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당시 제주도민을 상대로 무차별 체포작전을 펼쳤던 박진경 대령. 이는 지난 2003년 대한민국 정부가 발간한 4·3진상조사보고서에서도 여러 페이지에 걸쳐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이다.
하지만 제주특별자치도가 이에 대해 반론이 존재한다며 사실상 추가 조사가 필요하다는 입장을 밝혀 논란이 일 전망이다.
박진경은 1948년 5월 연대장 취임사에서 “제주도민 30만을 희생시키더라도 무방하다”고 밝힐 만큼 적극적으로 4·3 진압을 지휘했다. 그러한 인물의 죽음을 기리는 추도비가 아이러니하게도 제주시가 훤히 내려보이는 언덕에 자리 잡고 있자 제주시민사회는 철거를 요구하고 나섰다.
하지만 행정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4·3단체를 비롯한 시민사회단체는 추도비를 철창 구조물로 씌우는 퍼포먼스까지 벌였다. 이 같은 노력에도 제주도는 지금까지 ‘박진경 추도비’와 관련해 뚜렷한 입장을 내지 않았다. 철거를 두고 찬반 의견이 있으니 신중하게 판단해야 한다는 식이었다.
이에 4·3단체를 비롯한 제주 시민사회는 지난 3월 제주도의회에 박진경 추도비 옆에 당시 역사를 명시한 4·3안내판 설치를 요구하는 청원서를 제출했다.
단체들은 청원서에서 “대다수 4·3희생자와 유족 입장에서는 강경진압의 책임자 중 하나인 박진경 대령을 추도하는 비석이 제주 땅에 설치되어 있는 것은 역사의 후퇴”라며 “행정당국 차원에서 올바른 4·3안내판 설치 등을 통해 다음 세대를 위해 4·3에 대한 역사를 제대로 알릴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제주도 보훈청, 청원 두 달 넘어서야 공식 답변
해당 청원은 다음 달인 4월 도의회 본회의를 통과하며 제주도의 답변만 남은 상황이었다. 그로부터 두 달이 훨씬 지나고 나서야 제주도로부터 공식적인 답변이 나왔다.
지난 4일 도가 밝힌 4·3안내판 설치 청원 처리계획은 “현재 진행 중인 4·3추가진상조사보고서가 완료된 뒤 그 내용을 토대로 객관적인 사실을 파악, 자문단을 구성해 안내판 설치를 검토하겠다”였다.
이에 청원을 넣었던 4·3단체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반응이다. 박진경 관련 내용은 기존 정부 진상조사보고서에서도 충분히 확인할 수 있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처리 계획’을 작성한 배경을 묻자 도 보훈청은 “해당 회신은 도 4·3지원과가 작성한 내용을 그대로 담은 것이라 우리 쪽에선 잘 모른다”고 답했다.
#도 4·3지원과 “박진경 ‘30만 도민 희생’ 발언, 근거 불충분”
이어 확인한 4·3지원과의 답변은 황당했다. 박진경이 ‘30만 도민 모두를 희생시켜도 무방하다’고 발언한 내용이 사실과 다르다는 주장이 있어 확인이 필요하다는 것.
4·3지원과 관계자는 “박진경 추도비가 논란이 되자 그 후손이 우리 사무실을 찾아와서 따졌다”며 “박진경이 그런 발언을 했다는 근거는 박진경을 살해한 군인(손선호 하사)의 구두 주장뿐이다. 그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어떻게 아느냐고 하더라”고 설명했다.
취재진이 “정부 진상조사보고서에 나와있는 내용이 거짓일 수도 있다고 보는 것이냐”고 묻자 해당 관계자는 “보고서에서 (박진경 발언의)근거로 박진경을 저격한 군인의 증언만 들고 있긴 하다”며 근거 자료가 충분하지 않다는 식으로 답했다.
#4·3진상조사보고서 및 추가진상조사 내용 파악 못하고 있어
이는 사실과 다르다. 진상조사보고서(218~219쪽)에선 손선호 하사의 증언 이외에도 김익렬 장군의 실록유고 <4·3의 진실>과 박진경의 참모였던 임부택 대위의 증언 등 다양한 출처를 통해 박진경의 발언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다.
