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덜떨어진 지식인의 글’이라는 구절에서 ‘덜떨어진’과 ‘지식인’, ‘글’ 중 핵심적이거나 중심이 되는 단어는 무엇일까. ‘덜떨어진’이다. 이른 아침부터 형편없는 글을 하나 읽었더니 속이 쓰리다. 그 글은 이렇게 시작된다.
“‘탁월한 사유의 시선’이라는 구절에서 ‘탁월’, ‘사유’ 그리고 ‘시선’ 가운데 가장 핵심적이거나 중심이 되는 단어가 무엇인지를 물으면 ‘탁월’이나 ‘사유’를 고르는 사람도 적지 않다. 생각하는 훈련이 충분하지 않으면 논리보다는 자신의 감정을 더 믿는다. 그러면 중심이 되는 단어를 고를 때도 문법에 따르기보다는 감정에 따라 고르게 된다. 생각의 질서인 논리보다는 평소 자신의 정서적 습관을 적용하는 것이다. 이 구절에서 중심 단어는 ‘시선’이다. ‘탁월’이나 ‘사유’는 ‘시선’을 수식하고, ‘시선’은 수식을 받는다. 수식을 받는 쪽이 주인행세를 하는 중심이다.”([최진석 칼럼]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날지 않는다, 중앙일보)
그러나 이 예시에서 피수식어인 ‘시선’은 ‘탁월’과 ‘사유’가 없으면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 ‘시선’이라는 단어 그 자체는 텅 빈 기호일 뿐이다. 수식이 비로소 의미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앞서 제시한 ‘덜떨어진 지식인의 글’에서도 ‘글’과 ‘지식인’은 별 의미가 없다. 그저 보통명사일 뿐이다. ‘덜떨어진’이 저 구절의 핵심이다. 가치판단을 담기 때문이다. 가치판단은 ‘생각의 질서인 논리’를 통해 이뤄진다. 즉, 지시대상과 기호 자체보다 그에 대한 가치판단이 중요하다. 방향성과 사유가 담기기 때문이다. ‘생각하는 훈련’을 이어가지 않으면 이런 부분을 망각하게 되는 것일까.
서강대 명예교수인 최진석은 이 글에서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는 표현을 두고 “과학적이라기보다는 그저 선동의 문구”라고 말한다. “중심의 자리를 차지하려는 ‘좌’쪽에서 ‘우’를 무너뜨리기 위한 전술적 목적에서 나왔다”고 주장한다. 부정적인 선입견을 불어넣고 정보조작을 하면서 선전 효과를 내려는 행위를 선동이라고 말한다면 최진석의 이 글이야말로 선동의 좋은 사례다. 새가 좌우의 날개로 나는 것은 과학적 사실이다. 반증하려면 새가 한쪽 날개로 나는 사례를 딱 하나만 가져오면 된다. 가끔 철학을 한다는 사람들이 과학적 사실을 우격다짐으로 끌어들이며 몽매한 주장을 늘어놓는 경우를 보게 되는데, 이 경우가 그렇다.
최진석의 다른 글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인간은 개구리와 다르다. 진화를 선택한 동물과 달리 인간은 문화를 선택하였다. 문화는 진화에 비해 시공간적 또는 질적이고 양적인 면에서 모두 확장성이 훨씬 더 크다. 진화는 ‘필요’가 만들지만, 문화는 지금 당장 필요치 않은 것을 향해 나아가는 무모함에 기대는 바가 크다.”([최진석의 노장적 생각] 허무(虛無)와 득도(得道)) 진화라는 개념을 오해하는 경우가 많긴 하지만 이 정도면 진화에 대해서 전혀 공부하지 않았다고 봐도 무방한 지경이다.
최진석은 빈곤한 논리 구조를 보이는 글에서 좌우의 통합을 위해 애쓰지 말자고 말한다. 그러면서 이런 결론을 낸다. “분열을 극복하려면 분열 주체들 간에 애매하게 타협하고 균형을 맞추려 할 필요 없다. 분열을 압도하는 비전으로 미래를 향해 서둘러 전진하면 된다.” ‘분열을 압도하는 비전’? 그게 뭘까. 권위주의와 전체주의인가.
좌우의 통합에 이처럼 부정적인 이유는 뭘까. 최진석은 이렇게 말한다. “공산국가에서 직접 살아본 나는 가난과 독재보다는 풍요와 자유가 더 좋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바로 이어지는 문단에 “생각하는 능력이 없으면 세상의 변화에 자신을 맞춰가며 삶을 확장하기보다 자신에게 한 번 들어온 철심처럼 굳은 이데올로기를 지키는 일이 훨씬 더 중요해진다. 정의와 진리의 수호자라는 착각까지 동반하니 고치기가 더 어렵다.”고 썼다. 자신을 겨냥하고 있는 이 문장에 동의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