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밴드 공연을 처음 본 건 1992년 봄이었다. 제주시 원도심에 위치한 중앙성당에서였다. 친구가 기타리스트로 있던 밴드 <에로스>의 단독공연이었다.
장미꽃 한 송이를 사들고 아카데미 극장 옆 붉은 벽돌담을 지나 성당 지하로 내려갔다. 어두컴컴한 소극장에는 철제의자가 줄을 맞춰 촘촘히 놓여 있고 잠자는 듯 숨죽인 무대를 노란색 조명이 아스라히 비추고 있었다. 조명사이로 드럼, 기타, 베이스와 커다란 스피커들이 어렴풋이 보였다 . 아! 정말이지 눈이 부셨다. 가슴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맨 앞자리에 앉아 눈을 감고 앞으로 펼쳐질 음악들을 상상했다.
공연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그다지 좋은 장비가 아니었음에도) 폭발하는 사운드와 에너지는 온몸을 휘감았다. 공연장에서만 느낄 수 있는 거대한 음압의 홍수! 그 첫 경험은 너무도 강렬했다. 이후로 수많은 공연을 봤고(나 역시 수없이 많은 무대에 섰지만) 처음 느낀 그때 그 경험만큼 강렬하진 않았다.
재즈에 막 빠졌을 무렵에 팻 메시니 그룹 Pat Metheny Group의 공연을 본 적이 있다. 천여 석의 중형 공연장이었다. 넓은 무대와 화려한 조명, 세계적인 연주자들인 모인 밴드는 총천연색의 화려한 연주를 들려주었다. 상상을 초월하는 우주적 사운드에 완전히 빠져들었음은 물론이다.
공연이 끝나고 그 여운을 잊지않으려 홍대의 어느 재즈클럽에 들렸다. 아! 왠걸 그 곳은 또 다른 세계였다. 너무도 또렷히 느껴지는 연주자의 숨결과 악기 소리는 살결에 닿을 듯 세밀했다. 방금 봤던 팻 메시니 그룹의 거대한 사운드와는 또다른 진솔함이었다.
재즈 음악의 본질이 무엇이고 어떻게 향유해야 하는지를 느끼게 했다. 재즈의 본고장 뉴욕의 여러 클럽에선 매일 같이 공연이 펼쳐진다. 최고의 뮤지션들이 작고 눅눅한 지하클럽에서 최상의 연주를 하고 관중들은 그 에너지를 고스란히 흡수하는 것이다.
1919년 문을 연 <55Bar>는 기타 애호가들의 성지다. 벤 몬더, 아담 로저스, 웨인 크랜츠, 팀 밀러 등 재즈 최전선에 있는 뮤지션들은 그 곳에서 자유롭게 자신들의 음악들을 실험한다. 기타학자로 유명한 웨인 크랜츠는 무려 10여년 동안 매주 연주하기도 했다. (아쉽게도 작년 코로나의 여파로 이 전설적인 클럽은 문을 닫았다고 한다)
1962년 데뷔하기 전 십대 후반의 비틀즈는 함부르크의 클럽에서 매일 열두 시간씩 연주하며 실럭을 키웠다. 1920년대의 블루스 뮤지션들은 쥬크 조인트 Juke Joint에서 위스키 한 잔에 자신의 모든 것을 토해내며 노래했다.
제주 라이브 클럽의 시작은 뮤직펍 <도어스 The Doors> 였다. 지하 열 평도 안되는 작은 공간은 (당시로선 대단히 파격적인) 벽돌이 돌출된 인테리어였다. 테이블은 투박했다. (역시나 당시로선 새롭게) '혼술'이 가능하도록 벽쪽에 테이블을 배치했다.
육중한 나무문을 열고 들어서면 공간을 가득 채운 음악소리가 귀를 때렸다. Jazz Blues Rock 가요 등 장르 구분은 없었다. 오로지 Good Music! 사람들은 굿뮤직에 맞춰 춤을 추고 머리를 흔들었다. 한 달에 두어 번은 테이블을 치우고 무대를 만들어 라이브 공연을 펼쳤다.
이 공연은 결국 또 다른 라이브 클럽 <레드 제플린 Led Zeppelin>을 태동하게 했다. 인디음악이 한국을 덮쳤던 90년대 중반이었다. 그 곳엔 꽤 근사한 무대가 있었고 벽한쪽을 가득 채울만큼 방대한 음반이 있었다. 입소문이 나면서 도내 밴드들이 공연을 하기 시작했다. 이어 윤도현 밴드, 크라잉 넛등의 밴드들도 무대에 섰고 시간이 지나며 고정 관객들도 꽤 모이기 시작했다.
소속 밴드들은 자체적으로 여러 다양한 기획공연을 꾸렸고 더러는 데모테이프를 만들어 팔기도 했다.
재즈 클럽의 시작은 <스윙로드 Swing Road>였다. 용두암 근처 하얀색 목조건물이었고 꽤 훌륭한 오디오장비를 갖추었다. 하우스밴드 한 팀이 고정으로 연주했고 재즈 스탠다드와 팝을 적절하게 섞은 레퍼토어였다. 재즈를 전혀 들을 수 없었던 당시에 기타트리오 구성의 멋진 연주를 들려 주었다.
2007년엔 전문적인 재즈클럽을 표방하며 <클럽 블루힐 CBluehill>이 오픈했다. 진보적인 음악을 하던 '민영석 컨템포러리 재즈 트리오'의 공연을 시작으 롭 반 바벨, 잭리, 전영세 트리오, 오영준 등 국내외 여러 재즈뮤지션들이 무대에 섰다. 더불어 어린 음악학도들을 위한 '마스터 클래스'가 열리기도 했다. 매주 목요일에는 연주자들이 모여 자유로운 즉흥 잼세션 Jam Session을 열었다.
지역의 젊은 뮤지션들은 이 곳에서 여러 스타일의 연주를 경험하며 실력을 키워나갔다. 블루힐은 현재의 <낮과밤>으로 이어졌다. 낮과밤은 어쿠스틱 느낌의 따스한 무대에서 재즈, 락, 포크, 힙합 등 다양한 음악이 연주된다.
제주의 신생 뮤지션들은 매주 목요일 오픈 마이크 무대인 플레이 그라운드 PlayGround를 통해 무대를 경험한다. 포크, 블루스, 재즈 뮤지션 들과 더불어 힙합 뮤지션들이 애정하는 곳이다. 낮과밤과 멀지 않은 곳에 다른 색깔의 라이브 클럽 <인디 제주 Indie Jeju>가 있다. 이 곳은 락과 메탈을 중심으로 밴드 사운드의 다양한 음악들을 들려준다. '블랙 신드롬' '매써드'등의 헤비메탈 밴드들이 거쳐 갔다. 주말이면 와비킹, 바나나문, 사우스 카니발 등 제주의 실력파 밴드들의 다채롭고 강력한 공연이 펼쳐진다.
그렇다. 돌이켜 보면 음악은 멈추지 않고 계속 흘렀다. 30년 전 성당 지하에서 내 가슴을 요동치게 했듯이 섬 이곳 저곳에서 또 다른 누군가의 가슴을 울릴 것임이 분명하다.
음악행위를 통해 삶의 이면을 탐구해나가는 모험가, 작곡가이자 기타리스트인 양진우 씨는 이렇게 자기 자신을 소개한다, The Moon Lab 음악원 대표이며 인디레이블 Label Noom의 프로듀서로 활동하고 있다. 매달 마지막 주 음악칼럼으로 독자들을 만난다. <편집자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