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진행된 표선고등학교 입학설명회 및 모의수업에 참관했다. 후배들을 맞이 하기 위해 표선고 재학생들도 분주하게 움직였다. 표정이 밝았다. 직접 기획한 영어 연극무대를 선보였을 때는 '나도 이런 교육을 받았으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학생들은 거리낌 없이 각자의 의견을 말했다. 서로 북돋아주는 말과 표정에서 빛이 났다. 한 학부모는 "학교에 다니고 나서 자신의 생각을 논리적으로 이야기하고, 어려운 문제도 나서서 풀어나가려고 하더라고요"라고 말했다.
표선고는 국내 17번째로 IB(국제바칼로레아:프랑스식 논술형 교육)교육 과정을 도입한 학교다. DP(Diploma Programma)는 고등학교 3년 중 2년 과정으로 설계돼 있다. 1학년 학생들은 국내 교육 과정에서 이수해야 할 필수 과목을 공부한다. 일반 인문계처럼 상대평가 시험도 치르고, 등수도 나뉜다. 2학년부터는 경쟁하지 않아도 된다. 절대평가로 운영되는 시험은 서술형·논술형으로 진행된다. 자기주도적으로 주제를 정해 소논문도 쓴다. 지식철학을 통해 공부에 대한 성찰적 질문도 던진다.
김광수 제주도교육감은 지난 6월 기자간담회에서 "IB교육 과정 고등학교 확대 실시는 없다"고 못박았다. 그는 같은 교육 과정을 도입해 운영 중인 표선초·표선중 학생 수가 늘어나며 지역사회에 기여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평가를 유보했다. 김광수 교육감이 IB교육에 부정적인 이유는 대학 입시 체제 때문이다. 국내 대학의 문이 좁다는 것. 하지만 대학 입시가 공교육의 유일한 목표는 아닐 것이다.
IB 교육 과정 이수자에게 국내 대학의 문은 좁은 것은 사실이다. 외국대학에 진학하는 게 아니라면, 학생부종합전형을 통해 대학에 가야 한다. 수학능력시험 최저점 기준이 없는 학교를 선택하거나, 최저점 기준이 있는 학교에 가려면 학생이 알아서 수능시험을 준비해야 한다. 내년, 표선고에서 IB교육 과정 첫 졸업생이 나온다. 국내 공립학교 IB교육 과정의 첫 졸업생이기도 하다. 이에 관심이 많이 모아지고 있다.
이주호 교육부 장관도 표선고등학교를 찾아 IB교육에 대한 관심을 드러내기도 했다. IB학교 구성원은 이 교육과정을 어떻게 바라보고 전망하고 있을까? <제주투데이>는 지난달 28일 임영구 표선고 교장을 만나 이야기를 들어봤다.
(대담 김재훈 기자)▶표선고에 오시기 전에 대정 영어교육도시 내 국제학교에도 계셨었죠. IB교육에 발을 들이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그보다 더 전인 2002년부터 10년 동안 중국 남경 내 IB학교에 재직했습니다. 상해를 중심으로 경제가 활성화된 시기여서 국내 및 외국계 기업이 많이 유치돼 있었어요. 주재원 자녀들을 위한 교육기관이 필요해 비영리 학교던 남경국제학교가 공식화 됐죠. 이곳은 초·중·고 모두 IB 교육과정이었어요. IB가 독특한 게 영어에 기반한 국제적 교육과정인데도 모국어 과정을 거쳐야 해서 56개의 언어 과목이 개설돼 있어요. 네팔어·알리어·힌두어 등 소수언어까지요. 한국어 교사를 구하기 힘들었는지 학교 측에서 연락이 왔고, 파트타임으로 시작했다가 몇 년 후 학생도 늘어나면서 정규 교사로 일했죠.
여기에 IB교육의 철학이 있는 것 같아요. 한 학생의 성장에는 정체성이 중요하다는 것이요. 정체성은 모국어와 모국문화를 통해 형성될 수 있다는 철학을 공식 커리큘럼에 담아 내고 지원하고 있거든요. 여하튼, 고향인 제주에서 교사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NLCS(노스런던컬리지에잇스쿨 제주)에 2012년부터 9년 정도 근무하기도 했습니다.”
▶한국 IB 교육의 산증인이십니다(웃음). 국제학교와 표선고 둘 다 IB교육 과정을 도입한 학교인데, 차이점이 있나요?
“크게 2가지 흐름으로 나뉘는 것 같아요. 한쪽은 엘리트 교육, 다른 쪽은 공교육 쪽으로 지향하는 것이죠. 전세계적으로 신자유주의적 경제가 지배하고 있고, 중국을 중심으로 개방 개혁이 많이 일어났잖아요. 그래서 국내 기업도 동남아시아와 싱가포르, 홍콩, 태국 등 해외로 회사와 공장을 이전하는 과정이 있었고, 재직자의 자녀들이 국제학교에 들어가게 되는 경우가 많았어요. 이 사립 학교들이 하나의 브랜드처럼 IB 교육을 타이틀로 내세웠죠. 학비도 굉장히 비싸고, 성적과 대학진학률이라는 성과 달성의 요구도 있었고요. 반대로 공립학교를 보면, 미국에 IB학교가 단위 국가 중 가장 많아요. 공립학교 중 IB를 도입한 비율이 80% 가까이 될 정도니까요.
