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울하게 맞이했던 연말연시

어둡다. ‘희망찬 새해’라는 덕담들이 오갔지만, 여전히 칙칙하다. 아니 더욱 암울해진다. ‘날리면’ 외교 망신도 참담한데, 선제 타격, 확전 등의 거친 말로 국민을 불안하게 한다. 그렇다고 안보에 내실이 있는 것도 아니다. 북한 무인기가 대통령 경호 구역(P-73)까지 진입할 정도다.

국내 정치도 말할 게 없다. 가족, 측근들의 비리 의혹은 덮고, 정치 반대 세력에겐 무분별한 압수수색으로 일관한다. 추락한 경제는 회복 전망이 보이지 않고, 이태원 참사에서 보듯 국민 안전에는 무심하다. 국정 운영에 대한 긍정 평가를 할 구석이 보이지 않는다, 힘없는 서민들의 삶만 더욱 팍팍해질 전망이다.

제주도 상황도 그러하다. 서광로, 비자림로엔 나무들이 뽑혀나간다. 민주당 도정으로 바뀌었지만 국민의힘 도정과 차이를 느끼지 못한다. 선거 공학에만 뛰어날 뿐, 정작 행정 철학은 빈곤해 보인다. 이권 챙기기와 자리 나눠 먹기 외에는 한 일이 없는 것 같다.

2022년 5월 11일 제주시청 앞에서 제2공항 백지화를 촉구하는 결의대회가 열렸다 (사진=김재훈 기자)
2022년 5월 11일 제주시청 앞에서 제2공항 백지화를 촉구하는 결의대회가 열렸다 (사진=김재훈 기자)

무엇보다 걱정인 것은 제2공항 문제다. 지난해 말 뜬금없이 핵무기 배치 논란이 일었다. 국민의힘 북핵특위에서 이 문제를 다뤘다는 것이다. 이에 국민의힘은 서둘러 진화에 나섰다. 특위의원 일부의 견해일 뿐이라는 해명이었다. 국민의힘 제주도당은 더욱 적극적으로 나서면서 100% 오보라고 주장했다.

여기서 국민의힘 제주도당의 태도는 상당히 실망스러웠다. 왜 특위를 쉴드치는가. 만에 하나의 가능성에 대비해서 도민의 안전을 먼저 주장했어야 하지 않는가. 중앙당을 다그치며 다시는 그런 구상조차 못하게 압박했어야 한다. 중앙당의 패착을 염려하기 전에, 제주도민의 안위를 먼저 걱정했어야 한다. ‘국민의힘’ 이전에 ‘제주도당’임을 기억할 때, 도민의 선택을 받을 수 있다는 걸 명심하기 바란다.

국토부도 급해졌던 것 같다. 순수 민간공항으로 건설할 것이라는 보도자료를 곧바로 냈다. 하지만 제2공항이 군사공항으로 활용될 소지는 다분하다. 국방부는 오래 전부터 탐색부대 배치 계획을 숨기지 않았다. 또한 민간공항으로 건설하더라도 군공항을 겸할 수 있다. 강정해군기지도 공식 명칭은 ‘제주민군복합형 관광미항’이다. 명분과 실질은 얼마든지 다를 수 있다.

도민을 우롱하는 국토부의 비공개 행정

문제의 제2공항과 관련해서 국토부는 연초부터 제주도민을 우롱했다. 지난 1월 5일, 국토부는 '제주 제2공항 전략환경영향평가서 본안'을 보완해 환경부에 넘겼다. 지난 2021년 7월, 문제가 많다며 환경부가 국토부로 돌려보냈던 문서다.

그렇다면 무엇을 보완했을까? 보완이 가능하긴 한 건가? 중대한 문제임에도 제주도민은 그 내용을 모른다. 심지어 제주도지사조차 알지 못한다. 국토부는 일부 원론적인 내용만을 보여줬다. 나머지는 환경부와 협의가 끝난 다음에 공개하겠다는 입장이다.

이 말은 일이 다 끝나고 나서 보여주겠다는 것과 같다. 이렇게 되면 제주도민은 주인이 아니고 대상일 뿐이다. 주권을 가진 국민이 아니라, 잠시 체류 허가를 받은 외국인인 셈이다. 그게 아니라면 자기 행위의 결과를 합리적으로 판단할 의사능력이 없는 ‘금치산자’라는 말이다.

제주 제2공항 건설 논란과 관련, 제주도민들은 제2공항 건설보다 현 제주국제공항 시설 확충에 더 선호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제2공항 찬반 여론도 찬성 의견보다 반대 의견이 20% 이상 앞선 것으로 조사됐다.(이미지=제주MBC 유튜브 갈무리)
제주 제2공항 건설 논란과 관련, 제주도민들은 제2공항 건설보다 현 제주국제공항 시설 확충에 더 선호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제2공항 찬반 여론도 찬성 의견보다 반대 의견이 20% 이상 앞선 것으로 조사됐다.(이미지=제주MBC 유튜브 갈무리)

내 삶을 내가 결정하지 못한다? 신분제 사회에서의 노예인가? 이것은 민주시민의 자기결정권을 부정하는, 국민을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는, 지독한 독재적 사고에서 나온 행태다. 설혹 제2공항을 찬성하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최소한 민주주의의 가치를 신봉한다면, 이 문제는 지적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진정한 보수다. 혹자는 법률에 의거해 비공개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는 법률 이전에 가치의 문제다.

더하여 제주도지사마저 패싱 당했다는 건 충격이다. 제주도지사라면 제주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관장할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제주‘특별자치’도가 맞긴 한 것인가? ‘특별자치’에서 ‘특별’은 ‘실권 없음’을 뜻하는 것인가? 도지사가 허수아비처럼 느껴지는 경험도 처음이다.

