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3℃
몽롱해 온다. 아무 일도 하고 싶지 않다. 찬물을 끼얹고 선풍기 앞에 드러눕는다. 하릴없이 잠이나 자고 싶다.
리모컨을 만지작거린다. 켤까? 아니 버티자. 그러다가 다시 리모컨을 잡는다. 온(ON)만 누르면 이 무력감에서 벗어날 것 같다. 누를까? 아니다. 아직은 견딜 만하다.
턱없이 오른 전기료 때문만은 아니다. ‘에어컨’이라는 놈, 나한테는 찬바람을 보내고 그 대가로 밖으로는 더운 바람을 보낸다. 나 좋자고 누군가에게는 폐를 끼치는 물건이다.
이렇게 말하고 보니 내가 뭐 대단한 이타주의자, 생태주의자 같아 보인다. 아니다. 나는 평소 에어컨을 무지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런 내가 요즘 좀 이상해졌을 뿐이다. ‘기후 위기’라는 것을 공부하다가 생긴 증상이다. 갑작스러운 증상인 만큼 잠깐 이러다가 다시 예전 버릇 그대로 에어컨을 껴안고 살지도 모른다. 아무튼 지금은 에어컨을 멀리하고 있다.
친구가 묻는다. “왜, 지구를 살려 보려고?”
밉다. 그래도 너그럽게 대답한다. “지구보다 우선 내가 살아보려고.”
2015년 유엔 기후 변화 회의에서 ‘파리 협정(Paris Agreement)’이라는 게 채택되었다. 이 협정은 지구 온난화가 얼마나 심해졌는지를 경고하고 있다. 지구 평균 온도 상승 폭을 산업화 이전에 비해 2℃ 이하로 유지해야 하며, 가급적 1.5℃ 이하로 제한하라는 것이다.
나는 그동안 2℃ 상승’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해보지 않았다. 그저 ‘엄청 더워졌네. 그래 폭염 기간이 많이 늘었어. 지구 온난화가 맞긴 맞네’라는 수준이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고 한다. 2℃ 상승을 넘어서는 순간, 지구에는 커다란 재앙이 닥쳐온다는 것이다. 고작 2℃ 상승만으로.
단순히 폭염에 의한 사망자 증가를 말하는 게 아니다. 사회를 움직이는 시스템 자체가 붕괴한다는 의미다. 세계적으로 식량 생산이 절반 이하로 줄어들고, 대규모 난민이 발생하며, 곳곳에서 폭동이 일어난다. 아프리카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한국 사회도 예외가 아니라고 한다.
지난 7월 10일, 제주 북부는 37.3℃를 기록했다. 내 살의 온도보다 높았던 시간이다. 그날도 나는 ‘어쩐지 지독하게 덥더라’ 하면서 천천히 뜨거워지는 냄비 속 개구리처럼 투덜대고만 있었다.
친환경 수소 트램?
세계 7위의 온실가스 배출 국가인 한국, 상위권인 만큼 국제사회에서의 책임을 다해야 한다. 전기차, 수소차 이야기가 일상화된 것도 그에 부응하려는 작은 변화이긴 하다. 물론 전기차라고 해서 온실가스 배출 책임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니다. 전기 생산에서 여전히 과거의 화석 연료가 주로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가. 수소로 주행하는 교통수단이 거론되고 있다. 10년 전에 백지화 되었던 트램 도입 이야기가 다시 제주 사회에 등장한 것이다. 예전보다 진화한 형태로.
전기선이 공중에 복잡하게 깔린 트램(路面電車)이 아니다. 열차 자체에서 수소와 산소를 결합하여 전기를 생성한다. 그리고 그 전기로 움직이는 방식이다. 이것이야말로 온난화와는 거리가 먼, 친환경 교통수단이라고 한다.
아주 좋은 이야기다. 현실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아니 현재의 대중교통을 혁명적으로 뜯어고친다는 전제가 있다면 말이다. 하지만 그것이 없다면 친환경 수소 트램은 옥상옥에 불과하다.
먼저, 더 큰 교통 혼잡을 불러올 것이다. 트램은 차선 하나를 고스란히 사용해야 한다. 그렇지 않아도 교통 체증이 심각하다. 그런 상황에서 차선 하나를 줄인다? 운행 차량 수를 획기적으로 줄이지 않는 한, 교통 혼잡은 불 보듯 뻔하다.
두 번째, 비용 문제도 심각하다. 10Km 구간을 만드는 데에 4500억 원이 소요된다. ‘도민 기본소득’으로 전환한다면, 성인 1인당 100만 원 가까이 지급해 줄 수 있는 액수다. 그런데 그걸 가지고 특정 토건업자들의 주머니를 채워주겠다는 말이다. 게다가 그 토건업자들과 결탁한 세력 또한 이권을 챙길 것이고.
