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해방전선 총 17건의 기사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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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남편의 수의
남편은 죽음의 처리에 관해 고루한 생각을 가진 남자였다. 어린 시절부터 나는 화장장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외할머니도, 아버지도 벽제에서 화장하고 산에 뿌렸다. 남편은 매장 외에는 다른 방식의 장례를 생각해 본 적이 없는 남자였다. 화장은 결단코 싫다고 했다. 이유를 물었다. “뜨겁잖아.” 이게 10년 전쯤의 일이다.그 사이 가족들의 죽음이 두 번 있었다. 시대적 흐름을 받아들여 모두 화장을 했다. 남편은 대세에 떠밀려 화장장을 받아들였다. 화장 후에는 가족묘지에 안장하는 것으로 만족했다. 가족들의 미래 묫자리도 예비되어 있었다.
연재칼럼노지2024-03-06 -
다이어트와 모둠순대
프롤로그새로 시작하는 잡지의 막내기자를 구하느라 아내를 처음 만났다. 아내를 소개해준 또 다른 후배까지 대동하고 광화문의 김치찌개 식당으로 향했다. 그게 나의 면접이었다. 그때의 아내는 이제 사회에 막 나온 X세대였고, 집단 속에서의 조직이나 위계 따위를 크게 의식하지 않는 부류였다. 요즘으로 치면 MZ세대 사회 초년생이랄까. 샛노랗게 물들인 머리, 바닥을 쓸고 다니느라 밑단이 다 헤진 통 넓은 청바지, 그리고 오버핏 야상 차림. 그나마 짙은 화장이나 타투 같은 게 없어서 덜 무서워 보였다.사는 곳은 경기도고, 노는 곳은 주로 강남
연재칼럼삐리용2023-08-14 -
남편의 '자기만의 방'
([부부해방전선] 흔들리는 당근 속에서 장범준을 보게 된 거야에서 이어집니다.)“사북이다!”떨리는 마음으로 전화를 받았던 그의 목소리와 표정은 급격하게 불행해졌다. 믿거나 말거나 장범준이 썼다던 드럼이 주인공인 그 드라마에는 어떤 반전도 없었다. 제주의 옛날 사람이 포착한 드럼을 다른 이들이 보지 못할 리 없었다. 사북 인근에서 남편보다 한 발 빠른 구매자가 나타난 것. 그럼 그렇지. 다시 말하지만, 나에게는 그 드럼을 허락할 의사가 분명히 있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 그가 현실을 받아들이고 제풀에 지치기를 바랐다.하지만 그는 자꾸
연재칼럼노지2023-05-23 -
흔들리는 당근 속에서 장범준을 보게 된 거야
남편이 새벽부터 나를 흔들어 깨웠다. 눈을 떠보니 5시쯤 되었나. “사고 싶은 드럼이 당근에 나왔어!” 이 남자가 밤을 샌 건가? 그러고도 남을 자이긴 하다. 직장인 오케스트라에서 열심히 활동하는 J부부를 만났는데, 그들 덕분에 엉뚱하게 그의 ‘음악인 로망 버튼’이 눌려버렸다. 게다가 그 부부 동반 모임에는, 데뷔 30년 차인 우리나라 최고 밴드의 베이시스트까지 있었다. 다 음악을 하는데, 우리 부부만 아니었던 것이다.그의 단순한 사고 회로가 작동했다. 그는 우리 부부만(혹은 나는 빼더라도 자기만이라도) 뭐든 연주하면 일 년에 한
연재칼럼노지2023-05-15 -
절반의 아내
아내는 의외로(?) 말이 많은 편이다. 누군가 1을 말하면 그 1에 2, 3을 보탠다. 그래서 지인들과의 대화할 때 늘 적극적이고, 주도적이다. 만약 아내가 누군가의 말에 추임새만 넣고 있다면, 필경 마주하고 있는 상대방과의 대화가 불편하다는 신호임이 분명하다.아내의 다변은 아침 식사에서 빈번하게 확인된다. 우리의 아침 식사는 다섯 식구가 오붓이 모여앉는 경우는 드물다. 넷 혹은 셋이 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셋일 경우는 아내와 장모님 그리고 나다. 식사 자리에서 아내가 어머니의 말에 단답형으로 끝내는 일은 결코 없다. 꼬박꼬박 대꾸
