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뜨르 비행장 바로 옆에 야구장과 36홀 파크골프장을 짓는다?
일제강점기 일본군의 군사시설을 포함한 20세기 초반 전쟁 관련 시설 일부가 원형을 유지하며 남아있고 아름다운 자연 경관과 독특한 지질 구조를 가지고 있어 역사학·지질학·생태학 등 학술적인 가치가 높은 송악산·알뜨르 일대.
지난 2005년 제주특별자치도가 ‘세계평화의 섬’으로 지정되면서 이 일대를 평화대공원으로 조성하려는 사업이 추진되기 시작했다. 이는 문재인 전 대통령의 핵심 공약이기도 했다. 하지만 최근 오영훈 제주도지사가 해당 부지에 스포츠 관련 시설 건립을 검토하고 있다고 밝히며 제주사회에서 논란이 일었다.
이와 관련한 오영훈 도정의 구상을 엿볼 수 있는 자리가 18일 오후 제주웰컴센터에서 마련됐다. 도는 이날 ‘마라해양도립공원 공원계획 변경 용역 최종보고회’를 개최, 평화대공원 부지에 스포츠타운을 조성하는 계획안을 발표했다.
이날 배부된 발표자료에는 알뜨르비행장 동쪽 바로 옆에 야구장 4개와 파크골프장이, 일제동굴 진지와 고사포구지 등 유적지와 접한 동쪽에 전지훈련 복합시설이, 남쪽에 캠핑구역이, 서쪽에 우주체험시설 검토구역이 그려져 있다.
다만 이날 설명에 나선 임홍철 제주도 기후환경국 환경정책과장은 이 계획은 확정된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며 이 자리에서 나온 의견들을 내년에 실시할 ‘제주평화대공원 조성사업 타당성 조사 용역’(1억9000만원 규모) 과정에서 반영하겠다고 했다.
이날 용역을 수행한 주식회사 제이피엠(건축·토목·컨설팅 업체)에 소속된 책임연구원의 발표가 끝나고 방청객과 임홍철 제주도 기후환경국 환경정책과장 간 질의응답이 이어졌다.
이 자리에서는 특히 ‘스포츠타운 건립 계획’이 역사적으로나 환경적으로나 보전 가치가 높은 공간을 훼손할 수 있다는 우려가 쏟아져 나왔다. 송악산과 알뜨르 일대의 가치를 보전해 후세대에 전할 수 있는 고민이 우선되어야 하는 목소리들이었다.
평생 역사를 연구했다는 한 시민은 “역사 유적지에 왜 스포츠 시설이 들어가야 느냐. 유적지 바깥에도 (스포츠 시설을 조성할)땅이 얼마든지 있다. 유적지는 한 번 망가지면 회복이 안 된다”며 “경복궁 같이 부지가 넓은 곳에 산책로와 탐방로, 골프장이 있다고 생각해보라. 저 계획대로 (알뜨르 유적지 바로 옆에 스포츠타운이 건설)된다면 전국의, 동북아시아의 조롱거리가 될 것”이라고 강하게 힐난했다.
이에 임홍철 과장은 “문화재를 보전하기 위해서는 우선 사람들이 가야한다. 경복궁에는 수 천명이 찾는다. 평화대공원(만) 만들면 누가 가느냐. 사람들이 안 간다. 이 일대 전체를 활성화하기 위해서는 사람들을 유인할 수 있는 무엇인가가 있어야 한다”고 답했다. ‘관광객 수’가 ‘역사적 가치’보다 우선한다는 설명이다.
서귀포시에 있는 강창학종합경기장을 자주 이용한다는 서귀포 시민은 “경기장에 축구장이나 야구장 시설이 잘 돼 있다. 그런데 연이용률이 얼마나 되는지 궁금하다. 거의 매일 가는데 갈 때마다 이용자가 거의 없다”며 “대정에 저런 시설을 지으면 같은 서귀포 지역에 중복 투자를 하는 건 아닌가”라고 했다.
이어 “해당 지역은 1920년부터 100년에 걸쳐 군 비행장이 있던 지역이기 때문에 학술적인 연구가 반드시 필요한 곳이다. 2005년 이후 관련 학술연구가 있었는지 궁금하다. 이 연구를 토대로 이 공간의 가치를 제대로 확인한 뒤 사업을 추진해야 한다”고 했다.
이에 임 과장은 “학술용역 실시 여부는 검토하지 못했다. 당초 용역진과 축구장 조성을 검토했다가 경쟁력이 떨어져서 야구장으로 변경했다. 내년 이와 관련한 타당성 용역을 실시하기 때문에 말씀하신 부분을 다시 검토할 것”이라고 답했다.
