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1쪽.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의 분량(2015년 12월4일 인쇄본 기준)이다. 수백 쪽이 넘는 ‘4·3의 진상’을 정부가 세상에 내놓은 지도 20년이 다 되어간다.
하지만 여전히 극우진영에선 “정부 보고서가 왜곡됐다”라며 근거 없는 주장들로 ‘4·3의 진상’을 부정하는 행위를 한다. 예전엔 이런 역사 왜곡 행위의 주체가 일부 극우 인사들이었다. 지금은 국회의원과 여당 대표급 인사에게까지 확장됐다. 게다가 역사 왜곡 행위의 근거로 등장하는 논리들은 더욱 촘촘해지고 진화했다.
4·3운동 진영을 비롯한 제주사회에선 이제 더 이상 ‘4·3 왜곡 행위’를 그저 몰상식으로 치부하며 무시할 수 없다는 여론이 거세졌다. 4·3의 역사를 바로 세우는 과정으로서 왜곡 행위에 대응하는 방안을 논의하는 자리가 마련됐다.
제주4·3희생자유족회와 제주4·3연구소, 제주민예총, 제주4·3기념사업위원회, 제주4·3평화재단, 제주4·3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도민연대 등은 지난 16일 오후 제주4·3평화교육센터 대강당에서 ‘4·3역사 왜곡,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토론회를 열었다.
처벌 초점 대응, 4·3 의제 파편화시켜
“왜곡 문제는 끝이 없는 싸움입니다. 지금까지의 4·3운동 방법론과는 다른 접근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날 주제발표 2부 ‘4·3역사 왜곡,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에서 고성만 제주대학교 사회학과 교수는 ‘4·3 역사 왜곡 논의장의 조건’ 주제로 발표를 진행했다.
고성만 교수는 “지난 2월부터 여당 정치인들로부터 왜곡 발언이 이어지고 시내 곳곳엔 4·3을 두고 혐오 문구들이 내걸렸다”며 “‘4·3 역사 왜곡’ 논쟁이 임계점을 넘어가며 혐오는 혐오대로, 왜곡은 왜곡대로 그에 대한 맞대응이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4·3단체들은 태영호 국회의원의 4·3 역사 왜곡 발언을 두고 법률 소송을 진행하고 있다. 또 한편으론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하 4·3특별법) 내 왜곡에 대한 처벌 조항을 신설하는 개정을 추진하고 있다.
이에 대해 고 교수는 “4·3에 대한 왜곡과 혐오의 문제가 중요한 질문들은 생략된 채 법정으로, 국회로 갔다”며 4·3특별법 개정에 앞서 해결해야 할 질문들을 제시했다.
그 질문들에는 △‘부인’ 또는 ‘왜곡’이 어떤 사회·문화적 배경 속에서 싹 트는지 △혐오는 어떤 감정의 표현인지 △‘희생자 및 유족’의 명예를 훼손하지 않는 허위 사실을 유포할 경우 △‘부인·왜곡·허위’ 여부와 ‘유포’ 기준은 어떻게 판단할 것인지 등이 있다.
또 △왜곡을 일삼고 선동하는 자들은 처벌과 단죄의 대상인지, 아니면 ‘화해와 상생’의 장으로 편입시켜야 할 대상인지 △형사법이 혐오와 차별, 조롱을 억제하는 최선책인지에 대한 질문도 필요하다.
왜곡과 혐오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려는 노력은 제껴둔 채 법적인 처벌을 강화하는 것만이 유효한 대안이 될 수 있을지에 대한 물음이다. 고 교수에 따르면 이런 방식은 오히려 ‘부인과 왜곡’을 사회적인 현상으로 인정하고 고착화하는 방향으로 흐를 수도 있다.
고 교수는 “벌칙 규정 신설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4·3특별법 개정은 ‘역사 왜곡’을 근절할 해결책이라는 전제에 회의적”이라며 “‘역사 왜곡’에 쌓인 여러 겹, 여러 층의 쟁점 검토는 생략한 채 시도되는 법의 고도화 및 ‘법 만능주의’적 접근은 의미 있는 논의장 형성을 어렵게 한다”고 피력했다.
이는 ‘전국화·세계화·미래화’라는 4·3의 과제로 나아가는 데 반드시 논의되어야 할 의제들을 파편화할 가능성이 높다. 과거청산의 선택지를 처벌이냐, 비처벌이냐로 협소화하기 때문이다.
법원과 국회로 가며 간과한 질문들
고 교수는 역사 왜곡에 대한 처벌과 관련한 법 개정에 앞서 논의가 이뤄져야할 쟁점에 대해 강조했다.
첫째로 4·3특별법 제13조의 불명확성이다. 이 조항은 특별법에서 정의하는 ‘제주4·3사건’과 진상조사보고서의 결과가 일치한다고 전제하지만 실제로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특별법에선 사건 초기를 ‘소요사태’로, 보고서에선 ‘무장봉기’로 규정하고 있다.
고 교수는 “13조가 신설되던 2021년 전부 개정에서 ‘제주4·3사건’을 ‘소요사태’로 규정하는 ‘정의’ 조항을 바꾸지 않음으로써 20년이 넘는 과거청산의 성과에 역행하는 선택을 해버렸다”며 “13조는 ‘4·3특별법’과 ‘진상조사 결과’의 불일치라는 모순된 토대 위에 만들어졌다”고 지적했다.
