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지국제병원의 모습
녹지국제병원의 모습. (사진=제주투데이DB)

제주도가 국내 첫 영리병원 설립을 추진한 녹지국제병원을 허가할 때 내건 ‘내국인 진료제한’ 이 위법하다는 법원의 판단이 나왔다. 이에 따라 의료계 및 시민사회에 파장이 예상된다.

제주지방법원 제1행정부(재판장 김정숙 수석부장판사)는 5일 오후 2시 중국 녹지그룹의 자회사인 녹지제주헬스케어타운 유한회사(이하 녹지)가 제주도를 상대로 제기한 ‘외국의료기관 개설 허가조건 취소’ 청구 소송에서 원고의 손을 들어줬다.

내국인 진료제한에 대한 허가 조건은 아무런 법령상 근거 없이 내걸어 위법하다고 본 것이다.

#. '내국인 진료제한' 조건, 개설허가 요건 미해당

재판부는 ”제주특별법은 내국인 진료 허용을 전제로 외국의료기관 개설허가 제도를 규정하고 있다. 내국인 진료 제한 조건은 해당 제도의 입법취지에 부합한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외국인기관 개설허가 제도 자체가 환경이나 경관 측면에서 문제가 있더라도 법규에 위반되지 않으면 행정기관에서 허가해야 하는 성질을 띈다고 봤다. 따라서 부가 약관을 붙일 수 없고, 해당 조건 자체가 개설허가 요건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이어 “피고가 의료기관 개설허가 사전심사 승인통보 시 붙일 수 있는 조건은 의료기관 개설허가의 요건으로만 작용한다”면서 “피고가 허가 요건이 모두 충족돼 의료기관 개설을 허가한 상황에서 ’내국인 진료제한’ 조건을 붙일 수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재판부는 제주도의 외국의료기관 개설 허가도 아직 유효하다고 봤다. 제주도가 제주특별법에 따라 녹지 측이 영리병원 개설 조건을 충족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보건의료정책심의위원회 회의를 거쳐 취소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제주특별법 제정 이전에 시행됐던 구 제주국제자유도시특별법에서는 외국인의 '외국인 전용' 의료기관 개설에 관한 특례를 규정했지만 현재 삭제됐다. 재판부는 이를 바탕으로 외국인이 개설하는 의료기관에 내국인을 대상으로 의료업을 행하는 것이 허용된 점 등도 판단 사유로 꼽았다. 

제주도 관계자는 이번 판결에 대해 ”판결문을 면밀히 검토, 전담법률팀과 향후 방향을 논의하겠다“고 밝혔다.

도는 이와 별개로 오는 12일 보건의료정책심의위원회를 열어 개설 허가 요건 실질적 요건 미충족에 따른 행정 절차를 벌일 전망이다.

오상원 의료영리화저지와 의료공공성강화를 위한 제주도민운동본부 정책기획국장이 5일 재판 후 제주지법 정문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의견을 말하고 있다. (사진=박지희 기자)

#. 의료민영화 신호탄될까 ... 의료계·시민사회 파장

녹지 측은 지난 1월 대법원에서 병원 개설허가 취소를 취소해달라는 소송에서 최종 승소한 바 있다. 뒤이어 이번 1심 재판에서도 승소, 향후 재판에서 제주도보다 유리한 위치에 서게 됐다.

이번 판결은 외국의료기관 개설에 관해 의료법에 관련 규정이 없고, 제주특별법에 근거해 허가가 이뤄진 국내 첫 사례다. 

이에 따라 내국인 진료가 가능한 영리병원이 국내에 들어설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오상원 '의료영리화저지와 의료공공성강화를 위한 제주도민운동본부' 정책기획국장은 이날 재판이 끝난 후 열린 기자회견에서 “재판부에 소송 각하를 요구했지만 안타깝게도 제주도가 패소했다. 모든 영리병원에 내국인 진료가 가능할 수 있는 심각한 우려를 표한다”고 말했다.

오 정책기획국장은 “원희룡 전 도지사의 ’신의 한 수‘가 악수가 돼버린 상황”이라면서 “다만, 이미 녹지제주 측이 병원 건물과 토지 소유권을 매각한 상태라서 재판과 무관하게 병원 개설이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영리병원 반대 운동을 지속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의료영리화저지와 의료공공성강화를 위한 제주도민운동본부는 5일 이번 재판이 열리기 전 제주지법 정문 앞에서 소송 각하를 촉구하는 침묵 시위를 벌였다. (사진=박지희 기자)

중국 녹지그룹의 자회사 녹지제주는 서귀포시 토평동에 조성된 제주헬스케어타운에 지하 1층, 지상 3층, 전체면적 1만7679㎡ 규모 녹지국제병원을 짓고 2017년 8월 제주도에 외국의료기관 개설 허가를 신청했다. 

도는 이에 2018년 12월 5일 외국인 의료 관광객만 진료하도록 하는 내용의 조건을 달아 녹지병원 개설 허가를 내줬다. 하지만 녹지국제병원이 법에 정해진 개원 시한인 2019년 3월4일이 지나도록 개원하지 않자 청문절차를 밟아 같은해 4월17일 개설허가를 취소했다.

녹지 측은 이에 ‘외국 의료기관 개설허가 취소처분 취소 소송'과 '내국인 진료 제한' 조건부 허가가 부당하다는 내용이 담긴 '외국의료기관 개설허가 조건취소 청구 소송‘ 두 가지 소송을 제기했다. 개원이 늦어진 이유는 제주도에 있다는 주장이다.

1심 재판부는 2020년 10월 개설허가취소처분 취소 소송에 대해 제주도의 '개설허가 취소가 정당하다'며 녹지 측의 청구를 기각했다. '내국인 진료금지' 조건에 대해서는 선고를 연기했다.

그러나 지난 1월 15일 개설허가 취소 처분이 부당하다는 2심 선고가 확정되면서 이번 소송이 15개월만에 재개됐다.

녹지 측은 재판 과정에서 ‘내국인 진료 제한 조건’에 대해 “해당 조건은 법령 근거가 없어 헌법상 법률유보원칙에 위반된다”면서 “해당 조건으로 내국인 진료가 제한될 경우 경제성이 떨어져 병원을 안정적으로 운영할 수 없다. 이 뿐만 아니라 내국인 진료 거부를 금지하는 의료법 위반에 따라 형사 처벌 등의 불이익을 당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반면 제주도는 “녹지 측 사업계획서와 허가 조건 자체가 처음부터 외국인에 한정됐다“면서 ”외국인의료기관 설치는 제주특별법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에 특별법상 도지사에게 개설 조건을 설정할 수 있는 재량권을 행사할 수 있다“고 맞선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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