강순석 지질학 박사는 “송악산 일대는 수성화산(바닷 속에서 화산활동으로 형성된 화산)이라서 지질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지역이다. 이 때문에 천연기념물로 마땅히 지정해야 하는 곳인데 관광단지 개발 필요 때문에 못하고 있었다”며 “지금 계획은 주객이 전도됐다. 평화대공원을 잘 조성하고 난 뒤 모슬포 주민을 위한 시설이나 스포츠타운 같은 시설은 나중에 충분히 만들 수 있다”고 지적했다.
대정읍 한 주민은 “저 역시 우리 마을에 관광객 유치와 스포츠타운 유치 모두 원한다. 그런데 대정읍 내 폐교된 학교 부지 규모가 상당하다. 축구장이나 야구장을 짓고 싶다면 그 부지를 활용하는 방안을 고민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시설이 분산되면 거기에 따른 관광 효과도 있을 것”이라고 제안했다.
이어 “제주평화대공원 일대는 다른 곳과 비교할 수 없는 가치를 지닌 곳이다. 이 가치를 더욱 돋보이는 쪽으로 개발을 해야 한다. 특히 알뜨르비행장은 1930년대 일본군이 중국 난징을 폭격하는 전투기 기착지로 쓰인 곳이다. 이런 역사적인 의미를 고려할 때 중국 관광객과 일본 관광객 수십 만이 찾아올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유적지다. 역사적인 가치를 땅에 묻어버리고 스포츠 시설을 짓는다는 건 대정 주민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관광이다”라고 했다.
이에 임 과장은 “말씀하신 그런 부분을 고민하지 않았다. 교육청 부지가 남는다고 해서 우리 마음대로 할 수는 없다. 또 분산해야 한다는 의견에 대해선 시너지 효과라는 건 밀집되어야 나는 효과다. 산발적으로 하면 효과가 없을 수 있다. 내년 타당성 용역을 할 때 말씀하신 부분을 같이 보도록 하겠다”고 답했다.
제주도민이라 소개한 한 시민은 “전문가에 따르면 대정 지역은 동북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일본 군사시설이 잔존한 곳이다. 일본에도 없는 곳이기 때문에 보전해야만 하는 소중한 곳으로 알고 있다”며 “우리는 ‘평화’라는 말에 주목해서 이 공간을 평화에 대한 연구와 훈련의 장소로 만들어나가야 한다”고 했다.
이어 “도면을 보면 그런 공간을 스포츠타운이 혈관을 막듯 막고 있다. 평화대공원으로 조성하겠다는 공간이 최소한 ‘평화’라는 것이 무엇이고 왜 이곳이 평화대공원이 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찾아볼 수 없다”며 “이곳에 스포츠타운을 세운다는 것은 제주도민에 대한 예의도 아니고 세계인들에 대한 예의도 아니다. 제주도를 부끄럽게 만들 프로젝트”라고 했다.
이에 임 과장은 “내년 용역에서는 스포츠타운만 구상하는 게 아니라 평화대공원 전체를 어떻게 할지 검토할 것이다. 우려하시는 부분은 내년 용역에서 검토가 될 것”이라며 “일제 유적지를 잘 지키자는 데 대해서는 누구도 반대를 안 한다. 연계영역을 만들어서 역사, 문화, 탐방로까지 하나의 세트로 하자는 것이다. 지금까지 대정주민이 개발에서 소외된 부분을 어떻게 보상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의 답이 복합시설이다. 기존 역사문화를 훼손하는 일이 없도록 하겠다”라고 답했다.
알뜨르 비행장에 종종 역사 해설을 하러 간다는 한 시민은 “함덕해수욕장을 가서 물어보라. 그 마을주민들은 자기 바다를 다 내줬는데 정작 돌아오는 이익이 없다. 땅 내주고 시설 짓게 하면서 지역 경관을 망가뜨리고 가치를 훼손하게 될 것이다. 돈은 엉뚱한 사람들이 가져가는 꼴을 만들어선 안 된다”고 했다.
이에 임 과장은 “이 일대에 짓는 숙박시설은 마을이 위탁 받아서 운영하고 관리할 예정”이라고 답했다.
5년 가까이 송악산 일대 개발을 막는 데 앞장선 한 대정 주민은 “제주도정은 제주평화대공원 조성과 마라해양도립해양공원 확대 지정과 관련해 주민들에게 제대로 설명한 적이 없다. 주로 마을 내 단체장 대상으로만 이뤄졌다”며 “청년들이나 40~50대 주부들의 의견을 들어보면 ‘스포츠타운 건립’ 계획이 송악산 가치를 지키는 방향과 맞지 않다는 이야기를 많이 한다. 그분들의 의견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라고 지적했다.
