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냄새 나는 글도 써달라
<제주투데이>에 시평을 쓴 게 이제 1년이다. 주변의 다양한 평가를 듣는다. 나를 성찰케 하는 조언도 여럿 있었다. 가장 뜨끔했던 것은 ‘따뜻함 부족’이다. 내 글에서 ‘사람 냄새’가 나지 않는다는 지적이다.
심정적 저항이 일었다. ‘오늘날 한국 사회가, 제주 사회가 어디 정상적인 구석이 있어야 말이지요’라는. 사실이 그렇다. 우리 사회 기득권층은 부끄러움을 모른다. 천박한 모습으로 오로지 자신들의 이권 추구에만 몰두한다. 그걸 지적하고 비판해야 할 언론 역시 기득권층으로 편입되어 파렴치를 부추긴다. 그런 만큼 서민 경제도, 사회정의도, 생태 질서도 모두 무너져 내리고 있다. 급격한 속도로.
그런 세상임에도 ‘따뜻한 글’을 주문하시다니. 안이한 사고라고 생각했다. 자고로 지식인의 펜은 사회 병리 현상을 가장 예리하게 겨냥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해 왔다. 그리고 지금도 그러하다. 나인들 ‘사람 냄새’가 나는 글을 쓰고 싶지 않겠는가.
한때는 내 글쓰기의 원천이 ‘분노’라고 생각했다. 정치인이 정치인답지 못하고, 언론인이 언론인답지 못하고, 학자가 학자답지 못하고, 종교인이 종교인답지 못한 현실에 대한 분노.
나를 위로한 두 언론인
그런데 국가 폭력과 토호 세력을 고발하며 나보다 훨씬 더 분노했을 원로 언론인 전<경남도민일보> 김주완 기자가 나를 위로해 주었다. 설 전후, 많은 이들을 감동케 한 2부작 다큐멘터리 <어른 김장하>를 통해서다. 경남MBC 김현지 PD가 협업한 작품이다.
김주완 기자가 김장하 선생에게 관심을 가진 것은 1991년부터라고 한다. 30년 넘게 취재했다고 할 수 있다. 김현지 PD가 이 다큐멘터리를 기획한 것은 2019년이라고 한다. 김장하 선생의 훌륭함이야 더 말할 것도 없겠지만, 김장하 다큐멘터리를 만든 두 언론인 역시 본받을 만하다.
이 두 언론인은 분노가 아닌 사람 냄새로 우리 사회를 치유하고 있다. 비판이 아니라 모범으로 사회를 정화하고 있다. 특종이 아니라 상식으로 우리를 위로하고 있다.
사실 김장하의 삶은 우리가 어릴 때부터 배워왔던 상식의 실천이다. 그 상식을 지키며 살아온 것만으로도 사람들은 그로부터 위로받는다. 이 다큐멘터리의 영어 제목이 <A man who heals the city>다. ‘힐링(healing)’이라는 용어가 남발되고 있는 현실이지만, 진정 김장하 선생은 그리고 이 다큐멘터리는 우리를 위로하고 치유하고 있다.
상식이 우리를 치유하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 사회가 비상식적이라는 말이겠다. 이 다큐멘터리가 감동을 준 것도 그 때문이다. 정권의 입맛에 따라 유무죄가 결정되는 정치, 난방비 폭탄에도 서민 삶을 팽개치고 미분양 건물을 세금으로 매입해주겠다는 경제, 입만 열면 거짓말을 쏟아내는 기레기 언론, 사회 병리를 치유하지 못하고 오히려 병리가 되어버린 종교, 이처럼 거꾸로 선 세상이니 상식에 목말랐던 게 우리 국민의 삶인 것 같다.
제주 사회에도 어른이 있으면 좋겠다
어쨌든 나는 이 다큐멘터리를 통해 새삼 ‘사람 냄새’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비상식을 지적하고 비판하는 일도 필요하지만, 따뜻한 상식의 확산 역시 중요하다는 걸 깨닫는다. 날카로운 펜도 결국에는 온기 넘치는 세상을 위한 것이기에.
제주 사회에도 김장하 선생이 있었으면 좋겠다. 영상을 통해 이미 널리 알려진 그의 삶이지만, 그의 발언 중 몇을 다시 소개하면서 같이 느껴보고 싶다.
“갚아야 한다고 생각하면, 이 사회에 갚아라.”
“우리 사회는 평범한 사람들이 지탱하고 있는 거야.”
“결국 아프고 괴로운 사람들을 상대로 돈을 벌었다. 그 소중한 돈을 함부로 쓸 수 없어서 차곡차곡 모아 사회에 다시 환원하기 위해 이 일을 시작한 것이다.”
“돈이라는 게 똥하고 똑같아서 모아놓으면 악취가 진동하는데, 밭에 골고루 뿌리면 좋은 거름이 된다.”
그의 삶과 가치관을 그대로 느끼게 해주는 글들이다. 다시 읽으며 진정 이 시대의 ‘어른’은 어떤 사람인가를 고민한다. 그리고 여기 제주 사회에도 진정한 어른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세도가 아니고 어른, 꼰대 아니고 어른 말이다.
다시 방송에 소개된 어느 자막을 소개하며 마무리한다.
이영권
역사사회학을 전공하고 《새로 쓰는 제주사》, 《제주역사기행》 등을 저술한 이영권 박사는 제주4.3연구소, 제주참여환경연대 등에서 활동한 바 있고, 일선 학교현장에서 역사 교사로 오랜 시간 교편을 잡았다. 2022년부터 제주투데이 논설위원으로 위촉된 이영권 위원의 칼럼은 매달 두번째 금요일 게재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