IB학교를 국내에 도입하는 패러다임과 목적을 설정할 때 이 지점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또다른 엘리트 교육이 공교육에 도입되는 맥락인지, 공교육의 정상화를 위해서 도입하는 것인지 고려해야 한다는 거죠. IB교육은 전세계적으로 교육과정이 표준화돼 있는데, 국내 학교에서도 요구하는 규정이 있거든요. 표선고의 경우, 결합이 잘 되느냐가 관건이었죠. 그런데 IB 볼렛 자체가 열린 구조일뿐더러 탄력성.유연성이 있어서 매칭이 잘 되고 있습니다. 완벽하진 않지만요.“
▶IB학교가 국내에서는 엘리트 교육으로 여겨지며 그에 대한 기대도 상당하잖아요. ‘표선에 빈집이 없다’는 말이 나올 정도던데요. 현재 도내외 학생 비율은 어떻게 되죠?
“정확한 통계적 파악은 힘들지만, 도외 학생들이 크게 많지는 않아요. 표선고는 전국 단위 선발이 아닌 도내 지역 단위 선발이기 때문에 거주지가 제주도이고, 도내 중학교 졸업장이 있어야 하거든요. 하지만 열기는 분명합니다. 그게 공교육에 IB를 도입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해요.
지역 활성화 측면 때문인데요. 제주외고의 일반고 전환 논의가 한창일 때 ‘외고에 IB를 도입하자’는 여론이 있었어요. 시내에 근접한 점, 외국어 위주의 국제 교육 프로그램이나 시설이 잘 갖춰져 있는 점 등 실제로 유리한 부분도 있었죠. 하지만 당시 제주도교육청(이석문 교육감)이 표선을 선택한 이유는 표선지역의 인구감소 문제 때문이었어요.
지역 내 초등학교 6곳도 학생 수가 줄어드니 통폐합하거나 폐교해야 하는 상황이거든요. 도시와 농어촌의 교육 격차가 공교육 과제 중 하나잖아요. 결국 학교가 지역·마을을 위해 무슨 기여를 할 수 있는지 종합적으로 고려돼야 하는 거죠.”
▶ 내년 해외 대학교 진학률 등의 성과가 중요하게 거론될 것 같습니다. 입시에서 좋은 성적이 나오면 전국적으로도 큰 반향이 예상되는데요. 지금까지의 과정을 평가하신다면요?
“대학 입시율 등 수치적 성과로 평가하는 것은 IB를 협소하게 보는 것 같아요. 일단 IB의 성패를 가르는 기준이 무엇인지, 질문을 던져보고 싶어요. 저는 판단의 가장 중심엔 학생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학생들이 IB를 어떻게 경험해 성장하고 있고, 학생들이 이 교육과정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굉장히 중요해요.
IB를 도입하게 된 목표는 대단하고 특별한 것이 아니에요. 원래 학교가 해야 할 기본적인 역할, 교육의 본질에 충실하고 싶었거든요. 보통 학교 교실을 보면 책상에 엎드려 자는 학생들이 많죠. 이유가 뭘까요? ‘진짜’ 공부는 학원에서 주말까지 밤새서 하고, 학교에서는 잠을 잔다는 거죠. 저희 학교의 작은 목표도 아무도 자지 않는 교실을 만들어보자는 데 있어요.
또 학교폭력과 교권침해, 코로나19, SNS 등 학생들이 정서적·사회적으로 굉장히 취약해지고 있어요. 이건 전세계적 추세잖아요. 이건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까요? 저는 학생들이 편안하고 건강한 관계를 맺는 문화를 만들고 싶어요. 인성 교육의 일환이죠. 기준은 ‘인사’에요. 학교생활이 편안하고, 수업의 협력적 부분이 살아나다보니 학생과 학생, 선생님과 학생, 선생님과 선생님 등 모든 구성원이 자연스럽게 인사를 잘하고 있어요. 이는 제가 학교를 판단하는 중요한 지표이기도 하거든요."
▶모든 시·도교육청이 전인(全人)교육을 이야기하고는 있는데, 실제로 현 입시 체제 교육에는 이뤄지기 어려운 게 사실이잖아요. IB교육과정은 어떤가요?