특히 217쪽부터 221쪽에선 박진경 연대장의 진압작전과 그 당시 상황을 구체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당시 종군기자로 제주사태를 취재한 조덕송이 ‘포로’의 모습을 “12~13세 되는 소년이며 60이 넘는 늙은이며 부녀자까지 무엇 때문에 폭도로 규정받지 않으면 안 될 처지가 되었는가”라고 묘사하고 있다.
당시 박진경이 연대장으로 있던 경비대는 ‘양민과 폭도의 구별이 곤란’하다는 이유로 중산간마을 주민들을 무조건 연행하기도 했다. 행동이 느린 노약자들이 주로 포로로 잡힌 이유다. 실제로 박진경은 채 한 달도 되기 전에 특진까지 한다. ‘무차별 체포작전’이 군인들이 볼 땐 ‘성공적인 작전’으로 평가 받았기 때문이다.
4·3지원과 공무원이 ‘박진경 발언’ 사실 여부 운운하는 건 진상조사보고서 내용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는 방증이다. 다섯 페이지만 읽었더라도 ‘박진경 추도비 사태’ 문제의 본질은 ‘발언’자체가 아니라 박진경의 무차별 체포 작전이 더욱 강경한 진압과 초토화 작전으로 이어지는 길목이었다는 점을 쉽게 알 수 있다.
#극우단체의 일방 주장은 추가 진상조사에서 확인하면 된다?
더 황당한 건 박진경 후손의 주장에 대한 조치였다. 4·3지원과 관계자는 그 후손에게 “지금 추가 진상조사가 진행되고 있으니 그쪽(추가진상조사단)에 ‘박진경 발언’에 대해 진위 여부를 조사해 달라고 요청해보라”고 말하며 돌려보냈다고 밝혔다.
이어 “후손의 요구가 반영된다면 추가 진상조사가 이뤄질 것이고 거기에 따라 ‘박진경 추도비 청원’건도 검토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에 취재진이 “추가 진상조사 주제와 박진경 관련 내용은 거리가 멀어보이는데 그 사실을 몰랐느냐”고 묻자 관계자는 “포함될 수도 있지 않느냐. 거기까진 우리가 관여할 부분이 아니”라고 답했다.
추가 진상조사 범위도 제대로 파악하지 않은 상황에서 ‘민원’을 손쉽게 해결하기 위해 무책임한 답변을 했다는 지적이 나오는 지점이다. 게다가 4·3안내판을 설치하려는 취지는 박진경의 발언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가 4·3 당시 제주도민을 상대로 무차별 체포 작전을 펼친 책임 때문이다. 4·3지원과는 마치 이 문제의 본질을 박진경 발언 사실 여부로만 축소해 판단하는 모양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앞으로 극우단체의 비상식적인 주장이 제기될 때마다 사회적으로 합의된 공식적인 자료를 바탕으로 반박하거나 일축하는 대신, 그 역시 '소중한 의견'이라며 예산과 인력을 투입해 불필요한 조사를 벌여야 하는가 하는 점이다. 그 누구보다 4·3의 역사 바로세우기에 앞장서야 할 제주특별자치도가 민원을 손쉽게 해결하기 위해 '행정 편의'를 더 앞세우는 건 아닌지 우려되는 대목이다.
(참고로 지금 진행 중인 추가 진상조사 주제는 △지역별 피해실태 △행방불명 피해실태 △4·3시기 미국·미군정의 역할 △무장대와 군·경 토벌대 활동 △재일제주인 피해실태 △연좌제 피해실태 조사 등 크게 6개로 선정됐다.)
