리얼 유토피아>로 잘 알려진 에릭 올린 라이트는 본인의 저서 <21세기를 살아가는 반자본주의자를 위한 안내서>에서 이렇게 말하곤 한다. “행복한 삶을 누리기 위한 사회적 수단은 물질적 수단보다 복잡하며, 이런 사회적 수단 목록을 작성하면 논쟁적인 항목들이 거의 확실하게 포함될 듯하다.”
개인에게 살 수 있는 집이 필요하다는 것은 반박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어디서, 어떻게, 누구와' 살고 싶은지를 정하는 일에 대해선 논쟁이 벌어진다. 우리에게 더 소중한 것은 그 시끄러움을 감당하고 논의하는 게 아닐까.
독일의 사회학자 하인츠 부데는 <불안의 사회학>에서 개인이 자립하려는 노력과 공동체적 연대감의 균형이 무너졌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불안이 커지고 있다고 지적한다.
동시에, “불안에 대한 침묵이 깨지면, 개인적인 문제인 것 같은 불안이 공적이고 보편적인 것으로 드러나는 것은 특정 사회역사적 순간을 위해 유익하다. 불안해하는 자아는 불안의 주체로 호명되고, 자신의 결함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이제 불안은 더 이상 개인들을 분리시키지 않으며 하나로 묶어준다.”고 말한다.
역사적으로 가장 풍요롭다고 하는 반면, 부쩍 우리가 지키고자 하는 공적 가치들이 무너지는 느낌을 자주 받는다. 어쩌면 늘 홀로, 스스로 견뎌야 한다는 압박감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 억압적인 중력에서 벗어나, 불안이라도 안심하고 나눌 수 있는 사회를 겪을 수 있기를 바라본다. 그래도 구조될 수 있는 손 하나는 누구나 잡을 수 있는 세상은 허락되어야 하지 않는가.
김혜미
주의! 저는 영화를 따로 공부하거나 정치학을 전공한 사람이 아닙니다. 다만 영화와 정치를 많이 사랑하는 한 사람의 글로 읽어주세요. 또한 이 연재에서 같이 볼 영화들은 오래된 영화일 경우가 있을 거에요. 현재 사회적 통념과 시대성이 변화한 만큼 옛 영화를 다시 꺼내보는 일은 꽤 고루하게 느껴질 수도, 지루할 수도 있지만, 같이 고민해봐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