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제2공항, 비자림로 확포장, 제주동물테마파크…. 찬성과 반대가 첨예하게 갈리는 제주 사회의 대표적인 개발사업이다. 이 사업들을 보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다. 현수막과 피켓을 들고 시위하는 사람들.
이처럼 ‘개발’은 언제나 ‘저항’을 달고 다닌다. 지금 우리에게 당연하게 여겨지는 이 풍경은 원래는 당연한 게 아니었다. 특히 4·3 당시 공권력으로부터 대규모 학살을 경험한 제주사회에서 ‘저항’은 금기시된 마음이었다.
‘저항한다’의 의미는 마땅한 내 것을 누군가 빼앗으려 할 때, 이에 맞서 지켜내겠다는 뜻이다. 때에 따라서 ‘나’라는 범위는 ‘우리’로, ‘것’은 ‘가치’로 확장된다.
제주투데이는 창간 19주년을 맞아 ‘제주대안연구공동체’ ‘인문숲이다’와 공동으로 ‘개발과 저항-제주개발사를 다시 보다’ 대중 강연을 8회에 걸쳐 진행하고 있다.
지난달 30일 이영권 제주투데이 논설위원은 네 번째 시간 ‘80년대 제주개발과 저항-탑동매립과 송악산 군사기지: 공공성과 욕망의 사회학’ 주제로 강연을 펼쳤다.
생물학적 vs 인문학적 vs 사회학적 ‘욕망’
“엊저녁에 밥을 안 먹고 막걸리 한잔하며 책을 보고 있는데 막둥이 딸이 슬그머니 와서 ‘아빠~ 치킨 시켜먹어요’ 이러는 거예요. ‘지금 치킨 먹으면 내일 후회할텐데’ 하는 생각에 먹지 말까 하다가도 딸아이 부탁을 차마 거절할 수가 없어서 결국 같이 먹었습니다.”
이 논설위원은 지난밤 딸과 함께 치킨과 맥주를 먹게 된 과정(?)을 들며 ‘생물학적’ 욕망과 ‘인문학적’ 욕망, ‘사회학적’ 욕망을 설명했다.
막걸리가 당겨 한잔 마신 건 ‘생물학적 욕망’에 해당한다. 딸 아이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어 치킨을 먹은 건 ‘인문학적 욕망’이다. 딸은 SNS를 통해 ‘치킨 먹방’을 보다가 참지 못해 아빠를 졸랐다. 이는 소셜미디어가 자극한 욕망, 사회적으로 조성, 조장된 소위 ‘사회학적 욕망’이다.
예를 들어 한림읍 금악지역 주민들은 양돈장 악취로 불편을 겪고 있다. 주민들에게 생물학적 욕망인 ‘악취가 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큰 문제가 아니다. 후각은 5~6분이 지나면 대부분의 냄새에 적응하기 때문이다. 주민들이 화를 내는 이유는 ‘우리 동네만 냄새 때문에 땅값이 떨어진다’는 것. ‘땅값’이라는 사회학적 욕망이 주민들을 분노하게 한다.
욕망은 나쁩니까
“욕망이 과연 나쁘다고만 할 수 있을까요? 자연스럽게 올라오는 걸 무조건 자제하라고 할 수 있을까요?”
개발 현장 곳곳에선 욕망과 공공성이 충돌한다. 우리가 지키려고 하는 ‘생태’, ‘환경’, ‘평화’ 등의 가치는 공공성으로, ‘개발 이익’과 ‘보상’이라는 현실은 욕망으로 치환된다. 사업과 이해관계가 없는 사람들에게 공공성의 가치는 당위를 가진다. 반면 욕망은 단죄해야 할 부도덕으로 간주되거나 어찌할 도리가 없는 본능이다. 이 때문에 욕망과 공공성은 양립할 수 없는 성격의 것으로 여겨진다.
이 논설위원은 “그동안 우리는 욕망 앞에 무기력했다”며 “욕망을 비난만 해서 문제가 해결될 것 같진 않고 그렇다고 해서 공공성을 포기할 수도 없다. 어떻게든 이 둘을 만나게 하고 싶다”고 말했다.
앞서 예를 든 금악 주민의 경우 다른 동네도 땅값이 오르지 않았다면 그저 ‘냄새 안 나면 좋을텐데’하고 말았을 수도 있다. ‘땅값’이라는 사회학적 욕망이 끼어들지 않았다면 악취 문제는 분노로까지 이어지지 않았을 수 있다.
