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시 이도2동에서 '금요일의 아침_조금, 한뼘책방'을 운영하는 노지와 삐리용.
제주시 이도2동에서 '금요일의 아침_조금, 한뼘책방'을 운영하는 노지와 삐리용.

버렸다. 책을. 아내가.

모두 62박스. 한 박스 당 20권씩 담았으니 1240권을 버렸다. 더러 중고서점에 팔았다고는 하나 기껏해야 어떤 것은 한 권 당 1000원 남짓, 어떤 것들은 300~500원이니, 그것들도 버린 것과 별다를 바 없는 노릇이다. 집안의 어떤 공간이나 물건을 정리하고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내는 아내의 노동은 도발적이다. 충동적이다. 자발적이고 집요하다. 그리고 나름대로 자신만의 주기를 갖고 있다. 이번에는 그 대상이 책이었다.

“다락방에 있는 책을 정리하겠어!”

아내의 선언은 어느 날 밤 갑작스럽게 이뤄졌다. 다른 때도 대부분 그랬다. 거실을 정리하겠다고 마음먹으면, 당장 다 뒤집어 놓아야 직성이 풀리는 스타일이다. 소파와 피아노와 책꽂이의 위치를 바꾸어놓는다. 나는 가장 무거운 것들의 위치를 정할 때 동원되곤 한다. 그런데 뭐? 책?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다음 날부터 몇날며칠이고 죽자 살자 다락에 처박힐 아내가 눈에 훤했다. 그게 다 끝나고 나면 또 몇날며칠 시체처럼 앓아 눕겠지? 아니, 근데, 왜 책이야?

아내가 다락에 처박히기 시작한 날부터 나는 속이 시끄러웠다. 아니, 자기가 뭐 그렇게 깔끔한 정리정돈주의자야? 아니잖아! 물건 쓰고 나면, 그거나 제자리에 좀 두지. 아침 마다 나한테 안경 찾아달라고 닦달이나 하지 말지. 택배 상자나 제 때 풀어서 정리하지. 이번에도 상자에 붙인 송장 스티커가 다 변색되도록 거들떠도 안 봤으면서! 택배 상자 안에서 발효라도 시켜?! 내가 이번에 어디 도와주나 봐라!

밤마다 구시렁대면서 속 좁은 결심도 해 봤지만 쓸데없었다. 나는 곧 아내의 지시대로, 매일 동네 마트에 가서 빈 박스를 얻어왔다. 박스 테이프가 떨어졌다고 하면, 사다가 대령했다. 스무 권씩 포장된 책 박스를 대문 앞으로 옮기는 일도 거부하지 못했다. 여느 때와 같이 아내의 정리 충동이 일으킨 난리법석 같은 쿠데타에 마지못해 끌려가는 앙시엥 레짐의 관료처럼 묵묵히 따랐다. 잠자리에 누워서는 늙은 노새의 노동을 한탄했다. 아내가 청소할 때마다 늘 전전긍긍하지만, 이번에는 유독 속이 쓰렸다.

이건 일종의 배신이었다. 아내와 나는 한때 책과 관련된 잡지를 만들었다. 잡지를 만들다가 단행본도 만들었다. 나는 우리사이에서 책은 일종의 중매쟁이라고 생각하면서 살아왔다. 종교의 어원이 ‘다시 묶는다’라고 하는데, 책은 우리 둘을 연결하고 묶는 그 어떤 것이라고 생각해 왔다. 책은 단순한 사물을 넘어 하나의 징표였다. 우리의 사랑과 노동의 상징! 그런 줄 알았지. 그런 줄 알았다. 책 분리수거를 끝내며 아내는 매년 이렇게 책을 내다버리겠다고 내 뒷머리를 향해 선언했다. 예순 두 박스의 무게에 땀이 났고, 아내의 선언에 화가 났다.

살면서 몇 가지를 수집해 왔다. 최근에는 축구화에 꽂혀있다. 그저 그렇고 그런 수준의 주말 축구를 즐기지만, 운동은 소위 ‘장비빨’ 아닌가. 그런 만큼 나는 현재 축구화에 진심이다. 축구화를 이것저것 사 신어보고 있고, 간밤에도 축구화 리뷰를 정독했다. 아마 조금 더 나이가 들면 ‘아홉 켤레의 축구화로 남은 사내’가 되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그 이야기는 다음, 아니 또 그 다음에 하겠다. 어쨌든 지금껏 유일하게 남아있는 게 바로 책이다. 지금 피자용 장작화덕을 사용하느라 늘 내 몸에 참나무 장작 내음이 나는 것처럼, 내게서 책 냄새가 났으면 좋겠다고, 수줍게 희망하며 살고 있다. 아, 지난 40년 삶의 냄새여!

나는 아내에게 책의 물성을 사랑한다고 말했다. 아내도 그렇다고 했다. 나는 아내에게 평생 책을 읽고 싶다고 했다. 아내도 그렇다고 했다. 나는 저자가 아니라 독자여도 괜찮다고 했다. 아내도 그렇다고 했다. 아, 사랑의 세레나데여. 그리하여 꿈꿨다. 우리는 서로에게 하나의 책이 되리라! 서로에게 하나의 ‘대문자 책(Le Livre)’이 되리라.

그런 아내가 책을, 버렸다! 고로 나는 생각한다. 아내는 언젠가 나도 버릴지도 모른다. 시간이 오래 지나 변색되고, 찾아 읽는 이가 없다는 이유로, 그저 짐이 될 뿐이라는 이유로, 곧 책이 버려지는 바로 그 이유로, 내가 어느 날 느닷없이 분리수거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공포! 세상의 늙은 남편들이여, 느닷없이, 크게 청소하는 아내를 경계하라! 당신을 분리수거하려는 쿠데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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