“출발점이 재밌습니다. IB 도입시 고등학교에서 가장 중점을 두는 부분은 시험의 변화거든요. 수능은 객관적 선택형 시험이자 서로 경쟁해야 하는 상태평가죠. 하지만 이대로 가면 수업도 바뀔 수 없거든요. 그래서 절대평가, 논술형·서술형 평가 과정으로 가는 거죠. 평가 자체도 결과가 아닌 과정 중심이고요. 평가 기준이 바뀌면 수업이 바뀝니다. 참여식 토론으로요.
저는 IB도입으로 시험 및 수업의 변화 정도만 예상했는데요. 학교 분위기 자체가 너무 편안하게 바뀌었어요. 절대평가니 서로 경쟁할 필요가 없으니까요. 학생들에게 왜 그런 것 같냐고 물어봤어요. ‘중학교 때 시험을 보면 친구보다 내가 더 좋은 점수를 받아야 하니 예민할 수밖에 없다’고 하더라고요. 시험 자료도 나누지 않고요. 하지만 이곳은 오히려 협력하고, 이해하고, 서로를 지원합니다. 시험기간이 되면 다같이 모여서 준비하죠. 결국 구조와 시스템이 바뀌는 게 중요하더라고요."
▶오늘 아이들을 만나보니 확실히 표정이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기존 수업방식과 다르다보니 교사들이 처한 어려움도 만만치 않을 것 같습니다. 어떤가요?
“최근 초과근무데이터를 산출해봤어요. 표선고 교사들의 초과 근무 시간은 조건이 비슷한 읍면학교 대비 2.5배더라고요. 기존과 다른 교육이니 수업 준비에 상당한 시간이 걸리고, 시험 역시 논서술형이다보니 채점하는 데도 많은 시간이 필요하거든요. 학생들에게 피드백하는 시간도 있으니까요. 초기 과정이니 더욱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요. 실적 부담도 있죠. 학생과 학부모들도 교육 결과에 대한 기대들이 있잖아요. 전국적으로도 관심을 받고 있고, 공교육의 모델로서 성공해야 한다는 물리적·심리적 부담들이 큰 상황이긴 합니다.”
▶기초학력이 부족한 학생들을 안고 다 같이 함께 성장하는 것이 공교육의 핵심 중 하나 잖아요. IB 교육 과정은 어떨까요. 학생들이 이탈하기도 하나요?
“1학년에서 2학년으로 올라가는 시기에 전학을 가는 학생이 있긴 합니다. 10~15명 정도인데, 제주시내 학교로 많이 가요. 이는 IB도입 이전에도 있던 추세이기도 하고요. 특히 최근에는 코로나 펜데믹의 영향도 있었던 것 같아요. 학교에서 부대끼기 보다는 원격수업을 많이 하다보니 정서적 문제를 겪는 학생이 전보다 늘어나긴 했어요. 이는 표선고 뿐만 아니라 전국 학교가 겪고 있는 문제이기도 하죠. 학습의 격차를 갖고 있는 다양한 학생들을 어떻게 통합적으로 포용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현실적으로 가장 중요한 과제입니다. ”
▶자칫하면 ‘원래 공부 잘하는 학생만 IB학교로 보내서 결국 엘리트 교육화되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올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표선고는 다른 IB학교처럼 엘리트화 되면 안된다고 봅니다. 첫 번째는 지역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인데요. 적어도 표선·남원지역에 있는 아이들은 지역에 기반한 학교에 다닐 수 있으면 좋잖아요. 지금 표선중에서 표선고로 진학한 학생들이 약 45% 정도 되거든요. 나중에 세월이 흘러서라도 표선고가 지역의 학생들을 수용할 수 있는 공립학교로 남아야 한다고 봅니다.
표선고가 명문고가 되는 것은 바람직한 방향은 아니라고 생합니다. 다양한 수준의 지역 내 학생들을 포용적으로 담아내는 공교육 모델이 됐으면 좋겠어요. 공부를 잘하는 학생도, 못하는 학생도 함께 어울려서 공부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 싶거든요. 제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핀란드 교육처럼요. 다양한 학생들이 같이 공부함에도 불구하고 높은 학력 수준을 유지하는 교육이 지향해야 할 방향이 아닐까요."
▶ 마지막으로 더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해주시죠.
“지금 제주 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교권침해, 학생인권침해, 입시 등 교육 관련 병폐저적 이슈들이 드러나고 있잖아요. 대한민국이 점점 위기상황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는 상황이라고 보거든요. 국가발전 뿐만 아니라 사회갈등, 개인 삶의 질 등 모든 문제를 풀어나갈 수 있는 방안의 핵심에는 결국 교육에 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지금이 변화를 위한 골든타임이라고 봅니다.
IB교육의 재미있는 점은 진보와 보수가 함께 지지하고 있어요. 파벌이나 진영 대립이 없는 이슈라는 거죠. 사회를 지탱하는 사람들은 평범한 사람들이거든요. IB교육이 지향해야 할 부분은 사회 불평등을 타파하는 것입니다. 학교 서열 먼저 깨지 않으면 불평등은 깰 수 없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