하긴 말로만 ‘제주도민의 자기결정권’을 떠들었을 뿐,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은 도지사 본인이 자초한 일이긴 하다. 무너진 도민 자존심을 되살리고 도민결정권을 확고히 세우려면, 오영훈 도지사는 ‘필사즉생(必死卽生)’의 각오로 이 문제에 나서야 한다. 도지사직에 연연하며 어정쩡하게 눈치나 볼 것이라면 ‘필생즉사(必生卽死)’라는 결과만을 낳을 것이다.

위기에서는 자신을 던져야 산다. 도지사직을 잃더라도 제주도를 지킨다면 그는 제주 역사에 ‘장두’로 기록될 것이며, 그 반대라면 뻔한 정치인 중 하나로 잊혀 갈 것이다.

왜 숨길까?

‘숨기는 자가 범인이다’라는 건 상식이다. 그런데 그런 비난을 들으면서도 그들은 왜 숨길까?

비난 이상의 보상이 있기 때문이다. 기득권층의 이익을 위한 일이기에 특권과 금전적 혜택이 상당하다. 이게 강한 추동력이다. 하지만 그런 사적 욕망은 숨기고 대의명분을 내세운다. 사회 전체를 위한 일이라며 합리화하고, 공적 가치와 의미를 부여한다. 과정에서 생기는 부패 역시 필요악이라며 감싼다. 이런 정당화는 필연이다. 그래야 자기 분열 없이 당당하고 떳떳하게 일을 벌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욕을 먹더라도 ‘무조건 고’다.

물론 이런 적나라한 욕망만이 전부는 아니다. 사명감으로 충만한 경우도 있다. ‘숭고한 뜻을 우매한 백성들이 헤아리질 못하니, 내가 욕을 먹더라도 비공개로 일을 완수할 수밖에 없다’라는 사고가 그것이다. 이런 의식구조를 가진 헛똑똑이 엘리트들을 종종 봐왔다. 그들은 나름 대단히 진지하다.

2016 제 1회   '으랏차차, 세우다' 작품 공모전 대상작 '개, 돼지' 
2016 제 1회  '으랏차차, 세우다' 작품 공모전 대상작 '개, 돼지' 

전직 제주도지사이자 국토부 장관 원희룡은 어떤 동인을 가지고 제2공항을 추진하고 있을까? 첫 번째 요인인 사적 탐욕은 내가 잘 모르겠다. 그의 속마음을 알 수는 없으니. 하지만 두 번째 요인 즉 사명감은 그의 발언 과정에서 종종 드러난다. 그가 하는 일은 공공적 대의를 위한 사업으로 포장된다. 그런 만큼 사뭇 비장한 어투와 눈빛을 보이기도 한다. 비난도 얼마든지 감수한다. 그러니 계란 맞은 일로도 며칠씩 병원에 드러누울 수 있는 것이다. ‘행복하여라, 의로운 일을 하다가 핍박받는 사람들’을 연출하면서.

‘이렇게 희생하면서까지 우리 엘리트 관료들이 다 알아서 할 것이니, 우매한 제주도민들은 잘 따라오기만 해라’라는 태도다. 왜? 우리는 엘리트 전문가들이고, 너희들은 전문성 없고, ‘먹고사니즘’에 급급한 백성들이니까. 대충 이런 뉘앙스를 읽어낼 수 있다. 특히 원희룡은 서울 법대 출신에 무슨 시험에서 수석까지 했던 자 아니던가.

엘리트 관료들의 대민의식(對民意識)

지독한 엘리트주의다. 2016년 교육부 정책기획관 나향욱의 ‘개·돼지론’이 떠오른다.

“나는 신분제를 공고화시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차피 다 평등할 수는 없기 때문에 현실을 인정해야 한다”

“영화 <내부자들> 멘트처럼 민중은 개·돼지 취급하면 된다. 개·돼지로 보고 먹고 살게만 해주면 된다고”

“(구의역에서 컵라면도 못 먹고 죽은 아이가) 그게 어떻게 내 자식 일처럼 생각되나. 그렇게 말하는 건 위선이다”

나향욱은 행시 출신에 중앙부처 2~3급 공무원이었다. 스스로를 상위 1%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자신의 노력과 능력이 특권을 정당화한다는 소신 발언을 한 것이다. 그러니 저능력자는 그저 ‘먹고 살게만 해주면’ 된다는 논리로 이어졌다.

이태원 참사 희생에 함께 아파하지 못하던 엘리트들, 제2공항 문제를 비공개로 추진하는 엘리트 관료들, 그들 내면을 들여다보면 2016년 나향욱과 전혀 다르지 않음을 느낀다.

어쩌겠는가. 자기 잘난 맛에 살겠다는데. 하지만 문제는 제주도민이다. 제주도민 절반 이상이 제2공항을 반대했다. 그런데 그 의사를 무시하고 강행한다면? 그건 나향욱과 같은 의식으로 우리를 대하겠다는 태도 아닌가? 그런데도 분노, 행동하지 않고 ‘먹고사니즘’에만 매달린다면?

대한민국은 검찰 엘리트의 나라가 아니라 국민의 나라다.

다시 대한민국 헌법을 소환한다.

1조 제2항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11조 제1항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 누구든지 성별·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정치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

이영권

역사사회학을 전공하고 《새로 쓰는 제주사》, 《제주역사기행》 등을 저술한 이영권 박사는 제주4.3연구소, 제주참여환경연대 등에서 활동한 바 있고, 일선 학교현장에서 역사 교사로 오랜 시간 교편을 잡았다. 2022년부터 제주투데이 논설위원으로 위촉된 이영권 위원의 칼럼은 매달 두번째 금요일 게재된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제주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AI학습 및 활용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