둘째로 13조가 내포하는 차별성 또는 배재성이다. 4·3특별법은 신청주의와 공적 승인에 따라 ‘희생자’와 ‘유족’을 정하고 있다. 권익 보호와 명예 훼손의 방지를 규정한 13조 역시 그 대상은 정부가 인정한 ‘희생자’와 ‘유족’에 한정될 수밖에 없다.
고 교수는 “13조는 어떤 이름조차 부여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차별조항으로 작용할 수 있다”며 “‘희생자’와 ‘유족’의 자격을 얻지 못한, 혹은 박탈된 사람들은 더욱 논외 대상으로 밀려나 ‘희생자·유족’과 ‘비희생자·유족’ 간 ‘기울어진 운동장’은 고착화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셋째로 13조 적용 범위가 국가와 국민으로만 제한하고 있다는 점이다. 고 교수는 “4·3 역사 왜곡에 대한 벌칙을 특별법 안에서만 보강한다고 해서 근본적인 대응책이 되긴 어렵다”며 “국내에선 ‘여수·순천 10·19사건’을 비롯한 당대의 역사 인식과 상호작용을 해야하고 일본에서도 4·3 혐오 표현이 발생할 수 있다. 13조의 적용 범위가 국가와 국민 너머까지 넓혀야 하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이어 “‘희생자·유족’의 자리는 이미 오래 전부터 경계를 넘어 형성돼 왔다”며 “4·3의 세계를 초국가적, 초지역적으로 재구성해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넷째로 4·3 역사 왜곡에 대응하기 위해선 단수(처벌)가 아닌 복수의 선택지를 모색해야 한다는 점이다. 고 교수는 “역사 왜곡에 대응한다고 했을 때 떠오르는 이미지는 전투적이고 비장하다. 과연 이런 장면밖에 없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며 “역사 왜곡에 대응하는 다양한 자세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어 “태영호 의원의 경우 법적 소송이나 법적 대응 이외에 새터민에 대한 교육이 이뤄진다고 한다면 ‘화해와 상생’에 가까운 접근 방식 아니겠느냐”며 “한국 사회가 다문화 사회로 가고 있는 만큼 4·3 교육의 대상을 넓게 설정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민주화 이전의 ‘침묵과 금기의 시간’까지 거슬러 올라가 과거청산의 과제들이 개별적으로 흩어지지 않도록 왜곡사의 목록을 재구성할 필요가 있다”며 “이런 자료들이 ‘4·3 역사 왜곡’을 둘러싼 논의장 속에서 재평가될 때 벌칙이 아닌 대안의, 복수의 대응책이 강구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는 ‘화해와 상생’의 방도와도 어울린다”고 덧붙였다.
4·3 왜곡 행위 반복될 것…적극적으로 방어해야
이날 “처벌만이 최선은 아니”라는 고 교수의 발표에 대해 “(4·3 왜곡 행위에 대해)지금은 적극적으로 방어하고 공격해야 하는 시점”이라는 반론이 나오기도 했다.
주제발표 뒤 이어진 종합토론에서 양정심 제주4·3평화재단 조사연구실장은 “이런 과거사 왜곡 문제는 표현의 자유로만 볼 수 없다. 유족의 아픔을 저희 학계에서 어떻게 표현의 자유라고 할 수 있겠는가”라고 지적했다.
양 실장은 “왜곡 문제에 법적인 대응이 최선이 아닐 수도 있다. 차선일 수도 있다. 차선을 통해서 우리들은 최선을 다해왔다”며 “‘그들’이 먼저 4·3을 왜곡하고 폄훼했다. 예전엔 그 행위에 대해 무시한 적도 있었지만 지금 같은 어려운 시기엔 적극적으로 방어하고 공격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어 “‘그들’은 절대 계몽될 수 없다. 돌아서면 똑같은 내용을 반복할 것이다. 이 자리에서 해야할 부분을 해야한다. 단순하게 대응해야 대중적인 파급력을 가질 수 있다. 법적인 대응도 하고 피켓도 들어야 한다”며 “저 역시 지금까진 왜곡 행위를 무시해온 사람이지만 지금은 결기를 다져야 할 때”라고 피력했다.
그러면서 “5·18기념재단이 역사 왜곡 대응을 위해 한 역할을 제주4·3평화재단이 해야한다고 생각한다”며 “제주도의 예산 지원을 통해서 4·3단체와의 연대를 통해서 재단이 주도적으로 대응에 나설 것”이라고 밝혔다.
양성주 제주4·3희생자유족회 부회장 역시 “더 이상 가만 있어선 안 된다”며 “4·3에 대한 왜곡과 명예훼손이 선거를 의식한 정치권에서 이뤄지는 경우엔 정치적인 해법과 함께 법률적인 대응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어 “점점 극단적인 혐오정치가 구현되는 현 시점에서 4·3에 대한 자극적인 표현이 정도를 심해갈 것으로 예상된다”며 “4·3혐오를 이용하는 정치인이 발을 붙일 수 없도록 적극적인 대응을 해야한다”고 강조했다.
또 “보수 유튜버 등이 개인 매체에서 검증이 안 된 사실을 근거로 왜곡하거나 명예훼손을 하는 경향이 나타나는 만큼 지속적이고 폭 넓은 모니터링 체계를 갖추는 것도 중요하다”며 “이를 위해 광주5·18의 사례처럼 4·3유족회와 4·3평화재단, 시민사회 단체, 법조인 등이 함께 왜곡 대응 방안을 마련하는 연대기구 또는 협의체를 구성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