이어 “저는 대정에서 태어나 살면서 이곳 주민이라는 데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어디에도 이런 데가 없다. 우리 대정주민이 겪은 고통과 상처를 생각하면 눈물이 절로 난다. 하지만 그렇게 살아왔다고 해서 당장 눈 앞에 보이는 이익만을 생각할 것인가”라고 했다.
아울러 “빛나는 대정을 만들기 위해서, 후손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대정을 전하기 위해서 우리는 담대한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며 “경제적 효과를 많이 이야기하는데 송악산 일대를 국가정원으로 발전시킬 수도 있다. 그러면 대정뿐만 아니라 제주도민 전체가 지금 예상되는 이익보다 더 많은 경제적 효과를 누릴 수도 있을 것”이라고 제안했다.
이날 제주평화대공원 부지 일부의 소유자인 국방부와의 협의 여부에 대한 질문도 나왔는데 이에 임 과장은 “국방부와 협의된 건 없다. 내년 관련 용역을 하면서 관련 협의를 해나갈 것”이라고 답했다.
이날 보고회에는 스포츠시설 조성 계획을 환영하는 시민들도 의견을 냈다. 대부분 대정읍 내 각종 단체장직을 맡고 있는 주민들이었다.
대정읍 신영로에 살고 있다는 한 주민은 “‘스포츠’는 우리 생활이다. (대정읍이 아닌)다른 지역 사람들이나 같은 지역이라 하더라도 이를 싫어하는 사람들의 반대 의견을 따를 필요는 없다. 최소한 지방정부, 도청 차원에서 기획하는 것이 잘 되고 있다면 격려해야 한다. 군사시설을 마구잡이로 건설해서 우리 주민들이 억울한 일이 한 두 개가 아니”라고 했다.
대정읍에서 노인회장을 맡고 있다는 한 주민은 “‘6.25사변’ 때 훈련소를 대정에 설치할 대 지역주민은 어려운 심정이었다. 하지만 나라를 지키기 위해 피눈물나는 노력을 했다. 그런 주민의 넋을 달래줘야 하지 않겠느냐. 여기보다 못한 곳도 관광화가 되고 있다. 제주도민들은 이 계획에 찬성해 달라”고 했다.
스포츠타운 사업을 추진하는 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다는 한 시민은 “대정주민들은 일제강점기 때 땅을 빼앗기고 돌려받지 못하고 국방부로 이관되는 아픔을 갖고 있다. 도에서 이번에 다행히 도립공원과 연계해서 스포츠타운을 제안하는 데 대해 지역주민의 입장에서 환영한다. 스포츠 시설이 문화 유적지를 파괴하고 있는 것처럼 비춰지고 있는데 저기가 다 허허벌판”이라고 했다.
이어 “파크골프장을 조성하면서 나무를 식재할 예정이다. 문화 유적지를 보전하려면 나무가 필요하지 않느냐. 평화대공원 예정지와 스포츠시설이 시너지 효과를 낼 것이다. 또 대정은 체류형 관광객이 없다. 사람이 안 가는데 평화대공원이 만들어지면 뭐하느냐”고 했다.
송악산 인근에 살고 있다는 한 주민은 “스포츠타운 건설 계획은 수년 전부터 추진해왔다. 잘 되고 있다고 본다”면서 “산이수동 쪽에 주차장을 추가 조성하는 방안을 검토해 달라”고 했다.
대정주민이라고 소개한 한 시민은 “대정주민이 지금까지 역차별을 받았다. 이제 좀 도청에서 신경을 써준다는데 왜 그것을 반대하느냐. 내년 용역할 땐 주차장과 복합문화센터 시설까지 다 합쳐야 한다. ‘평화’와 ‘스포츠’를 분리하는 건 넌센스”라고 했다.
한편 이날 도가 발표한 ‘마라해양도립공원 공원계획 변경 용역’은 지난해 11월부터 1년 간 진행됐다. 도는 용역의 목적을 마라해양도립공원의 자연보전과 지속가능한 공원 이용을 도모하기 위해 공원계획 변경에 대한 생태기반 평가, 적합성 평가, 보전관리에 대한 평화대공원과의 연계성 및 경관성 등 타당성 기준을 검토해 계획에 반영했다고 밝혔다.
이어 송악산 일대 도립공원 육상부와 평화대공원을 연결하는 생태축 보전적 측면에서의 관리방안을 제시하고 지역주민의 생활불편 및 재산권 침해를 최소화하는 공원계획을 수립하기 위해 용역을 추진했다고 설명했다.
이 결과는 내년 도가 실시할 ‘제주평화대공원 조성사업 타당성 조사 용역’에도 반영될 예정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