이 논설위원은 “생물학적 욕망은 그대로 수용해야 하지만 사회학적 욕망이라면 사회적 통제가 작동할 수도 있을 것”이라며 “그렇게 욕망이 조절된다면 공공성과도 조화를 이룰 수 있지 않겠나 하는 ‘소망’으로 이야기를 풀어보겠다”고 본격적으로 강의를 시작했다.
1988년, 제주에 저항의 바람이 불다
“이전까지만 해도 토지를 수용한다고 하면 ‘수용하나보다’ 이거였는데. 6월 항쟁 이후 ‘우리도 말 골아보자(해보자)’가 된 겁니다.”
1988년 제주개발사는 이전과 전혀 다른 양상을 띤다. ‘저항’이 본격화된 것. 상반기엔 ‘탑동매립반대운동’이, 하반기엔 ‘송악산군사기지반대운동’이 있었다. 제주4·3 이후 저항의 움직임이 나타난 건 처음이었다.
왜 하필 1988년이었을까. 이 논설위원은 “사람들이 달라졌다”라고 설명했다. 1987년 6월 항쟁이라는 경험이 사람들을 달라지게 하고 저항을 가능케 했다. 시민이 역사의 주체로 본격적으로 나선 계기다.
탑동매립반대운동에서 사람들은 처음으로 정부에게 ‘돈(보상)’을 받는다. 지금은 개발사업에 당연히 따라붙는 ‘보상금’이 이때만 해도 그렇지 않았다. ‘돈’을 받은 경험은 이후 반대운동의 굉장한 추동력이 됐다. ‘불편한 진실’이지만 이후 많은 반대운동들의 밑바닥에 흐르는 정서가 ‘돈’과 관련이 깊다는 걸 부정하기 어렵다.
‘돈’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군사독재 시절과 달리 국가가 개발사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피해 주민에 대한 보상을 당연하게 했다는 측면에선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받기 시작한 ‘돈’은 욕망으로 작동해 공공성에 해를 가하기 시작한다.
탑동싸움과 송악산싸움의 특징
1988년에 일어난 두 반대운동은 중요한 특징을 가진다. 첫째 이 운동을 계기로 제주 시민사회가 형성됐다. 이전까지 집회는 국가 주도의 ‘국민동원체제’에서 이뤄졌다. 또 1987년 6월항쟁은 대학생과 재야인사들의 운동이었다. 그러나 탑동싸움과 송악산싸움은 ‘민주화 운동’과 ‘주민 운동’이 결합해 만들었다.
둘째 이 두 운동 이후 제주사회의 주민운동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그동안 권위주의에 억눌린 저항의 마음들을 운동으로 이끄는 기폭제가 됐다. 이후 제주에선 ‘환경 보호’라는 명분 아래 다양한 이슈로 운동이 일어나고 있다.
셋째 범도민적인 운동이 자리잡았다. 이전 주민운동은 사건 발생 지역 주민에게만 국한되었다면 두 운동 이후 지역 주민은 물론, 시민단체, 대학생, 도외 제주도민들이 연대해 주체로 나섰다. 이는 중앙정부와 대기업을 한편으로 하고 반대편은 제주도민으로 설정하는 구도다. 이렇게 모아진 역량은 1990년대 초 제주도개발특별법 반대운동으로 이어지게 된다.
넷째 오늘날 제주사회의 화두를 던졌다. 탑동싸움은 생태지향성을 가진 운동이었고 송악산싸움이 지향한 가치는 ‘평화’와 연결된다. (물론 이 싸움에서도 ‘돈’을 생각하고 움직인 사람들도 있다). 두 싸움은 ‘생태’와 ‘평화’를 도민사회에 각인시킨 투쟁이었다.
탑동싸움: 졸속 매립면허 논란
탑동은 두 차례에 걸쳐 매립이 이뤄졌다. 1차 매립은 제주시가 월파 방지와 도로 개설을 원하는 주민의 요구와 맞닥뜨려져 큰 잡음 없이 끝났다. 문제는 제주해양개발과 범양건영이 추진한 2차 매립이다.
제주해양개발은 돈이 되는 매립지를 찾아 구상하고 이 구상안으로 서울의 자본을 끌어들인 기획회사다. 범양건영은 군납을 주로 하던 업체로 5공세력과 연줄이 있는 기업이었다. 탑동매립사업은 졸속 매립 면허 논란이 거세게 일었다.