연재칼럼삐리용2023-04-05 -
핫도그와 혼수를 맞바꾼 남자
남편은 손님이 떠난 자리에 남겨진 음료잔과 음식 접시를 서둘러 치운다. 그는 종종 내가 마시던 커피잔도 가져가서 홀랑 씻어 버린다. 설거지할 것들을 찾는 하이에나처럼 기민하다. 가게로 찾아온 친구들과 함께 와인이나 맥주를 마시는 경우에도, 그는 설거지를 자신의 몫으로 여긴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그가 설거지를 미루는 일은 없다. 좋은 습관을 가진 남자다. '인간식기세척기'이라는 별명도 붙였다. 종종 친구들이 부러워 한다. 다들 자기 남편 얘기를 꺼내며 한 마디씩 보탠다. “세상에. 저런 남편이 어디 있어?”하지만 악마는 디테일
연재칼럼노지2023-03-08 -
아내는 나에게 죽음에 대해 가르친다
2월의 어느 날, 아내에게 부고가 전해졌다. ‘피스 언니’가 죽었다. 지난 몇 년 동안의 힘겨운 투병과 이식수술 끝에 회복의 가능성을 점칠 무렵 폐렴으로 세상을 떠났다.그녀는 우리 집 여름 능소화를 좋아했다. 가을 금목서를 좋아했다. 그녀는 내 아내의 어리버리한 순진함을 좋아했다. 밝은 농담과 감각어린 취향을 좋아했다. 그리고 내가 만드는 크림치즈 파운드케이크와 에그 타르트를, 또 마르게리따 피자를 좋아했다. 아내와 피스 언니는 많이 다른 사람이었지만, 한 가지 통하는 것이 있었다. 죽음의 처리가 그랬다.십 수 년 전쯤의 이야기부터
연재칼럼삐리용2023-02-22 -
아내가 책을 버렸다, 고로 나도 버릴지 모른다
버렸다. 책을. 아내가.모두 62박스. 한 박스 당 20권씩 담았으니 1240권을 버렸다. 더러 중고서점에 팔았다고는 하나 기껏해야 어떤 것은 한 권 당 1000원 남짓, 어떤 것들은 300~500원이니, 그것들도 버린 것과 별다를 바 없는 노릇이다. 집안의 어떤 공간이나 물건을 정리하고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내는 아내의 노동은 도발적이다. 충동적이다. 자발적이고 집요하다. 그리고 나름대로 자신만의 주기를 갖고 있다. 이번에는 그 대상이 책이었다.“다락방에 있는 책을 정리하겠어!”아내의 선언은 어느 날 밤 갑작스럽게 이뤄졌다. 다른
연재칼럼삐리용2023-02-07 -
남편을 실종신고 했다
자정이 가까워져 가는데 남편의 행방이 알 수 없었다. 비가 내리고 있었다.결국 112에 실종신고를 했다.“남편이 집에서 낮 1시쯤에 나간 것 같은데, 아직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핸드폰도 카드도 가져가지 않았어요. 예? 마지막 모습요? 방에서 낮잠 자고 있었어요. 술? 술은 일 년에 두세 번쯤 저랑 같이 만나는 친구들 모임 제외하고는 술 안 마셔요. 우울증요? 그런 건 없어요. 아픈 데요? 없어요. 오늘도 비 오는데 조기축구에 다녀왔어요.”112 버튼을 누르기 직전까지만 해도 설마 안 들어올까 싶었다. 혹시 편지라도 있을까 싶어 침대
연재칼럼노지2022-11-23 -
내 아내는 욕쟁이
내 일요일의 일과는 단순하다. 오전에 축구를 하고 돌아와 점심을 먹는다. 그리고는 푹 잔다. 평화롭고 안온하다. 이 일요일의 평온한 루틴에 균열을 내는 자가 있다. 물론 나의 아내다. “좀 이따 마트 가자! 두 시간 낮잠 자고 세 시에 가자.”아내의 말을 귓등으로 넘기고, 일단 잔다.“세 시야! 마트 가자!” 한참 깊은 수면의 동굴에 있는 나를 뒤흔들어 깨우는 성마른 아내의 목소리! 단잠에서 깨어나 차를 몰고 움직일 생각을 하니 지옥이 따로 없다. “내일 가자. 진짜 못 일어나겠어.”경험해본 바, 두려움 없이 진실을 고하려면 먼저
연재칼럼삐리용2022-11-09 -
왜 맨날 털이 없지?
