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쇼핑을 좋아한다. 명동 롯데백화점을 사랑했다고 해야 할까? 광화문 교보문고처럼, 그곳이 좋다. 시시한 농담이지만, 백번 돈다고 백화점이라는 말대로, 나는 그 안에서 영원히 길을 잃어도 크게 상관이 없다. 아, 오해는 마시라. 필요한 하나를 사기 위해 백 번을 도는 것이지, 백 개를 사려고 그려는 것은 결코 아니니. 어쨌든, 무엇을 사야겠다고 결정하고, 그것을 고르기 위해 이곳저곳을 누비고, ‘마침내’ 혹은 ‘드디어’ 마음에 흡족한 그 어떤 하나를 집어들 때의 쾌감과 스릴을 나는 진심으로 즐긴다. 내 안에서 자본주의는 그렇게 숨을 쉰다! 포스(POS*)가 그대와 함께 하기를!(May the Force be with you!)*pos: 매장의 카드단말기

내 생애 첫 백화점은 서울에 처음으로 발을 디딘 19살, 그때였다. 꾀죄죄한 동생이 안쓰러웠는지 누나는 자신의 퇴근 시간에 맞춰 나를 롯데백화점으로 불렀다. 티셔츠와 바지를 사서 입히고, 또 그 유명한 명동 교자칼국수로 데리고 갔다. “공부 열심히 해야 된다!”라는 당부의 말은 당연한 양념이자 디저트였다. 그날, 명동에는 정말 사람들이 넘쳐났다. 인파(人波)라는 말이 무엇인지 온 감각으로 느낄 수 있었다. 1987년 그리고 2002년에 다시 경험하게 될 바로 그 사람들의 무리. 나는 그날 명동에서 결심했다. “세상에 이처럼 많은 사람들과 세상에 이처럼 많은 개성들”(<어떤 이의 꿈> 봄여름가을겨울) 속에서 살아야겠다! 나는 서울 사람이 돼야 겠다! 서울공화국의 시민으로 살아야겠다! 좋은 옷과 맛난 음식이 늘 나와 함께 하기를!

아내는 나와 많은 고난을 함께 겪었다. 하지만 아내는 여전히 백화점 대장정을 못 견뎌한다. 백화점 두 바퀴째에 나가떨어진다. 나는 장모님과 아내를 데리고 백화점에서 학익진(鶴翼陣)을 펼치려 하지만, 아내로 인해 무너지고 만다. 그러나, 괜찮다. 나에게는 아직 장모님이 있다.

장모님으로 말할 것 같으면, 세련된 도시 할매 그 자체다. 군인의 아내였던 그녀는 사치와는 거리가 멀었지만, 쓸 수 있는 돈 안에서는 최선을 다해서 가장 예쁘고 아름답고 멋있는 물건을 골라야 한다고 생각하는 노부인이다. 그래, 그거다! 백화점을 백 번씩 돌아야 하는 명분!

나는 용케도 평생을 넥타이 매지 않아도 되는 생업에 종사했는데, 십 년 전쯤, 셔츠와 수트, 넥타이까지 다 갖춰 입는 생활을 갑작스레 서너 해 동안 한 적이 있다. 부랴부랴 양복과 셔츠 등을 사야 했다. 어느 정도 구색이 갖춰지자, 웬일인지 넥타이가 영 눈에 거슬렸다. 그 핑계로 아내와 서울에 갔고, 장모님의 귀중한 한 말씀도 있었다. “예쁜 넥타이면 내가 사주지!”

‘예쁜 넥타이’ 이 한 마디는 타는 장작에 기름을 붓는 것이었다. 1층부터 꼼꼼히 넥타이 수색에 나섰다. 남성복 코너를 하나씩 도장깨기 하듯 클리어하는데, 언제부터였는지 우리의 대장인 장모님이 자꾸만 뒤로 쳐지기 시작했다. 마음은 급한데 장모님은 의자만 보이면 앉으려 들었다. 급기야 나는 아내에게 장모님을 부탁하고, 홀로 넥타이 구하기 작전을 수행하러 나섰다.

내 마음에 흡족한 넥타이는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나는 포기를 모르는 남자니까, 걷고 또 걸었다. 정말 백 바퀴쯤 돌았다고 생각이 들 무렵, 내가 찾던 바로 그것이,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나에게만 발견될 작정으로, 매장의 어느 서랍 안에 다소곳하게 누워 있는 것을 보고야 말았다. 벨벳 소재의 폭이 가늘고 좁은 넥타이. 아, 마침내!

그 넥타이는 나의 양복쟁이 시절을 잘 빛내주었다. 맬 때마다 멋진 넥타이라는 평을 들었다. 뿌듯했다. 백화점 백 바퀴의 가치가 있었다. 그걸 맬 때마다 나는 거울을 보며 흡족하게 웃었다. 단, 아내는 꼭 산통을 깼다! 거울 앞에 서서 웃고 있는 나를 보며 아내는 말했다. 그녀의 멘트는 단 한 글자도 틀리지 않고 매번 똑같았다. “늙은 장모 모시고 백화점 백 바퀴 돌아서 산 게 그렇게 좋아?” 이럴 때 입을 다물어야 하지만, 그게 쉽지 않다. “장모님은 그날 오십 바퀴 밖에 안 돌았어.”

아내는 내게서 배운 사투리로 말한다. “귄닥사니 벗어정 못 살크라!” 그리고 입 바른 소리 한 마디가 따라온다. “우리 엄마가 백화점 백 바퀴를 돌고 끝나는 줄 알아? 20년 된 옷도 이틀 전에 산 것처럼 정성스럽게 관리하는 할매라고! 사는(buy) 게 문제가 아니라 사는(live) 게 문제라고. 이 바보야!”

지난 해 아들이 군대에서 제대했다. 그러더니 갑자기 패션에 과한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아르바이트로 번 돈 대부분을 신발과 옷, 향수 사는 데 쓰고 있다. 아들의 명동 롯데백화점은 인터넷 쇼핑몰이다. 백배 아니 천 배쯤 큰 가게, 나는 결코 가볼 수 없는 가게. 아들은 나의 뒤를 이어 그곳을 밤이면 밤마다 백 바퀴씩 돈다. 아침이면 눈도 다 못 뜬 채, 제 엄마에게 휴대폰을 들이민다. “엄마, 이건 어때?”

백 번씩 묻는다. 백 번의 백 배쯤, 천 배쯤 묻는다. 나는 아들에게 쇼핑 혹은 소비의 함정과 천박한 자본주의의 속성에 대해 한바탕 설교를 늘어놓을 준비를 한다. 그러나 아들이 열어 둔 쇼핑몰을 보는 순간 엉뚱한 말이 튀어나온다. “아들! 이제 곧 아빠 생일인데, 축구화 사고 싶은 거 있어!” 아내는 오늘도 두 김 씨의 자본주의 DNA에 화가 나있다. 아, 신이시여, 어디로 가시나이까!(쿼바디스 도미네 Quo Vadis Domine!)

제주시 이도2동에서 '금요일의 아침_조금, 한뼘책방'을 운영하는 노지와 삐리용.
제주시 이도2동에서 '금요일의 아침_조금, 한뼘책방'을 운영하는 노지와 삐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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