물론 그런 비용을 들이고도 주민의 삶에 큰 편리를 가져다준다면 추진할 수도 있다. 그러나 최근 열린 ‘제2회 제주형 수소트램 활성화를 위한 정책 포럼’ 내용을 들여다보면, 주민의 복리와는 거리가 한참 멀다.
포럼에선 현재 제주특별자치도가 진행하는 ‘트램 도입 사전타당성 검토 용역’에서 검토한 개략적인 노선이 공개됐다. 모두 다 경제적 타당성이 결여됐다. 용역진이 발표한 노선은 모두 공항을 거친다. 최우선 노선은 병원이나 시장을 연결하는 노선도 아니다. 다시 말해, 주민 편의라는 기본 목적은 실종됐다. 그렇다면? 업자의 돈벌이만을 위해서 도입하는 꼴이다.
결국 ‘친환경 수소 트램’이라는 말은 이런 이해관계를 숨기기 위한 수식에 불과하다.
트램 도입에 앞서 해야 할 일들
그러함에도 나는 수소 트램을 긍정적으로 생각한다. 앞서 말한 조건들을 실현한다는 전제하에서는. 그 조건은 다음과 같다.
먼저 대중교통 정책에 있어서 확고한 철학이 있어야 한다. 그 핵심은 자동차 위주가 아니라 사람 위주다. 그 철학에 따라 정책의 우선순위가 매겨져야 한다. 보행자-자전거-버스-택시-승용차 순이다.
첫째, 보행자 우선. 걷고 싶은 도로를 만들어야 한다. 출퇴근길을 올레길 이상으로 조성해 야 한다. 가로수가 넉넉해야 하는 것은 필수다. 걷기 열풍을 출퇴근길로 흡수할 수 있을 정도로 공을 들이면 좋겠다.
더하여 보행자 수당(일명 뚜벅이 수당)을 지급해줘야 한다. 차를 소유하지 않은 성인을 대상으로 일정 정도 수당을 지급하는 것이다. 그래야 공평해진다. 그들은 교통 혼잡을 유발하지 않았다. 그런 만큼 그들에게 보상하는 것은 정당하다.
두 번째, 자전거. 현재 제주의 자전거 도로는 전적으로 쇼다.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은 다 안다. 교차로마다 턱이 나오는 도로, 울퉁불퉁한 도로. 이런 지전거 도로를 이용하느니 차라리 위험을 무릅쓰고 차도에서 달리는 게 낫다는 것을.
다음으로 버스. 노선을 종과 횡으로 촘촘히 짜야 한다. 그리고 종과 횡이 만나는 어느 곳에서나 환승이 가능하게 해야 한다. 그래야 주민들 삶 속에 있는 대중교통이 될 것이다. 지금처럼 ‘돈 되는 노선’ 중심의 편성은 승용차를 몰고 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든다.
영리를 넘어서는 노선 편성은 ‘버스 완전 공영제’를 통해서 가능하다. 지금처럼 매년 1,000억 원 이상을 쏟아 붓는 ‘준공영제’는 버스 업계의 배만 불려줄 뿐이다. 버스 업계와 협의하면서 일정 기한이 지나면 전면적인 ‘완전 공영제’를 시행해야 한다. 여기에는 철저한 사전 준비와 과감한 집행이 필요하다.
마지막으로는 자가용 승용차. 나 역시 승용차를 자주 이용한다. 하지만 대중교통이 편리하다면 굳이 내 차를 끌고 나올 생각이 없다. ‘버스 완전 공영제’, 생활 밀착형 대중교통 시스템을 만든 후에는, 승용차 소유 자체가 부담이 되도록 제도를 개편해야 한다. 자동차 보유세, 도심 진입료(교통 혼잡 유발 부담금), 주차료 등을 제법 무게 있게 부과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가로수가 무성해지고, 걷는 사람이 많아지고, 자전거 타기가 즐거워지고, 버스를 효율적으로 이용하게 되고, 도로가 한산해진다면, 그때 나는 수소 트램 도입에 적극 앞장서겠다.
하여 다시 묻는다. 오늘 트램은 주민 편의를 위한 것인가, 토건업자들을 위한 것인가.
이영권
역사사회학을 전공하고 《새로 쓰는 제주사》, 《제주역사기행》 등을 저술한 이영권 박사는 제주4.3연구소, 제주참여환경연대 등에서 활동한 바 있고, 일선 학교현장에서 역사 교사로 오랜 시간 교편을 잡았다. 2022년부터 제주투데이 논설위원으로 위촉된 이영권 위원의 칼럼은 매달 두번째 금요일 게재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