#추가진상조사단 “4·3안내판 설치, 기존 정부 진상조사보고서로도 충분”
4·3지원과 관계자의 말대로 실제로 ‘박진경 발언’에 대한 추가 진상조사가 가능하긴 할까? 양정심 제주4·3평화재단 추가진상조사단장은 11일 제주투데이와 통화에서 “굳이 포함시키자면 군·경 토벌대 활동 주제와 관련이 있긴 한데 박진경 추도비 옆에 4·3 안내판을 설치하는 문제는 기존 정부 진상조사보고서로도 충분히 판단할 수 있다고 본다”며 “추가 진상조사 역시 기존의 진상조사를 토대로 진행하는 것이다. 완전히 뛰어넘는 반대되는 시각으로 하는 게 아니”라고 설명했다.
이어 “종종 증언 진위 여부에 의문을 갖는 분들이 계신다. (시간이 많이 지났기 때문에) 새로운 증언을 찾기도 어려울 뿐더러 기존의 진상조사보고서는 여러 관계와 자료들을 적절히 조사해 작성된 것이다. 정부가 발간한 보고서 아니냐”라며 “이런 (박진경 추도비와 같은) 문제가 생길 때마다 행정은 추가진상조사를 핑계로 판단을 미루려는 경향이 있다. 진상조사보고서가 있기 때문에 거기 나온 내용을 충분히 인용하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4·3단체 “역사적 진실 세우자는 요구 피하려는 꼼수”
4·3지원과 관계자는 제주투데이와 통화 말미에 “사실 4·3단체 때문에 박진경 대령이 유명세를 탄 부분도 있다. 박진경 추도비를 그냥 가만 놔뒀으면 후손들이 찾아올 일도 없었다. 일을 더 크게 만들었다”며 제주시민사회의 역사를 바로 잡으려는 운동에 대해 '유별나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이번 보훈청 회신과 관련해 김동현 제주민예총 이사장은 “추가 진상조사 운운하는 건 역사적 진실을 바로 세우자는 시대적 요구를 피하려는 꼼수”라고 강도 높게 지적했다.
김 이사장은 “박진경의 강경진압 사실은 기존 보고서에 다 나와있는 내용이고 추가진상조사엔 포함되지도 않는다. 제주시민사회의 요구를 차일피일 미루려는 핑계”라며 “현재 극우단체의 역사 왜곡 행태가 이어지는 상황에서 제주특별자치도와 도 보훈청의 입장은 지극히 개탄스럽다”고 우려했다.
한편 추가진상조사단은 재단 조사연구실을 중심으로 전문 인력을 충원해 꾸려졌다. 분과위는 오는 연말까지 조사가 마무리되면 내년 보고서를 작성, 발간한다는 계획이다.
- 보훈청, 박진경 추도비 안내판 설치 눈치보기
- “박진경 추도비 안내판 설치 청원 상임위 통과 환영”
- “박진경 추도비 옆 ‘4·3 안내판’ 설치” 청원 상임위 통과
- “박진경 추도비 옆에 ‘4·3 안내판’ 설치” 도의회 청원
- 제자리 찾아야 할 박진경 추도비
- “제주도 보훈청, 4·3 학살자 박진경 감싸고 도는 행태 중단해야”
- ‘4·3학살 주역’ 박진경 추도비도 무단점유? "용도 맞지 않는 시설물"
- 제주도 보훈청, 도민 학살 주역 ‘탈옥’시키다
- 제주4·3 학살 주범 박진경...역사의 감옥에 갇히다
- "4·3 학살 주범 박진경 추도비 철거 불가능하면 단죄비라도"
- [제주MBC&제주투데이]키워드뉴스_13년받고 3년 더&가해자 없는 4·3
- “제주4·3 화해와 상생? 가해자도 못 밝히는데 어불성설”
- “4·3 무차별 진압 박진경 추도비, 국립묘지 설치하면 철거운동”
- 4·3 무차별 진압한 박진경 추도비, 결국 국립묘지에 들어서나
- 양민학살 박진경 추도비, 원희룡 “4·3특별법 정신에 맞게 처리해야”
- 제주4·3 양민학살 주범 박진경 추도비 ‘처치곤란’
- [제주투데이x제주MBC] 박진경 추도비 안내판 설치도 눈치보는 제주도정
- '진상규명 사각지대' 3.1사건-3.10총파업 ... "행정 적극 나서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