범양건영은 매립만 하면 모든 땅을 가져갈 수 있는 ‘봉이 김선달’ 급의 법에 따라 매립면허를 발급받았다. 매립지 제한을 둔 법률 개정안이 효력을 발생하기 일주일 전이었다.
불법성도 확인된다. 매립 면허는 해당 지역 권리자의 동의가 있어야만 발급된다. 하지만 당시 지역 해녀와 주변 횟집 경영자들의 동의를 얻은 시점은 면허를 발급 받은 이듬해로 드러나면서 문제가 됐다.
당시 도지사였던 장병구도 이 매립사업에 대한 부정적인 의견을 건설부에 제출했으나 묵살당했다. 나중에 밝혀진 사실이지만 범양이라는 자본과 중앙권력(건설부, 청와대)의 결탁으로 이뤄진 사업이었다.
4개의 욕망
탑동싸움의 전개 과정은 4단계로 나눌 수 있다. 1기는 1988년 3월부터 같은 해 6월까지로 해녀들이 중심이 돼 ‘피해보상’을 요구한 시기다. 해녀들이 1차로 보상을 받았는데 매립에 동의하고 받은 돈이 한 명당 600만원이었다. 이만한 돈을 한꺼번에 받아본 적이 없는 해녀들은 불만 없이 기뻐했다.
그런데 같은 해 12월 횟집주인들에겐 각 3500만원씩 보상이 지급됐다. 이미 동의서에 도장을 찍고 보상금을 받은 해녀들은 사기당한 기분만 들었다. 그래서 싸움의 명분을 찾던 중 범양건영이 해산물 양식에 필요한 ‘먹돌’을 옮겨주기로 했으나 지키지 않은 사실을 확인했다. 43명의 해녀들은 ‘약속 위반’을 이유로 싸움을 시작했다. 범양과의 투쟁은 짧게는 4년, 길게는 20년 넘게 이어졌다.
여기서 해녀들의 투쟁 명분은 ‘먹돌’이지만 실제로는 ‘보상금’에 있었다. 반면 이 싸움에 함께한 시민단체와 대학생들에게 ‘먹돌’은 생존권과 생태 환경을 뜻했다. 같은 ‘먹돌’을 두고 욕망과 공공성이 대립했다.
처음엔 해녀들의 싸움으로 시작됐지만 제주대학교 학생들이 결합하게 된다. 1988년 3월23일 ‘제주대 탑동불법매립공동대책위원회’(이하 탑대위)가 결성, 범양은 다음 달인 4월 해녀들에게 추가 보상과 활석 투척을 약속했다. 당시 대학생들은 해녀들에게 보상금 수령 거부를 권유했으나 해녀들은 이를 거절했다. 이 시기에 해녀들은 싸움의 현장에서 물러났다.
2기는 1988년 6월부터 1989년 2월까지로 학생들과 민주화 운동 단체들이 중심이 된 싸움이다. 운동의 목표는 ‘피해보상’에서 ‘매립면허 취소’로 바뀌었다. 이는 학생들이 매립 과정을 조사하다가 면허 자체에 불법성이 있음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관련자 4명을 공유수면매립법 위반으로 고발했으나 제주지방검찰청은 불기소로 끝냈다.
3기는 1989년 2월부터 1989년 11월까지로 사업자의 개발이익을 제주지역에 환원하도록 요구한 시기였다. 공유수면매립법 위반 관련 고발이 검찰에 의해 기각된 데다 매립이 상당히 진척된 상황이었다. 전에 내세웠던 ‘매립면허 취소’라는 슬로건이 현실성 없는 주장이 되자 ‘개발이익 환수’라는 목표로 바뀌었다.
4기는 1989년 11월부터 1991년 12월까지로 병문천 복개 반대운동의 시기다. 같은 해 9월 실시된 국정감사에서 매립면허 발급에 문제가 있었다는 사실이 공론화됐다. 범양은 자신들에게 불리한 국면을 전환하기 위해 병문천 일부 구간을 복개해 제주시에 기부채납하겠다고 도지사와 합의하기에 이른다.
