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아프다. 집을 뛰쳐나온 어떤 여자 아이가 살아가는 삶이 나를 아프게 한다. 그 아이는 술 취한 아빠에게 수 없이 맞았다. 아이 엄마도, 아빠에게 셀 수 없이 맞았다. 아이에겐 밥을 주지 않는다. 아이는 살려고 집을 나왔다. 아이를 사랑하는 진짜 엄마를 찾으러 길을 나선다. 이름도 모르고 나이도 모르는 여자 아이는, 쥐떼들이 몰려와서 집에 남아있는 아빠를 먹었으면 한다.
아이는 집에서 멀리 떠나려고 기차를 탄다. 그 길에서 다방에서 일하는 여자를 만나고, 국수를 팔며 혼자 사는 할머니를 만나고, 하느님 뜻을 따라 착하게 살라고 말하는 목사를 만나고, 낡고 쓰러진 집에 갇혀 사는 사람을 만나고, 시장판을 떠도는 각설이패를 만나고, 자기처럼 집을 버리고 나온 십대 아이들을 만난다.
아이가 만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이 땅에서 버림받은 사람들이다. 다방에서 일하는 장미언니는 세상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처럼 떠벌리지만,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사내에게 늘 맞고 산다. 시골 후미진 곳에서 국수를 팔며 살던 할머니는 도시에서 갑자기 쳐들어온 아들네 식구들 때문에 그나마 평온했던 삶이 깨진다. 더럽고 잘못된 세상에서도 오로지 하느님만을 부르짖으며 착하게 살라고 하는 목사가 세상을 더 더럽히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무도 살 것 같지 않은 낡은 집엔 국가권력 앞에 무참히 짓밟히는 사람들을 구하려고, 국가고시 공부를 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늘 스스로 목숨을 끊는 꿈을 꾸며 버려진 짐짝처럼 사는 사내가 있다. 각설이패를 이끄는 대장은 입으로 불을 뿜고 불을 삼키다, 입이 하얗게 타들어가도 그 일을 해야 살 수 있다. 한 지붕 밑에 사는 아빠는 여러 번 새 여자를 데리고 살며 자기 딸이 다른 이에게 겁탈을 당해도 돈 욕심만 내고, 새 아빠에게 수없이 강간을 당하다 목숨까지 잃게 되는 아이도 있다.
이렇게 끝도 없이 아픈 현실 앞에서 이름도 모르고 나이도 모르는 어린 여자 아이는 어떻게 살아가나. 하지만 아이는 밑바닥을 사는 사람들을 만나며 몸은 힘들지만 편안함을 느낀다. 그런 편안함을 느낄 만하면 다시 떠나야 하지만.
아이는 ‘평화’를 찾고 싶은데 만나는 사람들 모두는 꾸겨지고 비참하게 산다.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행복할 수 없는 세상에 아이가 할 수 있는 일은, 자기 목숨을 던져서라도 동무인 여자 아이를 겁탈했던 그 여자 아이 새 아빠를 죽이는 일이다.
아이는 엄마 아빠가 혼례를 치르던 날을 떠올린다. 서로 사랑하겠다는 꿈을 꾸며 혼례를 치르는 아빠와 엄마 그리고 엄마 뱃속에 자라는 자기를 생각한다. 그때만이 아이에겐 ‘평화’였다.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세상은 아이에게 끝없는 슬픔을 주었다. 어쩌면 나도 그 아이가 슬퍼하도록 도와준 것은 아닐까. 날마다 목숨을 이으려고 지하철을 꾸역꾸역 오르내리는 수많은 사람들이 그 아이를 지옥 같은 삶으로 내몰았을지도 모른다. 그런 무관심으로 말이다.
가난하지만 평화롭게 살 수는 없나. 이런 소박한 꿈을 짓이기는 세상을 어떻게 바꿀 수 있을까. 이 글을 읽으며 내내 떠나지 않는 물음이다.
‘내 곁을 스쳐가는 한 소녀가 느끼는 아픔’을 함께 느끼려 할 때 이런 물음에 답을 할 수 있지 않을까. 2010년에 나온 책이다. 14년이 지났지만 소설에 나오는 내용은 지금도 여전하다. 우리가 그런 세상에 눈을 돌린다면 그 ‘소녀’는 지금도 바로 우리 곁에서 아파하다 죽는다. 참 읽기 힘든 책이지만 꼭 한 번 읽었으면 좋겠다. 한 번 읽으면 두 번 읽게 되는 책이다.
글쓴이 은종복 씨는 제주시 구좌읍 세화리에 위치한 인문사회과학 책방 '제주풀무질'의 일꾼이라고 자기 자신을 소개한다. 책과 사회를 또박또박 읽어내려가는 [또밖또북] 코너로 매달 마지막 주에 독자들과 만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