남편은 오랫동안 백발의 긴 머리였다. 그가 이 연재의 첫 화에서 밝힌 바대로, 그렇게 되기까지 사연이 제법 있었다. 그런 그가 지금 머리를 커트하고 염색도 했다. 이번에는 수염을 기르겠다고 한다. 독자 여러분의 열렬한(?) 응원에 힘입어 그는 한껏 기고만장해졌다.“당신 빼고 세상이 다 나를 응원해.”수염 기른 꼴을 봐야 한다니. 몹시 못마땅했지만 참았다. 실내에서 일하며 하루 종일 마스크를 끼고 있어야 하는 현실이 얼마간 다행스럽게 여겨졌다. 밤에는? 불을 끄면 되지.그의 수염 프로젝트는 용두사미였다. 두 달쯤 되었던가. 어느 날,
연재칼럼노지2022-10-25 -
나의 쓸모와 욕 처방
10월이다. 며칠째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분다. 스산하다. 내게 가을은 늘 못마땅하다. 겨울이라는 정해진 끝을 예감케 하고, 또 예비를 강요하는 시간! 이런 가을의 시간을 견딜 요량으로 몇 년 전까지는 쟈크 프레베르의 시를 노래로 만든 Les feuilles mortes(Autumn leaves)을 듣곤 했다. 목소리가 실린 노래로는 이브 몽땅의 것만 들었고, 여러 재즈 연주자들의 버전들을 플레이 리스트에 함께 모아 내리 듣곤 했다.내 귀에는 마일스 데이비스의 트럼펫이 최고였다. 이브 몽땅의 목소리가 쟈크 프레베르의 시를 가장
연재칼럼삐리용2022-10-11 -
물고문과 김치찌개 20인분
온 가족이 함께 수영하러 다니면 좋겠다는 로망이 있었다. 누가 보더라도 건강한, 화목한 로망 아닌가. 대학시절에 이미 수영을 배웠던 나는, 남편과 아들, 딸에게 강습을 받도록 했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였다. 가장 어린 여덟 살 딸아이는 수영장에 갈 때마다 신이나 들썩들썩 했다. 하지만 남편과 아들은…, 한라산만한 귀찮음을 등에 짊어진 듯했다. 나는 모른 척했다.몇 개월 지나 딸아이는 거침없이 물살을 헤치며 빠르게 월반 했고, 남편과 아들은 여전히 수영장 물을 과음하면서 서로를 의지하고 있었다. 하루는 아이들을 픽업하러 온 엄마들이
연재칼럼노지2022-09-27 -
하루 세 번이 나쁩니까?
세금고지서처럼 코로나가 내게로 배달됐다. 8월말 어느 수요일 저녁, 친한 후배 S와 K를 불러 식당에서 고기를 구워먹었는데, S가 다음 날 아침 코로나 확진 사실을 알려왔다. 가게 유리창문을 사이에 두고 병원에 다녀오는 S와 대화를 나눴다. S의 얼굴은 붉었고, 눈은 왠지 슬퍼보였다. 사람 마음이 참 간사하게도, 후배가 가고 나니, 아내와 나는 몸에 열이 나는 것 같고, 오한이 드는 듯도 했다.부랴부랴 약국 몇 군데를 돌아 두 종류의 자가 키트를 사서는 떨리는 마음으로 테스트를 했다. 다행이 둘 다 음성이었다. 그럼에도 아내는 유난
연재칼럼삐리용2022-09-13 -
안 하는 편을 택하는 남자
12년 전 제주에서 살기로 했을 때, 우리 부부에게는 차가 아니라 면허가 없었다. 무슨 대단한 환경론자의 사명을 띤 건 아니었지만, 더러는 그런 대의에 기댈 때도 있었다. 솔직히 그보다는 21세기 운전면허 미소지자로서의 허세가 더 컸다. 희소성을 갖춘 자기만족이랄까. 아무튼 우리는 그렇게 차 없는 제주 생활을 그럭저럭 해내고 있었다. 걸을 수 있을 때는 걷고, 걸을 수 없을 때는 바구니가 달린 귀여운 자전거를 탔다. 그것도 안 되면 버스나 택시를 탔다.나는 고질적인 편도선염 환자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호되게 앓는다. 제주에서 첫
연재칼럼노지2022-08-29 -
서랍 안에 다소곳하게, 마침내!
나는 쇼핑을 좋아한다. 명동 롯데백화점을 사랑했다고 해야 할까? 광화문 교보문고처럼, 그곳이 좋다. 시시한 농담이지만, 백번 돈다고 백화점이라는 말대로, 나는 그 안에서 영원히 길을 잃어도 크게 상관이 없다. 아, 오해는 마시라. 필요한 하나를 사기 위해 백 번을 도는 것이지, 백 개를 사려고 그려는 것은 결코 아니니. 어쨌든, 무엇을 사야겠다고 결정하고, 그것을 고르기 위해 이곳저곳을 누비고, ‘마침내’ 혹은 ‘드디어’ 마음에 흡족한 그 어떤 하나를 집어들 때의 쾌감과 스릴을 나는 진심으로 즐긴다. 내 안에서 자본주의는 그렇게 숨
연재칼럼삐리용2022-08-16 -
프롤로그: 아내라는 이름의 계엄령
얼마 전 김지하 시인이 타계했다. 그의 시를 나는 기억한다. 가령 의 한 대목 같은 것들.“내 머리는 너를 잊은 지 오래/내 발길은 너를 잊은 지 너무도 너무도 오래/오직 한 가닥 있어/타는 가슴 속 목마름의 기억이 /네 이름을 남 몰래 쓴다 민주주의여”내 책꽂이를 뒤져보면 김지하 시인이 살아생전에 펴낸 책 대부분(아마 80% 정도?)이 있을 것이다. 읽은 것도 있고, 그저 사두기만 한 것도 있다. 아마 시인이 앞으로도 100년을 더 살며 책을 낸다면, 그 책들까지도 사 모으기 위해 나 역시 100년을 살고 싶었을
연재칼럼삐리용2022-08-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