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구간(新舊間). 지상에 내려와 인간사를 돌보던 1만 8천 토속신들이 1년간의 임무를 마치고 옥황상제에게 업무 보고를 올리고 새로운 곳으로 발령받는 기간, 그러니까 이때는 이사를 해도 신들이 알아채지 못해 화가 없다는 기간이다.
육지에는 ‘손 없는 날’을 정해 이사하는 풍습이 있었지만 지금은 이를 고려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제주 역시 이런 무속신앙을 믿는 게 많이 사라졌지만, 이미 오래전부터 신구간에 집중적으로 이사를 해버렸고, 사글세(죽을세)라는 제주에서 흔히 보이는 계약 방식으로 인해 신구간은 여전히 유효한 셈이다.
이맘때쯤 가전제품 판매점에서 ‘신구간 세일’이라는 현수막은 제주에서만 볼 수 있다. 이사와 관련 얘기를 친구들과 한다거나 제주 1년 살이를 하고 싶은 지인들과 이야기할 때면 제주의 신구간 이야기는 꽤나 좋은 안줏거리가 된다.
유래가 된 제주의 재미있는 (내가 아는 범위 내에서의) 무속신앙으로 시작하여, 제주의 배고픈 과거 그리고 날씨와 삶의 밀접한 관계를 이야기하면 제주도가 왜 그리 무속신앙에 절실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설명하면 다들 고개를 끄덕인다.
제주에서 자라는 동안 이사는 딱 한 번 20년 전에 했다. 그런데 그게 옆, 옆집으로의 이사였다. 이삿짐은 가족과 동네 지인들의 도움으로 해냈다. 무려 5인 가구의 이사를 셀프 이사로 진행한 셈이다. 행동반경과 동네 친구는 동일했고, 전학 역시 하지 않았다. 이사를 하고 나서는 예전 집 대문까지 갔다가 아차 하고 돌아오는 순간도 몇 번 있었다.
그때도 신구간이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그랬을 확률이 크다. 이웃분들, 부모님 지인과 친척들을 초대해 집들이를 거하게 하고 조금 더 넓어진 마당에 무슨 나무를 심을까 부모님이 물어봤을 때 나는 비파나무를 심었으면 좋겠다고 했고 대차게 거절당했다. 제주에서의 유일한 이사의 추억이다.
말도 안 되게 오른 전세와 대출까지 받기 힘들어진 상황에서 집을 구하러 다닌다는 것은 정신적으로 정말 힘든 일이다. 맘에 드는 집은 하나같이 비싸고, 맞는 조건이면 끝없는 오르막을 걸어 올라가야 보이는 오래된 빌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네 자취생들에겐 다가오는 계약만료일이 두렵다. 그때라도 무리해서 그 집을 샀어야 했는데 하는 후회는 오른 집값만큼 거세게 휘몰아친다. 그리고 결국 줄줄이 들어선 고급 아파트를 보며 저런 집에는 도대체 누가 살고 있는 것인가 하며 나의 상황을 한탄할 수밖에 없다.
세어보니 육지에서 지내는 동안 이 지독한 이사라는 경험을 무려 7번이나 했다. 그리고 7번째 집에 지낸 지 두달이 되어간다. 그래도 결국엔 조건에 맞는 집을 어찌어찌 구했고, 나름 만족하면서 지낸다. 최고가 아니더라도 최선의 집, 그렇기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이 가장 편하고 좋은 건 어쩔 수 없다.
“분명히 아니라고 들었습니다 / 계단 몇 개는 내려가지만 / 여긴 1층이라고 반지하 절대 아니야 / 이 정도면 가격 대비 최고”
자취생이라면 누구나 부동산 중개업자에게 들었을 만한 말로 시작하는 정밀아의 <내 방은 궁전>은 그의 음악 중에 가장 유쾌한 곡이 일 테다. 내 방을 둘도 없는 마음속 ‘궁전’이라고 부르는 이 음악은 듣고 나면 자칫 싫증 날 뻔한 이 공간을 다시 사랑스럽게 만든다.
제16회 한국 대중음악상 최우수 랩&힙합 음반인 뱃사공의 [탕아(2018)] 앨범에 수록된 <우리 집>도 이러한 결을 같이 한다. “더 멋진 집이래도 더 비싼 집이래도 / 난 여기 우리 집이 제일 좋네”라는 가사로 골목 깊숙한 곳에 위치하고 내 가족이 살고 있는 갈색 빌라가 최고라고 얘기한다. ‘머니스웩’과 ‘플렉스’ 문화가 중심이었던 당시 힙합 신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한 셈이다.
내 가족이 있고 내 추억이 담긴 이 집이 가장 좋고, 필요한 것은 늘 내가 아는 곳에 정확히 있으며 익숙한 향기가 배어있는 빨래와 이불이 있는 내 집이 가장 편하다는 이 두 음악은 수십억짜리 높고 고급스러운 아파트가 아니더라도 나는 만족하며 잘 살아가고 있음을 이야기한다. 언덕만 잠깐 올라가면 고급 빌라들이 즐비한 이 동네에서 재개발이 확정된 오래된 집에 살고 있는 나 역시도 나름 만족하면서 잘 살아가고 있다.
20년 전에 이사한 집에는 여전히 부모님이 살고 계신다. 무화과는 여전히 세상에서 가장 달콤하고, 댕유지는 여전히 세상에서 가장 쓰다. 며칠이 지나면 제주행 비행기를 타 그 집으로 간다. 오랜만에 왔다고 저녁상이 거하게 차려질 것이고 소주 한잔하면서 뉴스를 볼 것이다.
정치 얘기를 할 것이고, 회사가 바빠서 힘들다는 얘기를 할 것이고, 지금 집은 맘에 든다는 얘기를 할 것이고, 마지막엔 얼른 결혼하라는 부모님의 말을 무시한 채 방으로 들어가 누울 것이다. 그리고 ‘역시 우리 집이 제일 좋네’라고 속으로 느끼며 오래간만에 편한 잠에 들 것이다.
잡식성 음악 애호가이자 음반 수집가. 중학생 시절 영화 <School Of Rock(스쿨 오브 락)>과 작은누나 mp3 속 영국 밴드 ‘Oasis’ 음악을 통해 ‘로큰롤 월드’에 입성했다. 컴퓨터 앞에 있으면 음악을 계속 들을 수 있다는 이유로 컴퓨터과학과 입학 후 개발자로 취직했다가 음악 스트리밍 플랫폼 기획자로 전향. 평생 제주도에서 음악과 영화로 가득한 삶을 꿈꾸는 사람. 한 달에 한 번 제주와 관련된 음악을 이야기합니다. 가끔은 음식, 술, 영화에 대해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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