이 과정에서 탑대위는 ‘합의 완전 무효’를 주장하며 조직을 ‘탑동문제해결 범도민회’로 확대 및 개편했다. 범도민회는 탑동 상업용지의 35% 환수를 주장했다. 앞서 탑대위는 80%, 탑동문제협의회는 50%를 제시했으나 그보다 더 줄어들게 됐다. 하지만 이마저도 별 진전이 없었고 국정감사 지적사항은 거대 여당의 출현과 함께 유아무야 되고 말았다.
이들의 싸움을 더 어렵게 만든 건 또 다른 욕망이었다. 병문천 일대 주민들이 ‘병문천 복개 찬성’을 적극적으로 주장한 것이다. 행정의 사주가 있기도 했지만 복개가 그들의 욕망과 맞아떨어지기도 했다. 사실 병문천 주민들은 탑동 매립과는 관계가 없었다. 화장실로 쓰이다시피 한 병문천을 말끔하게 덮겠다고 하니 주민들이 반기고 나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1990년 2월17일 제주시와 범양, 범도민회가 만나는 3자 회담이 열렸다. 병문천 복개에 합의하고 추가로 20억원의 장학기금을 제주시에 기부하는 것으로 최종 결론이 났다. 1991년 12월27일 준공검사가 이뤄져서 사실상의 탑동싸움은 여기서 막을 내린다.
송악산싸움: 이겼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군사기지가 있었던 대정 알뜨르 비행장은 지금도 약 70만평이 군사시설 보호구역으로 묶여있다. 1985년 건설부가 ‘특정지역 제주도 종합개발계획’을 내놓고 제주도 지방정부가 송악산 일대를 관광지구로 지정했다.
게다가 1987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노태우 후보는 이 일대 국방부 땅을 주민에게 저가로 불하하겠다고 공약했다. 주민들은 환호하며 기대했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1988년 8월12일 “송악산 관광지구 취소”라는 타이틀이 신문을 도배했다. 알뜨르 비행장 일대 군사기지와 비행장을 확대해 짓겠다는 발표였다. 기존 70만평에 땅을 더 수용해 197만평 규모의 군사기지를 건설할 계획이 알려졌다.
열흘도 채 지나지 않은 같은 달 21일 마을 청년을 중심으로 ‘모슬포 군비행장 설치 결사반대 대책위원회 준비 모임’(이하 대정준비위)가 꾸려졌다. 다음 달인 9월 26일엔 대정초등학교에서 집회를 열었는데 대학생, 재야인사, 시민단체 회원들이 2000여명 모였다.
10월1일엔 ‘대정읍 공동대책위원회’(이하 대정대책위)가 꾸려졌다. 이 조직의 특징은 마을 이장들을 전면에 배치해 대표성을 강화한 점이다. 여기에 기존 군사시설 보호구역의 임대 경작자, 새로운 군사시설 보호구역에 토지가 편입되는 주민, 생계 활동을 위협받는 해녀와 어민, 대정 출신 대학생 등이 적극적으로 결합했다.
이들은 피해보상을 아예 제외하고 계획 자체의 철회를 요구했다. 군사기지가 들어설 경우 생존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던 것 같다. 같은 달 30일엔 제주시에서 도민대책위가 집회를 열어 북초등학교에서 2000여명이 모였다. 탑동싸움에서 이미 조직이 만들어진 상황이라 바로 반대운동에 돌입할 수 있었다.
여기까지는 탑동싸움의 연대와 유사하다. 그런데 송악산싸움에선 관제 야당급이던 신민주공화당 국회의원도 협조할 의사를 밝혔고 여당인 민정당 역시 노태우 대통령의 공약사항 위반이라며 국방부에 재고할 것을 요청했다.
도지사도 청와대와 국방부 등을 방문해 재검토를 요청했고 도 관광협회까지 나선 것도 이례적이었다. 대정읍사무소, 대정농협, 대정지사까지 재정 지원과 지지를 표명했다. 지역출신 모임과 친목회까지 합세했다.
그러자 국방부가 7개월 만에 군사기지 건설 확대 계획을 포기했다. 지금 제2공항 건설 추진 과정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이 논설위원은 “시간만 끌면 사람들이 지치게 되어있는데 국방부가 그렇게 쉽게 포기한 배경에는 반미 정서의 확산을 차단하려던 미국의 주문이 있지 않았을까 생각한다”고 추측했다.
이어 “그 당시엔 이렇게 뭉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며 “하지만 이후의 운동은 거의 언제나 내부 분열이 있었다. 어떤 요인이 이 정도의 결집을 가져온 것인지 지금까지도 궁금하다”고 말했다.
물론 송악산 반대운동은 이긴 싸움이었다. 하지만 그 이후 운동을 보면 ‘1라운드’의 승리에 불과하다. 화순 해군기지 건설 시도, 강정 해군기지 건설, 제주 제2공항 건설 시도가 이어졌다. 모든 싸움에선 항상 내부 분열이 생겼다. 승리의 경험을 계승하지 못한 게 송악산싸움의 한계였다.
송악산싸움에서 과연 욕망이 공공성에 항복한 것일까. 이 논설위원은 “그렇지 않다”고 답한다. 욕망은 잠시 보류되었을 뿐이라고. 만약 투쟁이 길어졌다면 유보됐던 개발 욕구가 수면 위로 올라왔을 것이고 내부 분열까지 이어졌을 거라고 예상했다.
이 논설위원은 “개발 자체를 반대할 이유는 없다. 다만 그 개발이 생태환경적 관점에 어긋나지 않게 고급스러워야 한다”며 “자기 땅에 애정을 가진 사람이라면 오히려 품격 높은 개발에 찬성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하지만 대부분은 자신이 소유한 땅값이 뛰는 걸 원한다”고 탄식했다.
그러면서 알뜨르 일대 평화대공원 조성 계획에 대해 “벌써부터 욕망이 난무한다”며 “해방 100주년인 2045년을 완공 시점으로 잡고 대략 10개 구간으로 나눠 차근차근 만들어보자”고 제안했다. (☞관련기사 안단테, 알뜨르)
기승전-부동산 말고 기승전-사회안전망
이 논설위원의 ‘소망’이라는 공공성과 욕망의 조화는 과연 현실 가능할까. 그는 욕망의 출발이 어디인지를 살펴봐야 한다고 강조한다. 단 ‘생물학적 욕망’이 아닌 사회적으로 조장되고 만들어지는 ‘사회학적 욕망’에 한해서다.
이 논설위원은 ‘고강도 경쟁사회’가 만들어낸 ‘불안’이 한국사회의 가장 큰 욕망이라고 주장했다. ‘공정’이 이 시대 화두가 된 이유기도 하다. 경쟁이 극심한 만큼 경쟁 과정에서의 부정은 용납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오징어게임’에서와 같이 게임의 룰을 부술 생각은 않고 그저 공정만을 외친다.
그렇다면 경쟁을 부추기는 입시제도만 바꾸면 될까? 손을 댈수록 애들만 죽어나고 학부모의 등골만 휜다. 교육 문제는 이미 교육계 안에서 해결이 불가능하다. 이 논설위원은 “고졸자와 대졸자 간 임금 격차를 없애는 것이 해결 방법”이라고 주장했다.
‘좋은 대학을 나온 사람이 좋은 직장에 들어간다’는 사회 구조를 부숴야 한다. 임금에 차별이 없다면 대학은 학문을 연구할 사람과 전문직으로 진출할 사람들만 가게 된다. 입시 경쟁은 자연스레 줄어들고 시험능력주의는 해체될 것이다. 사회가 만든 욕망은 사회적으로 풀어야 한다. 시스템을 바꾸는 것이다.
한국 사회에 만연한 불안을 해소하는 방법은 존재할까. 답은 간단하다. 국가가, 사회가 개인의 불안을 책임지면 된다. 개인들이 불안해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미래에 대한 불안이다. 아프면 어떡하지, 돈을 못 벌면 어떡하지, 집값이 미친듯이 오르는데 내 집을 갖지 못하면 어떡하지.
이 논설위원은 당장 무상교육과 무상의료를 실시하고 주거를 지원하는 등 사회안전망을 탄탄하게 만든다면 불안이 줄어들어 과도하게 경쟁할 일이 없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그에 따라 욕망도 줄어들고 땅값 상승을 기대하지 않아도 된다. 개발이익을 좇을 이유도 줄어든다.
그는 “10여 년 전부터 기본소득을 주장해왔다. 좌파가 아닌 세계 최고 부자들이 주장하는 정책”이라며 “시민들의 호주머니에 돈이 없으면 기업도 망한다. 제주도가 선제적으로 제주도민수당을 지급했으면 좋겠다”고 제안했다.
“사회적으로 만들어지는 욕망의 백신은 사회안전망입니다. 욕망이 공공성에 기여할 수 있게 만드는 겁니다. 이제 기승전-부동산이 아닌 기승전-사회안전망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